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나만 보게 할 겁니다 (2)
내 비참한 짝사랑, 내 죄책감, 내 그리움이었던 사람.
가브리엘, 바로 그였다.
“…….”
“……힐.”
몇 갈래로 갈라진 목소리.
익숙하고도 저릿한 그윽한 음성.
후드를 천천히 벗는 그 잘생긴 얼굴을 보자, 순간 온갖 생각이 떠돌았다.
“……가브리엘.”
“하. 힐데아, 당신.”
청혼하는 그를 보며 뒤돌아설 때의 감정, 가족들을 떨구어놓고 홀로 떠날 때의 느낌.
‘아.’
어쩌면 나는 그가 이 마을에 도착했었다는 것을 눈치 챘던 것일 수도 있었겠다.
아마 두 달 전이었다면 보자마자 눈물을 쏟아냈겠지. 도망쳤겠지.
여전히 심장은 찌르르 울렸으나, 선명하게 치고 올라오는 감정은 그때와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그럭저럭, 저 눈을 바라보며 심호흡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먼저 입을 연 것은 나였다.
“……잘 지내셨어요?”
차마 볼 용기가 없어 도망쳤지만 마주한 이상 어쩔 수 없다.
그는 내 여동생의 남편일 테니, 내게도 가족이었다.
하지만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저 남자를 두 눈 멀쩡히 뜨고 제부라고 부를 자신은 없어서…….
그런데.
“내가 잘 지냈을 것 같습니까?”
응?
어디서 짐승 우는 소리가 나지.
나는 깜짝 놀랐다.
‘뭐, 뭐야?’
나는 성큼성큼 다가온 남자의 박력에 저도 모르게 들고 있던 나무 쟁반을 놓치고 말았다.
“가, 가브…….”
땡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진 것이 핑그르르 돌다가 멈췄다.
눈을 끔뻑거리며 그것을 바라보다가 두 눈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남자를 올려보았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잘 지냈냐고? 하, 당신이 이렇게 잔인한 사람이었습니까?”
나보다 머리 하나는 훨씬 큰 남자가 내게 바짝 붙어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저기요?’
제국을 떠난 지 그리 오래 되지도 않았는데 사람이 왜 이렇게 변한 것 같지.
착각인가?
갑자기 그가 말했다.
“내가, 내가 그렇게 싫었습니까? 다른 방식도 많았을 텐데. 왜. 도대체 왜…….”
아까와는 퍽 다른 목소리여서, 나는 눈만 깜박였다.
방금 처연하게 떨리는 음성이 누구의 것인지 모르겠다.
아, 나 낮술 마셨었나?
이거 꿈이야?
환상인 거야?
“네?”
하지만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분명 그, 가브리엘이 맞았다.
저렇게 태워버릴 것 같은 눈을 하고 있는 낯선, 가브리엘.
“내 청혼을 그렇게 짓밟고 기껏 도망간 곳이 여기입니까.”
뭐라고?
하마터면 남자의 뽀얀 뺨을 꼬집을 뻔했다.
환상 주제에 뭘 이렇게 생생하게 말하고 그래.
다 내려놓은 짝사랑에 새삼 심장 벌렁거리게.
희미하게 웃어버렸는데 그게 남자의 자존심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어떻게 웃을 수 있습니까.”
선명했던 보라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리고 핏발 선 흰자위가 점점 촉촉…….
‘뭐? 촉촉?’
핏발 선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리 봐도 눈물 같았다. 나는 기겁했다.
설마 울어? 왜?
아내의 언니가 사라진 게 그렇게 충격이었던가?
그리고 청혼을 짓밟고 도망갔다니, 그게 대체 뭔 소리야.
내 동생이 도망갔어?
“잠깐만요. 청혼이요? 지금 무슨 소리를…….”
“또 도망가도 소용없습니다. 당신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가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이 낯설었다.
어느새 나는 뒷걸음질도 가로막힌 차가운 벽에 등이 닿은 상태였다.
“윽!”
그가 내게 더 바짝 다가왔다.
이제는 숨결까지 닿을 것 같은 거리에 절로 숨이 가빠졌다.
“나만 보게 할 겁니다.”
지금 뭐라고요?
“나만 보게 할 거야.”
가브리엘?
“내가 당신 없인 숨 쉴 수 없듯 그렇게 만들 거야.”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냥 한 가지는 알겠다.
얘가 미쳤구나.
돌았구나?
“그거……. 지금 저한테 하는 소리세요?”
나는 냉정한 이성을 찾고자 했다.
미친놈이 눈앞에 있다고 같이 돌아버릴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미친놈과 얘기가 통할 리가 없었다.
“그날. 당신은 답하지 않았습니다.”
이쯤 되니 꿈은 아닌 것 같았다.
얼떨떨했지만,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술에 취해 여동생과 닮은 날 보며 뭔가 심각한 착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로제랑 싸운 모양이지.’
씁쓸한 미소가 감돌았다.
겨우 벗어났나 했더니 이렇게 엮이게 된다니.
‘정말 지긋지긋한 악연이야.’
이유는 모르겠지만 여동생에게 이혼이라도 당했나 보다.
흔한 후회남의 클리셰 아닌가.
여주와 남주는 서로에 대한 오해를 품은 채 여주는 도망가고, 남주는 그 뒤를 눈이 벌게져서 찾고. 급기야 이성을 잃고 내가 동생으로 보이나 보지.
그렇지 않고서야 날 혐오하던 남주가 나한테…….
“결혼합시다.”
이렇게 찾아와 청혼할 리가 없잖아?
‘이게 무슨 봉변이야. 저 청혼 소리를 또 들어야 해?’
난 눈을 질끈 감으며 부글부글 치솟아 오르는 화를 삼켰다.
그래, 악연이다. 악연이야.
‘난 왜 하필 여주인공 언니로 태어나서.’
그렇다고 이 봉변 같은 일을 계속 당하고 있을 순 없었다.
잠깐 손을 머뭇거렸지만, 단호하게 그의 가슴팍에 손을 올리고 힘을 주었다.
“후, 일단 진정해요. 지금 가브리엘, 당신 제정신이 아닌 것 같…….”
“아니.”
“네?”
무례한 이는 아니었으니 당연히 뒤로 가리라 생각했는데…….
“난 제정신입니다.”
아닌 것 같은데. 눈이 풀렸는데?
“말해주십시오. 더는 이렇게 도망칠 순 없습니다.”
“가브리엘, 잠깐만요. 거리가 너무 가깝잖아요. 좀 뒤로…….”
“정말 내 청혼을 거절했던 겁니까? 나 혼자 착각한 겁니까?”
“아까부터 대체 무슨 말을, 읏!”
이제 알겠다.
그의 옷깃을 잡고 미끄러지듯 잡아당겼을 때, 벌어진 셔츠 때문일까.
비를 맞은 것처럼 독한 술 냄새가 훅 하고 끼쳤다.
뭐야. 설마 지금 진짜 술주정을 부리고 있는 거야?
너무 어이가 없어 화가 목구멍까지 확 치솟았다.
“적당히 좀 해요! 난, 난 힐데아예요! 로제리엘이 아니라!”
당신이 그렇게 사랑하는 로제리엘이 아니란 말이야!
그렇게 도망쳤는데, 이런 식으로 내 평화로운 일상을 깨야겠어?
당신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해?
“압니다.”
그런데, 가브리엘의 푸른 눈은 정확히 내 눈을, 내 머리카락을, 내 입술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잘 압니다.”
정확히 나를.
심장이 불안하게 술렁거렸다.
입술이 덜덜 떨렸다. 그가 부드럽게 잡은 내 손목 위로 뜨거운 열기가 몰아쳤다.
손목을 잡는 힘은 강하지 않았는데도 이상하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눈은 무엇보다 솔직합니다.”
왜. 왜 가브리엘이 점점 내게 다가오는 것 같지?
“이 눈은 날 보고 있는데.”
그의 손가락이 내 눈가를 쓸었다.
“이렇게.”
사포로 긁은 듯 거친 손가락 끝의 감촉에 깜짝 놀랐다.
꼭 손가락으로 언 땅을 해친 것 같은 촉감이었다.
하지만 그의 이어진 말에 정신이 날아갔다.
“이렇게 날 갖고 싶다는 눈으로 보는데.”
뭐?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의 입술만 멍하니 바라봤다.
가브리엘의 낮은 목소리고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서 확인이 필요했지. 역시 착각이 아니었어. 당신은 이렇게 날 봐. 난 죽어도 이걸 확인해야 했습니다.”
쿵, 하고 완벽히 심장이 추락했다.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지금, 지금 이 남자가 뭐라고 했지? 누가 누굴 어떻게 본다고?
내가? 내가 당신을?
“그런 주제에.”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내 목을 옥죄는 기분이었다.
“당신은 왜.”
아니야. 습관적인 거절이 입 밖으로 내뱉어지려는 것을 가브리엘이 가로챘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도록, 손목을 강하게 잡았다.
아니, 부드럽고, 뜨겁게.
“왜 다른 이름을 말하는 겁니까? 압니다. 당신이 누구인지.”
“나는…….”
그가 낮고 빠르게 속삭였다.
“너무 잘 알아. 진저리나도록. 몇 번이고 잊지 못하게, 잊지도 못하고 꿈에 나왔으면서. 당신의 얼굴을 새기는 것처럼 내 심장에 파고들었으면서. 날 바보로 아는 겁니까…….”
나도 모르게 가브리엘의 얼굴을, 그의 행색을 살폈다. 무언가 이상했다. 지나치게, 지나치게 이상해.
갑자기 술을 마시고 등장한 그의 모습도 그렇고 왜 저렇게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저 말들은 대체 다 무엇이고!
“대체 왜 그런 잔인한 거절을 한…….”
바로 그때였다.
가물가물 이어지는 것 같았던 남자의 목소리가 조용해졌다.
‘어?’
깜짝 놀라 바라보는데, 휘청하고 커다란 몸이 흔들렸다.
엇, 하고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는데 정말 가브리엘의 몸이 기울어지고 있었다!
“가, 가브리엘!”
턱, 하고 쓰러지는 남자를 받는 것은 좋았는데 그는 나보다도 덩치가 더 크고 무거웠다.
근육질로 단단히 뭉친 사내의 몸이 의식을 잃고 쓰러졌는데, 그걸 내가 쉽사리 받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몸이 같이 무너졌다. 그의 푹 숙인 고개가 어깨에 얹어지고, 뜨거운 숨결이 피부를 달구었다.
“정신 좀, 차려요!”
윽! 하는 순간 그나마 벽에 등에 닿아 그를 지탱하듯 주르륵 미끄러지려고 했을 때였다.
딸랑-
경쾌한 종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발랄한 목소리.
“힐, 우리 아이스크림 먹으러-!”
“…….”
“…….”
인사하는 모습 그대로 얼이 빠진 얼굴은 엘라였다.
그녀는 환히 웃고 있던 미소를 점점 정색하더니, 얼굴을 발긋하게 물들이며 수줍게 웃었다.
“어머나, 힐. 방해해서 미안. 그, 내가 삼십 분 뒤에 오면 될까?”
“에, 엘라?”
“……아. 설마 몇 시간 뒤……?”
대체 무슨 소리야!
“그런 거 아니니까 빨리 나 좀 도와줘! 윽!”
“어머, 힐!”
엘라의 헛소리에 황급히 소리를 지는 나는 결국 내 품에 기댄 남자와 함께 무너지고 말았다.
*
“정말 아무도 해결책을 찾지 못한 것인가? 단서라도 알아내지 못했는가?”
“소, 송구합니다, 폐하.”
피폐해진 귀족들 내부.
차마 제대로 숨 쉬는 자도 없었다.
그때였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리더니, 파랗게 질려있던 누군가가 귀족 회의장을 가로질렀다.
“폐하, 폐하, 찾았습니다!”
그는 평상시에 근엄하기 그지없는 태도를 보이는 자였는데, 그때만큼은 허둥지둥한 것이 볼품없는 꼬락서니였다.
하지만 누구도 비웃지 못했다.
그가 외친 말 때문이었다.
“축언을 빼앗기고도 살아남은 자를 찾았습니다,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