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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97화 (97/155)

97화. 나만 보게 할 겁니다 (1)

라난 용병단. 그들은 알아주는 용병단이었다.

그들은 퇴물 군인 출신들로 예전에는 전쟁터를 전전하며 비겁한 수를 쓰며 살아남았었는데, 어느 날 한 귀족에게 발각당해 본국에서 추방당했다.

하지만 아직도 쓰임새는 있었다.

주로 귀족들이 더러운 행패를 부리는 일을 대신 해주는 것.

짭짤한 소득에 고작 평민들 위협하는 것이니 목숨의 위험도 없어 아주 만족스러운 일자리였다.

특히, 이번 의뢰자인 후작은 제법 그들을 자주 찾는 의뢰인이었다.

적당히 겁을 주고 괴롭히면 그 꽃집 여자도 그들의 의뢰인에게 벌벌 기며 용서를 빌 것이다.

여태까지 늘 그래왔듯이.

이보다 더 좋은 직업이 어디 있겠는가?

용병단원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 전까지만.

“너희.”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숨도 쉴 수가 없었다.

‘대체, 대체 이게 뭐지?’

사람의 목소리일 뿐이었는데.

그들은 여러 가지 숱한 일들을 겪어왔던 용병단이었는데도, 그저 목소리에 담긴 힘만으로도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어디서, 대체 어디서 이런 괴물이 튀어나온 거지?

식은땀이 나고 이가 딱딱 소리를 냈다. 바로 그들의 뒤에 누군가가 다가와 있었다. 기척도 없이, 귀신처럼.

“너희가 감히 누굴 괴롭혔는지 아나?”

으르렁거리는 짐승이 바로 뒤에서 목덜미를 물어뜯으면 이런 기분일까?

그들은 고갯짓조차 할 수 없었다.

자신들은 그냥 의뢰를 받은 거였다고, 상해를 입힌 것도 아니고 조금 괴롭혔을 뿐이라고.

그런 억울한 말들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그 낯선 자는 변명을 허락하지 않았다.

“짐승보다 못한 것들에게, 쓸데없는 팔다리가 붙어 있군.”

“!”

그 말을 끝으로, 그들은 세상이 조각나는 것 같은 고통을 겪었다.

자신들의 팔과 다리가 허름한 나뭇가지라도 되는 듯 뚝 부러졌기 때문이다.

어두운 골목 안은 어느새 으아악 하는 비명으로 가득 찼다.

제일 겁이 많은 용병 한 놈이 벽에 붙어 덜덜 떨면서 제 차례가 오질 않길 바라고 있을 때였다.

남자가 서늘하게 말했다.

“한 놈은 되돌려 보내는 것이 좋겠지.”

그 낯선 자가 후드 안의 눈을 빛내며 하나 남은 용병에게 무언가를 집어 던졌다.

살벌한 소리를 내며 던져진 그것은 그 용병의 뺨을 내리쳤다. 뻑 소리가 났다.

그는 기절하고 싶었지만, 이상한 그 힘이 기절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으, 으, 살려, 살려주…….”

“그것을 가지고 가라.”

“누, 누구에게, 전, 전달을.”

“너희를 부린 자에게 가져가.”

온기 하나 없는 목소리가 명령했고, 용병은 그것을 따랐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던진 것을 주웠고,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그들은 한때 전쟁터를 떠돌았고, 누군가의 소문을 특히 많이 주워 들었었다.

이를테면, 미엘르 제국에 있는 미치광이 귀신 공작과 같은.

그 문장은 일종의 상징처럼 여겨져 상관없는 왕국의 병사들조차 몸에 지니고 다닐 정도였다.

그러니까 딱 이렇게 생긴.

선명하게 빛나는 그 눈이 보라색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용병은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러면 다시는 허튼수작을 부리지 못하겠지. 감히 그녀를 건드리는 일 따위는 앞으로, 절대, 없어야 할 것이다.”

기이하게 비틀린 입술은, 미소랄 것을 짓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목숨이 아깝지 않다면 말이야.”

지독하게 무서웠다.

*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나름 심혈을 기울인 계획이었다.

유명하고 신뢰 높은 용병단을 고용하고, 그들을 고용한 것이 나라는 비밀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특별히 신경써달라는 부탁을 했다.

의뢰 내용이 자질구레하면서도 까다로웠기 때문에 단기간에 쉽게 하려는 자가 나타나지 않아, 예전에 이 마을에 오기까지 도움 받았던 용병대에 연락을 해야 하나 고민까지 했을 정도였다.

겨우 반나절 만에 용병단을 찾고, 의뢰를 넣고, 그들이 날아오는 동안 내일도 똑같이 괴롭힐 인간들을 각오했는데.

그랬었는데 말이다.

“어머, 오늘은 깨끗하네? 그놈들이 무슨 일이래?”

“응, 그러니까.”

엘라의 말대로였다.

꽃집은 아무 이상도 없이 깨끗했다.

영주님을 밤낮없이 괴롭히며 서신을 보냈다는 그 후작 놈도 조용했다.

갑자기 조용했다고.

‘이상해.’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어머, 그럼 의뢰금은 어떻게 되는 거야, 힐?”

“이미 지불한 것은 어쩔 수 없을 거야.”

“진짜?”

엘라는 아깝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아직 끝난 게 아닐 수도 있잖아, 엘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반쯤 선금으로 지불한 의뢰금이야 어쩔 수가 없다.

“우연일지도 모르고, 또 수작을 부릴지도 몰라. 그러니까 사람들을 벌써 보낼 순 없어.”

“그건 그렇지.”

“하지만, 갑자기 이러는 게 더 불안한데…….”

순간, 그 생각이 떠오른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내가 파트너 초대장을 보냈을 때 홀연히 자취를 감추듯, 거절해왔던 영식들.

어디가 그리도 다치고, 아픈지 변명들도 무척 다양했었는데.

‘나도 참, 그게 지금 일과 무슨 상관이라고.’

헛웃음을 짓는데, 엘라가 팔짱을 끼어오며 웃음을 터뜨렸다.

깜짝 놀라 바라보니 팔짱을 낀 팔을 경쾌하게 흔들었다.

“어쨌든 오늘은 조용하니까 좋네, 뭐!”

“응?”

“그렇잖아. 그 못된 놈 성질대로 살다가 어디서 호된 꼴을 당한 걸지도 모르지? 이래서 사람이 말이야, 착하게 살아야 돼. 나처럼 말이지.”

엘라의 발랄한 말에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오늘은 영업 쉬자, 힐. 고객들한테도 일정 밀린다는 거 다 설명했다면서.”

“응, 그건 그렇지만…….”

“하루 더 본다고 해서 자라고 있는 꽃들이 갑자기 훅 자라지는 않을 거 아니야. 자, 가자, 가자. 놀러 가자.”

아니, 엘라의 말은 틀렸다.

하루 신경 써서 이능을 퍼부으면 금방 쑥 자라날 것이다.

그럴 수가 없어서 문제였지만.

“응, 알았어.”

“좋았어!”

나는 엘라의 청을 거절할 수가 없어 꽃집 문을 닫고 밖으로 나섰다.

날씨가 무척 좋았다. 깔깔 웃는 엘라의 목소리를 듣는데 내 기분까지 환해지는 것 같았다.

다 괜찮을 것 같은 느낌이랄까.

“어머, 저건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 사탕이잖아. 저 아저씨 매일 오는 거 아닌데? 힐, 잠깐만 기다려. 내가 과일 사탕, 네 몫까지 사올게?”

“어, 엘라. 잠깐!”

난 사탕 안 먹어도 되는데!

뭐라 말리기도 전에 이미 행동력 빠른 엘라가 부리나케 달려가고 있었다.

과일 사탕 노점대 앞에는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키가 제일 큰 엘라가 당당하게 돈을 내미는 모습이 보여 웃음이 터졌다.

“아, 정말.”

어쩌면 이렇게 좋을까?

이래도 되는 것일까 싶을 정도로.

그 귀찮은 귀족의 일도 일상에서 사라지고, 아주 평온하고 조용한 날들이 다시 시작될 것만 같은 좋은 예감이 들었다.

“어?”

바로 그때였다.

“무슨 일이지?”

어수산한 사람들이 보여 고개를 갸웃하고 다가갔다.

그런데 잠시 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지는 것이 아닌가.

“피, 피해!”

“꺄아아악!”

그리고, 인파에 가려 벌어지는 상황을 채 파악하지 못했던 내가 목격한 것은.

그리고 높게 앞다리를 치켜든 말의 울음소리.

태양을 등져 길게 내 앞을 가로막은 그림자.

“힐!”

선명하게 들리는 엘라의 비명.

‘어라?’

모든 것이 느렸다.

동시에 예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는 기억이 났다.

그때는 마차였고, 그대로 치일 뻔했었지.

참 느긋하게도 목숨의 위협 앞에서 나는 그런 생각 따위나 했다. 그때도 기적처럼 누군가 나타나 날 구해주었었다는, 그런 생각.

그러니까…….

지금처럼.

“꺄아아아악!”

찢어지는 엘라의 비명과 함께 시야가 반쯤 휙 돌았다.

“…….”

“…….”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내가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다시피 한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귀가 상대의 단단한 가슴팍에 짓눌려 있었다.

쿵, 쿵, 쿵.

그래서였다.

미친 듯이 뛰는 그 심장 소리가 죽다 살아난 내 것인지, 아니면 날 구해준 사람의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아무 데도 다치지 않고 살았다는 것을, 그것이 누군가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구해주어서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나를 혼란케 하는 것이 따로 있었다.

‘이…… 향기.’

심장이 쿵, 하고 멈추었다.

착각인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코끝을 파고드는 아주 익숙한 향기. 그리고 따뜻하고 넓은, 누군가의 체온.

‘설마.’

가브리엘?

꼼짝도 못하고 굳어 있는데, 나를 구했던 이의 기척이 멀어졌다.

손쉽게 물러나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 걸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황급히 고개를 돌려 바라봤는데, 훌쩍 커다란 누군가의 뒷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머리카락 하나, 눈 하나 볼 수가 없었다. 그것도 곧 몰려든 인파에 밀려 보이지 않았다.

눈이 흔들렸다.

설마, 정말, 정말 가브리엘?

아니,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

그가 왜 여기에 있겠어.

왜, 여기에, 이 순간 날 구해줬겠어. 그렇잖아.

“힐, 힐! 어머, 세상에, 어떡해. 너, 너 다친 곳은!”

양 손에 야무지게 쥐었던 사탕조차 던져버린 엘라가 혼비백산해서 내게 달려왔다.

그리고 어깨를 잡고 이리저리 살피며 내가 다친 곳이 없는지 보았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얼이 빠진 채 말을 못했다.

묻고 싶었다.

엘라, 봤니?

날 구해준 사람…….

너 봤어?

“방금, 대체 뭐야. 누가 구해준거야? 움직임이 얼마나 빠른지, 어머, 얘, 힐!”

순간 현기증이 났다. 그간 안면을 익혔던 마을 사람들이 내게 다가와 한마디씩 말을 건넸다.

말이 벌에 쏘여서 잠시 흥분했던 모양인데, 그래서 말주인이 지금 미친 듯이 사과를 하고 있다고.

정말 큰일 날 뻔했다고.

구해준 사람이 있었는데, 사과 인사도 안 듣고 가버렸다고.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쩌면 이때 예감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며, 애써 부인하더라도 그 뒷모습이 너무나 익숙했었다는 사실을.

*

그렇게 다음날.

딸랑, 하고 문이 흔들렸다.

그리고 들어온 이와 눈이 마주쳤다.

“…….”

“…….”

아름답고, 내 가슴을 찢어지게 했던 그 선명한 보라색 눈동자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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