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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96화 (96/155)

96화. 후작의 치졸한 괴롭힘 (2)

‘아무것도 아니겠지.’

상황이 이래서 예민해졌던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화분을 정리하며, 어떻게 후작을 꾀어내어 단판을 지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때도 몰랐다.

후드를 깊게 눌러쓴 누군가가 이곳을 바라보다가 몸을 감추었다는 사실을.

*

“그대도 이 사태의 원인을 모른다, 그게 지금 모든 설명의 다인가, 최고 신관 크라이스?”

무려 황제의 앞에서도 고개 빳빳히 들고 서 있는 최고 신관의 모습은 오만하고 무례해 보이긴 하였으나, 제국은 유일신을 믿는 강력한 신권을 바탕으로 한 국가.

그렇기에 역대 최고 신관들은 황제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그러합니다, 폐하. 일전에 서신으로도 분명 설명해 드렸던 것으로 압니다. 이능의 흔적을 보고 모든 것을 판단할 수는 없다고 말이지요.”

“그러나 그대만큼 이능에 빠삭한 이도 없을 터인데?”

“그것은 그렇습니다만.”

“그건 자네가 모른다면 아무도 모른다고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능의 흔적이 아닐 수도 있겠지요. 의원과 약초사들을 대거 고용하여 조사를 시작하시는 것 또한 조언드렸던 것으로 압니다만.”

황제, 디트로이아는 담담하고 아무렇지 않은 것 같은 그 평온한 대답에 울화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어째서 저럴 수 있는가.

의심의 싹도 동시에 트였다.

축언과 이능에 관하여 민심이 흔들리면 가장 큰 타격을 입는 것은 바로 신전일 것이건만 어째서?

황제는 눈을 가늘게 떴다.

“최고 신관, 그대의 기도 유람을 중지하고 제국에 기거할 것을 권유한다.”

“흠?”

그러나 크라이스는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갸웃 흔들었다.

“그건 어째서입니까, 폐하?”

제법 능청스럽기까지 한 그 태도에 황제는 이를 꽉 깨물었다.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최고 신관 크라이스, 그는 황실, 더 나아가 자신에게 호의적인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몰라 묻는가?”

“몰라 묻습니다.”

“……그대의 위치.”

그렇지 않고서야.

“그리고, 지금 상황을 모르고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인가?”

“그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황제는 의자의 손잡이를 쾅 내리쳤다.

“축언과 이능을 지닌 자들만 죽어나가고 있다! 이것이 전염병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이능인지도 모르는 상황에 그대는 기도 유람이나 하고 있다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란 말인가? 이것을 짐이 끝까지 논해야 알아듣나?”

똑바로 마주 보는 저 시선을 무어라 설명할 수 있을 터인가?

그리고.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바로 그때였다.

황제의 생각을 자르며, 크라이스가 조용히 말했다.

“송구하오나, 폐하. 신전에서는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협조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말씀은 모든 책임에 대한 것을 신전에 전가하는 것 같아 듣기 좋지 않군요.”

“허?”

“묻습니다, 폐하. 지금의 그 축언 도둑에 관련된 사건이 저희 신전에서 벌인 일입니까?”

황제는 잠시 심호흡을 하며 말을 멈췄다.

그러나 크라이스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꼭, 그 모습은 더 이상 망설일 필요 없다는 듯 송곳니를 드러낸 뱀과도 같았다.

“저 또한 마찬가지. 기도 유람에 모든 시간을 할애하고 있지는 않으니, 그 시간만큼은 폐하의 명에 따를 수 없습니다.”

“하, 뭐라?”

“자세한 보고는 이후 서면으로 드릴 터이니, 다음부터 황실로의 부름은 자제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폐하께서도 아실 테니까요.”

“무엇을 말인가?”

“제가.”

크라이스의 눈이 빙긋 휘었다.

“제 격에 맞지 않게 몸을 숙여, 황실에 대한 존경을 표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감히 신의 앞에 황실이 더 존귀하다고 말씀하실 생각이십니까?”

“…….”

황제의 말문이 턱 막히는 순간이었다.

크라이스는 끝까지 우아하게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러니 다음부터는, 저를 이런 식으로 부르지 마십시오. 존경하는 폐하.”

*

황제의 집무실 문이 닫히고, 걸어나온 크라이스를 복도에서 조용히 기다리던 사람이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서로 의외라는 시선이 스쳤다. 특히, 크라이스의 속마음에.

크라이스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먼저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태자 전하. 혹여 제게 무슨 볼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황태자, 벤자민.

항상 조용하고, 수더분한 성격으로 날카로운 성정의 황후와는 다르게 그럭저럭 성품에 있어서는 좋은 평가를 받던 이였다.

갑자기 힐데아 폰 힐링턴이 벨키우스의 연회장에서 사라져버린 그 날 이후, 완전히 변모해버리고 말았지만.

크라이스의 신색을 위아래로 천천히 훑은 벤자민의 눈이 범인을 취조하듯 날카로워졌다.

“그대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최고 신관.”

“말씀하시지요. 그전에 자리를 옮기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니. 내 용건은 간단합니다.”

확실히 달라졌다.

목소리에 여유라고는 하나도 없는 것이 당장 궁지에 몰린 짐승 같아 보였다.

크라이스는 그것이 누군가에 대한 갈망 때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저 배고픈 짐승에게 그 먹이를 집어 넣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도리어 그 시선에서 소중한 이를 숨기고, 가두어, 흔적을 지우는 방식을 택할 것이다.

그는 조용한 마을에서 편안히 있을 누군가를 떠올리며, 온화한 미소를 품었다.

이 진저리나는 곳을 벗어나 돌아 가야지. 돌아가서 힐데아의 미소를 마주하리라.

그러면 이 복수와 고통과 번민으로 시끄러운 심장도 고요해질 터였다.

그런데.

“힐데아 폰 힐링턴.”

벤자민의 입에서 나온 그 이름이 크라이스의 조용했던 미소를 금가게 만들었다.

“그 이름을 잘 알고 있을 테죠, 최고 신관?”

아주 잠시 호흡이 멈추고 표정이 흐트러졌던 것을 상대는 귀신같이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떠보는 건가. 아니면 확실히 알고 있는 건가.’

크라이스의 눈에 서늘한 짜증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것은 순식간에 흙으로 덮듯 자취를 감추었다.

“예, 압니다. 제국 수도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이가 얼마나 될까요? 소문에 무지한 신관이라지만, 그래도 저도 듣는 귀가 있는 사람이니까요, 황태자 전하.”

“그럼 내가 그녀를 미친 듯이 찾아 헤매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겠군요.”

“오, 이런. 그것은 몰랐습니다. 그러셨습니까?”

황태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랬습니다. 아주, 미친 듯이, 찾아 헤매고 있어요. 뒤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유감입니다, 전하.”

크라이스는 말을 내뱉으면서 깨달았다. 처음부터 황태자는 무언가 알아내고 자신을 찾아온 것이라는 걸.

“그런데, 저를 왜 부르셨는지.”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흘렸지?

“최고 신관께서 요즘 자주 기도 유람을 떠나신다고 들었는데.”

“네, 그렇습니다. 기도가 필요한 곳은 그 어디에나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것을 왜 물으십니까?”

벤자민이 초조한 듯 입술을 핥았다. 그리고 불쑥 물었다.

“유독 자주 발 걸음하는 곳이 있다고 하시던데, 그 장소를 아는 이가 없더군요.”

벤자민은 웃고 있었고, 크라이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크라이스는 광기로 가득한 황태자의 눈이 자신을 물어뜯으려 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 역시.

“이런, 전하.”

부자가 쌍으로 끈질기군.

“애석히도.”

크라이스는 그 집요한 시선을 끊어내며, 언제나 가면처럼 뒤집어쓴 미소로 화답했다.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이 없군요.”

“뭐, 라고?”

“기도 유람은 모든 흔적을 불문에 부친답니다. 그것은 제가 교육하고 있는 어린 신관님들에게도 공유되지 않는 것인데.”

어떤 것도.

그 어떤 흔적도.

보여주지 않으리라.

“그것을 여쭈시면 저는 난감할 수밖에 없군요.”

벤자민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크라이스는 속으로 어깨를 흔들며 웃고 싶은 것을 참았다.

그 고귀하신 황후께서 자신의 소중한 아들이 이렇게 미쳐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는 것인가 싶었기에.

그리고 그렇게 흔들리는 저들을 보는 것이 너무나 즐거웠기에.

“그래서 가르쳐주지 않으시겠다?”

“예.”

누구의 손도 그녀의 머리카락 끝에도 닿지 못하게 할 것이다.

적어도, 지금은.

힐데아가 그 마을에 머무르고 싶어 하는 지금의 시간만큼은 방해받지 못하는 그의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러합니다, 전하.”

그러니 방해하지 마, 황태자.

만약 그 공간을 짓밟는다면 당신을 죽여버릴지도 모르니.

“설령 그곳이 어디든.”

크라이스는 상냥한 최고 신관의 모습 그대로, 으르렁거리는 것 같은 황태자에게 속삭였다.

“혹시라도 그곳에 전하께서 찾고 계시는 것이 있다 한들. 저는 결코 말해드릴 수 없습니다.”

*

“정말 괜찮겠어, 힐? 그 미친놈이 이 정도로 순순히 물러날지 모르겠는데…….”

“그래도 이대로 계속 있을 순 없어, 엘라.”

“그건 그렇지만.”

엘라는 당장 말리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내 의지는 단호했다.

“흔적만 안 남기면 돼. 용병 길드의 정보는 그렇게 허술하지 않아.”

이대로 계속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가만히 있으면 점점 더 격하게 공격해올 것이고, 그래도 되는 줄 알 것이다.

어제 오후에는 사람을 보내 마사 부인의 가게까지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을 들었고, 나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

후작 같은 잔인한 성격의 자들은 매운맛을 단단히 보아야 그칠 것이 분명했다.

나는 거금을 들여 용병을 고용한 상태였고, 그들이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그러니 나는 그들과 손을 잡고 후작이 보낸 자들을 제대로 손봐주면 되는 것이다.

물론, 적당히. 이쪽도 반격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줄 수 있을 정도로만.

“더는 안 돼.”

때는 바로 내일.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날이 밝았다.

*

“이게 진짜 꿀 보수지.”

“가게 하나만 망쳐도 두둑하게 돈을 주니, 얼마나 좋아?”

술에 불콰하게 취한 라난 용병단원들은 낄낄 웃으면서 어제 망쳤던 꽃집을 떠올렸다.

“그런데 그 귀족 나으리도 할 일 더럽게 없지, 고작 여인네 꽃집 하나 망치고자 그 큰 돈을 써?”

“귀족들 속마음을 우리가 알 게 뭐냐?”

“그 꽃집 주인이 반반하긴 하던데, 속셈이 있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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