95화. 후작의 치졸한 괴롭힘 (1)
상황은 그럭저럭 진정됐다.
분을 참지 못한 후작과 그의 친구들이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누군가의 소중한 생일 연회는 장렬하게 망해버렸다.
탐스러운 음식이 놓인 테이블 앞에 있던 사람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죄, 죄송합니다, 힐……. 제가 못나서 이런 꼴을 보여, 보여 드렸네요.”
아, 이런.
어깨를 크게 들썩이며 울고 있는 영주님을 보니, 내 마음도 썩 좋지 않아졌다.
“으아앙, 오빠야! 울지 마아!”
게다가 지켜보던 루아가 울음을 터뜨렸기 때문에.
“괜찮아요, 영주님. 그래도 큰일은 없었으니까요. 루아도 뚝, 언니도 오빠도 루아도 다 괜찮으니까. 응?”
내 위로에도, 손수건으로 눈을 꾹꾹 누른 영주님이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 작자는 분명 힐에게 앙심을 품었을 겁니다……. 쉽게 포기할 성격이 아니에요.”
그래 보이긴 했다. 마지막까지 서슬 퍼렇게 노려보고 나가는 그 얼굴은 쉽사리 포기할 것 같진 않아 보였으니까.
‘정말 내 꽃이 필요한 것도 아니겠지.’
그냥 오기, 집착.
감히 자신의 명령을 듣지 않은 시건방진 평민에 대한 분노일 것이다.
앞으로 골치 아플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당장 훌쩍이는 루아의 눈물이 더 슬펐고, 영주님의 시무룩한 눈이 아팠다.
난 담담하게 대꾸했다.
“정말 괜찮아요. 오늘 보셨잖아요. 호락호락 당하지는 않을 거예요.”
*
그렇게 다음 날.
딸랑!
문에 달린 종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힐!”
어제의 일을 들었는지 꽃집 문을 열자마자 튀어들어온 엘라가 두 눈을 벌겋게 물들인 채 탁자를 아프게 내리쳤다.
“너, 너 진짜!”
그리고 외쳤다.
“그 진상이 또 왔었다면서!”
“응?”
“그리고 멋지게 해치웠다면서!”
“아.”
그래도 왕실의 후작인데 진상이라 당당히 외치는 엘라의 포부를 놀라워해야 하는지.
아니면 진상이라 불릴 만큼 그 귀족이 이곳에서 난장을 부린 적이 있었던 것인지.
어떤 것이 놀라야 하는지 몰라 입을 달싹이는데, 성질 급한 엘라가 날 이끌어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빠르게 말을 이어나갔다.
“얘기 다 들었어. 아니 그 빌어먹을 인간이 또 왔을 줄 누가 알았겠어. 그랬다면 나도 같이 갔을 텐데!”
“그 사람을 잘 알아, 엘라?”
“알지.”
엘라의 얼굴 위로 짜증이 한껏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혀를 내둘렀다.
“그 새, 아니 그 인간. 그렇게 안 보여도 우리 영주님의 외가 쪽 사촌이거든. 몇 번 본 적도 있고. 평민 알기를 쥐새끼보다 못하게 여기더라.”
이건 정말 놀랐다.
그 심술이 덕지덕지 붙은 인간과 친척이라고?
“친척이라고 해서 그래? 어휴, 그렇게 안 보이지? 전혀 안 닮았잖아. 성격도 외모도.”
“응…….”
친척이라 해도 꼭 원수 같은 사이였다. 그래서 내가 뭔가 모르는 사정이 있는가 싶었다.
엘라는 내 속을 읽은 것처럼 설명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는데, 그 후작이라는 자가 영주님을 싫어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열등감이야, 열등감.”
“그게 다라고?”
“응. 우리 영주님이 좀 이른 나이에 백작 위에 오르긴 했잖아. 그때까지만 해도 그 인간은 별 볼 일 없는 능력 때문에 후작 후계자 자리에서 자를까 말까 논의가 되고 있었거든. 뭐, 도박 빚이 많았다던가 하는 것도 있고.”
생각보다도 더 문제가 많은 자였던 모양이다.
굳이 왕족을 들먹일 필요도 없이 뒷조사를 통해 약점을 틀어잡았을 수도 있었겠다.
그것을 유념하며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엘라가 손을 딱 튕겼다.
“바로 그래서야. 처지가 달랐던 것. 우리 영주님은 조용하긴 하지만 그래도 제법 수입이 짭짤하고 사방이 요새 같은 평화로운 영지를 손에 넣었으니, 그게 배알이 꼴린 거지. 욕심도 더럽게 많거든.”
난 허탈해졌다.
그럼 영주님은 아무 죄 없이 그 곤욕을 치르고 있었던 거라고?
“그게 뭐야. 아니, 그보다 그런 문제 많은 자가 어떻게 후작 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거야?”
물론 혈통이 중요하긴 하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하자 사유여야 눈 감고 넘어가지 않겠는가.
잠깐 마주친 것이었지만, 그에게는 유별나게 느껴지는 축언과 이능도 없어 보였고, 체격이 뛰어나거나 검술이 특출나거나 해 보이지도 않았다.
기억에 남은 것은 오로지 그 비열한 미소뿐이었다.
“여러 소문이 많은데, 어쨌든 어쩔 수 없이 그자를 올렸다는 이야기가 있었어. 다 죽었다고 했거든.”
“다 죽었다고? 다른 후계자들이 말이야?”
“응. 정확한 사인은 모른다나.”
엘라의 얼굴이 어둑해졌다.
“그 뒤로 간간이 영주성에 얼굴을 비친다나 봐. 초대장을 보내지도 않았는데 제멋대로 쳐들어와서 영주님을 그렇게 욕보이고 간다지. 진짜 망할 인간들 같으니라고, 그 착한 영주님을 어딜 봐서 괴롭히는 거냔 말이야. 눈앞에 있으면 그냥 확-”
엘라가 과격하게 주먹을 쥐고 흔들었지만, 나는 다른 생각에 빠졌다.
‘그냥 우연의 일치였을 리 없어. 그렇게 좋은 우연이 있을 리 없잖아.’
분명 후계자를 직접 처리한 것은 그 후작이었을 것이다.
입만 번지르르하게 산 인간이라고 생각했는데, 경쟁자들을 모조리 처리할 수 있는 위험인물이었단 말인가?
그럼 내가 한 행동으로 이곳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어쩌지. 이 마을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게 되면…….’
내가 괜한 짓을 한 걸까?
살짝 미간을 찌푸리는데 엘라가 활짝 웃었다.
“요 앙큼쟁이.”
“어, 엘라?”
“무슨 생각하는지 몰라도 걱정하지 마, 힐. 그놈은 여기 마음대로 못 건드려. 그러니까 그 성질머리에 영주님만 좀 괴롭히고 매일 내빼는 거 아냐.”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음, 그게 좀 복잡한데…….”
엘라의 과장이 좀 섞인 것 같은 설명에 따르면 이랬다.
영주님이 생각보다도 대단한 뒷배가 있어서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는 것.
그러나 사람 좋은 그 성격을 이용해서 와서 몇 번이고 시비를 걸곤 한다는 것.
“그리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여기에 집중해야지. 그 미친놈을 입 딱 다물게 하다니. 역시 우리 힐이야! 루아가 감동해서 주변에 다 퍼뜨리고 다니는 바람에 마을 사람들이 다 들었거든?”
엘라의 우렁찬 말에 상념이 뚝 끊기고 말았다. 내가 뭘 했다고?
“빵빵한 손님들을 읊으면서 그 후작놈을 혼쭐 내줬다면서? 으흐흐, 그 꼴을 봤어야 했는데. 아유, 차분하게 생겨서 어쩜 그렇게 똑 소리 나게 행동했어? 이리 와봐, 우리 힐. 언니가 예뻐해줄게. 응?”
얼굴이 뜨끈해졌다.
남은 지금 그로 인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걱정하고 있는데!
그리고 루아도 참. 그걸 또 언제 말했담.
난 손사레를 쳤다.
“돼, 됐어. 그리고 그건 그냥 적당히 둘러댄 것뿐이야, 엘라. 앞으로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는데 내가 괜히 벌집을 쑤셔놓은 것일까 봐…….”
“에잇, 괜찮다니까!”
엘라가 내 어깨를 찰싹 내리쳤다. 으, 아파!
“사람들 괴롭혀도 치졸한 정도의 괴롭힘이겠지. 그 인간은 여태까지 매번 그랬으니까. 걱정하지 마.”
한숨이 나왔다. 정말 엘라의 말대로 별일 없다면 좋을 텐데.
그러나 이 당시에는 엘라도 나도 알지 못했다.
바로 다음 날부터, 그 후작의 치졸한 괴롭힘이 시작될 줄은.
*
“…….”
나는 덮쳐오는 피곤함을 억누르지 못하고 눈을 꾹꾹 문질렀다.
“언니야…….”
놀러 왔던 루아의 우울한 목소리, 그리고 엘라의 쌍욕이 담긴 분노, 마사 아줌마나 지나치던 한스 아저씨가 내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이게 대체 무슨.”
내 꽃집은 엉망인 상태였다.
누가 작정하고 흐트러뜨리고 간 것인지, 밖으로 빼놓았던 팻말과 테이블은 발로 짓이긴 듯 망가져 있었고 안에 들이지 않았던 화분들은 모두 엉망이 되어 깨져 있었다.
특히 이번에 덕을 봐 더 신경을 쓰고 싶었던 알프레네 공주에게 의뢰받은 화분이 엉망이 된 것을 보니 은근한 분노도 치솟았다.
‘이런 짓을 할 사람은.’
역시 그 인간밖에 없겠지.
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 악질적인 괴롭힘이 시작된 지 벌써 3일이나 흘렀고, 이건 어느새 익숙해져버린 하루의 시작이었다.
“또 그 인간이야? 이 미친 후작 새끼 진짜 어디다 화풀이야!”
엘라가 방방 뜨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후우, 심호흡을 했다.
사실 이능을 쓰면 저 망가진 화분도, 엉망이 된 가판대도 모두 한순간에 원래대로 되돌려 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 그럴 순 없었으니, 쪼그리고 앉아 그것을 주섬주섬 정리할 수밖에.
“언니야아, 미안해여. 오빠가 걱쩡했는데…….”
어느새 다가온 루아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촉촉하게 고여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나는 조용히 입술을 끌어당기며 루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지만, 겉과는 달리 속이 편하진 않았다.
후작은 아주 치졸했다.
딱히 인명 피해가 있는 것은 아닐 정도로 3일 동안 나를 지독하게 괴롭혔다.
딱 날파리가 웽웽대는 것처럼 괴롭혔다고 해야 할까.
차라리 크게 다치거나, 공격을 했다면 그에 반격할 수 있었을 텐데 이것은 조금씩 야금야금 괴롭히는 형태와 같았다.
‘하지만 더는 볼 수 없겠어.’
어제보다 오늘이, 그리고 오늘보다 내일이 괴롭힘의 강도가 세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장담을 했던 것처럼 내 꽃집을 무너뜨려 버릴지도 모르고.
나름 정을 쌓았던 내 공간이 짓밟힌 것을 보니 꼭 내가 밟힌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응?’
이상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왜 그래, 힐?”
엘라가 의아한 듯 물어보았지만, 나는 마을의 풍경만 눈에 담았다.
특별히 달라 보이는 자는 없었다. 평소와 같았다.
나는 괜히 뒷목을 쓸어내리며 눈을 깜빡였다. 착각이었을까?
방금 분명히 익숙한 느낌이 들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