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쫓아온 운명 (1)
축언을 빼앗기고도 살아남은 자.
황제는 체면도 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그건 다른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그대, 뭐라 하였지?”
달려온 귀족은 다리에 힘이 풀리는지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나 그 무례한 태도에 대해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다.
그가 절박하게 외쳤다.
“찾았, 찾았습니다. 축언을 빼앗겼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자를 발견했습니다!”
“이유는, 그자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원인은 발견했나?”
축언과 이능은 그들의 근간이었다. 가장 달콤한 힘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흔들리고 사라진다면?
그들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주로 축언과 이능을 갖고 있지 않은 황후파의 득세가 예견된 것이었다.
그럼 결국 모두 끝장이다.
그때, 귀족이 품에 넣어왔던 것을 황급히 빼 들었다.
“예! 딱 하나, 딱 하나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모두의 시선이 꽂힌 곳, 귀족의 손에 들린 것은…….
“그건 잎사귀 아닌가?”
평범해 보이는 잎사귀였다.
저게 어쨌다고.
“축언과 이능을 빼앗기고 시름시름 앓다, 이것을 달여 먹은 직후 갑자기 기운이 솟았다고 했습니다. 이건 어떤 치유사에게 산 약초이고요!”
귀족들의 얼굴 위로 환호가 스쳐 지나갔다.
“오! 잘되었습니다, 폐하. 그러면 그 치유사만 찾으면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황제의 얼굴은 아직 침착했다. 좋아하긴 일렀다.
“그래서 되살아난 자는 축언과 이능을 되찾았나? 아니면 목숨만 되살린 것인가.”
“그, 후, 후자입니다…….”
모두의 표정이 다시 어두컴컴해졌다. 목숨만 살아난다고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황제의 말이 이어졌다.
“그것은 어디서 찾았지? 그저 평범한 식물일 리 없을 터.”
“폐하, 이것은…….”
귀족이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은 나타나지 않고 있는 암시장의 어떤 치료사의 식물이라고 합니다!”
“치료사?”
“예. 그 치료사에 대해 알려진 것은 이름뿐인데 원래도 유명했다고 합니다. 고작 화분에 심어진 약초 하나일 뿐이었는데, 그 식물을 달여 먹으면 온갖 병증이 낫는 것으로 말입니다.”
황제의 입술이 불만으로 꿈틀거렸다. 그런 것이 있었다면 황궁으로 가장 먼저 진상되었겠지.
“그것은 사기꾼 아닌가. 그런 약이 세상에 어디에 있다고?”
“그, 그러나 꽤 유명한 자라…….”
“하?”
동시에 지켜보고 있던 다른 귀족들 사이로 탄성이 스쳐 지나갔다. 꼭 그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처럼.
황제의 눈썹이 들썩였다.
“그래서 그자의 이름은?”
“그게…… 힐이라고 합니다. 그 화분들은 힐의 컬렉션이라고 불리고요.”
힐이라고?
황제의 뇌리로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으나,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힐데아의 애칭이 힐이긴 했다.
하지만 공작 영애가 식물이나 키워, 그걸 암시장에 내놓을 리도 없고 힐이라는 이름이 또 얼마나 흔한가.
어쨌든 중요한 건 하나.
“모두 집중하라.”
“예, 폐하.”
“그대들. 지금 당장, 그 힐이라는 자를 수소문해서 데리고 올 것. 그 약초가 단순히 효과가 있는 것이든, 혹은 관련이 있는 것이든 직접 보아야겠다.”
후자의 말은 무슨 뜻이란 말인가. 그때 황제가 스산하게 웃었다.
“본래 독약이란 해독제와 같이하는 법. 그 힐이라는 자가 이 사태와 관련이 없는지 짐이 직접 확인해야겠으니.”
황제의 입술이 비틀렸다.
“꼭 살아서 끌고 오라.”
*
으, 갑자기 오싹한 기분이 들어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추운가?
나는 열려 있는 창문을 닫으며 다시 소파 옆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심란한 눈빛을 감추지 못한 채, 기절해버린 남자를 내려 보았다.
자, 이제 생각이라는 것을 하자.
나는 힐데아 폰 힐링턴.
그리고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가브리엘.’
진짜, 가브리엘이다.
‘어쩌면 좋아.’
성인 남자를 옮기는 과정은 쉽지 않았지만, 기겁하며 달려온 엘라와 함께 그를 어찌 이 소파에 눕히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엘라는 상황을 알아보겠다며 달려 나간 직후였고, 그리고 현재 나는 어떤 일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아. 그럼 가족들도, 내가 여기 있는 것을 알게 된 걸까.”
믿기지 않지만 진짜 가브리엘이다. 제대로 자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확연하게 떠올랐다.
내 짧은 도주가 끝났다는 것도.
이대로 그가 눈을 뜨면 같이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도.
아버지가 보내서 온 걸까. 아니면 나를 찾는 로제가? 그가 단독행동했을 리는 없으니까.
나는 내 손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떻게…….”
아까 전, 그가 마구 쏟아냈던 말들이 흐릿하게 떠올랐기 때문에.
당최 이해할 수 없는 말들만 늘어놓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심장을 덜컹거리게 한 것은.
“내가 당신을 갖고 싶은 눈으로 본다고?”
바로 그것이었다.
심장이 울렁거려 참을 수가 없다.
나는 손에 얼굴을 묻었다. 두려움이 왈칵 치밀어 어떤 표정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제일 들키고 싶지 않았던 사람에게 이미 내 마음은 들킨 상태였다고? 그럼 내 도주는?
아니면 가브리엘이 술에 취해 헛소리만 마구 내뱉었던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설마 화분? 남겨놓은 식물의 꽃말을 알고 있어서?’
하지만 그것도 우습다. 화분 하나 때문에 이 먼 거리를 달려와 이곳에 있다고?
온갖 생각이 들끓었다.
“이봐요, 당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제대로 설명은 해주고 쓰러졌어야 할 거 아니야…….”
소파에 올린 뒤 살핀 가브리엘의 행색은 말이 아니었다.
누가 보면 며칠 밤낮을 잠도 자지 않고 미친 듯이 달려와 이곳에 선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지독하게 피곤해 보였다.
그리고 지독한 술 냄새.
그 모든 것을 살피며 조마조마하고 있는 내 심장.
“정말 뜻대로 되지를 않네…….”
그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며 한숨을 내쉬었다.
우스웠다. 잊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을 내 심장이 비웃는 기분이었다.
나는 왜 여전히 그를 보며 심장 박동을 격렬히 하는가.
나는 왜 저 눈동자를 보며 설레어하고 있는가.
정말 빌어먹을 사랑이었다.
“남편이야?”
바로 그때였다.
옆에서 불쑥 들린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시선을 돌렸는데, 그 뒤에 나는 바위처럼 굳고 말았다.
사람들이 있었다.
먹이 앞에 쪼르륵 앉아 있는 고양이들처럼 소파 주변에 옹기종기 앉아 있는 어른들이.
대체 언제부터?
“힐, 남편 없다고 하지 않았니?”
“에이, 힐은 남편이 있을 나이보다는 남자친구가 있을 나이지.”
“어머, 그렇겠구나. 그럼 고향에 있던 남자친구?”
“아이고 꼬락서니를 봐라. 술 냄새가 풀풀 풍기네. 힐, 설마 남자친구와 싸워서 이곳으로 온 거였느냐?”
“허이고, 누구네 집 아들인지 겁나게 잘생겼구먼?”
대체 언제 문을 열고 이 많은 사람이 꽃집에 들어왔던 것인지.
나는 바짝 굳은 채 소파 주변을 빙 둘러싸고 있는 마을 사람들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어설프게 웃었다.
“어, 언제들 오셨어요?”
나는 얼른 일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몸이 당겨져서 다시 주저앉아야 했다.
‘?’
깜짝 놀라 아래를 내려봤는데, 분명 잠들어 있는 가브리엘의 손이 내 옷자락을 단단히 쥐고 있는 게 아닌가.
어이가 없어 손을 풀어보려고 했는데도 단단한 것이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그때 촌장님이 웃으면서 말했다.
“아이고, 우리 마눌님이 집 나가겠다고 했을 때 발목 잡고 매달리던 젊었을 적 내 모습과 너무 똑같, 윽!”
“으이그, 좀 닥쳐. 이 인간아!”
지켜보던 마을 사람들이 와르륵 웃음을 터뜨렸고 내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왜 자꾸 저런 말을 하는지.
그런 게 아니라고.
가브리엘과 내가 그런 사이일 리가 없지 않냐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런 것을 말해봐야 뭐하겠는가.
그때였다.
딸랑 소리를 내며 루아의 손을 잡고 엘라가 들어왔고, 그 뒤를 민머리의 남성이 따라 들어왔다.
“오! 여기 있었구만!”
꽃집 안을 훑던 민머리의 남성이 탄성을 지른 것도 그 순간이었다.
펍의 주인 헤리스씨였다.
“헤리스 씨, 무슨 말씀이세요?”
“아아, 힐. 그 겁나게 잘생긴 청년 말이다. 어디 갔다 했더니만 여기에 있었네?”
“네?”
나는 놀라 눈을 깜빡였다.
“쯧쯧, 허우대 멀쩡해서 며칠째 대낮부터 얼마나 술을 퍼마시던지, 눈이 안 갈 수가 있어야지. 첨 보는 외부인이라 의아했더니만…… 힐, 네 손님이었나?”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럼 대체 가브리엘은 여기에 언제 도착한 것이란 말인가.
아니, 내가 있는 위치를 알았다면 왜 바로 오지 않았지?
그리고 술은. 술은 도대체 왜?
마음이 퍽 심란했다.
“저기, 심각한 와중에 미안한데.”
그때 이쪽을 살피던 엘라가 그렇게 말하며 루아의 귀를 손으로 가렸다.
뭐야. 뭔데 그런 불길한 얼굴을 해.
“힐, 진짜 그 남자랑 사실혼 관계 아니야? 그럼 우리 영주님 아직 승산 있는 거니?”
아, 정말.
“엘라, 지금 너까지 날 놀려야겠니…….”
“아니야.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라고. 우리 루아가 엉엉 우느냐 아니느냐가 달린 문제인데.”
이제는 좀 열 받으려 했다.
아니라고. 아니라고!
남편도 남친도 아니고, 내 여동생의 약혼자라고!
“그게 아니라, 이 사람은.”
꽃집 안의 모두가 내 입술에 집중하는 것이 보였다.
“이 사람과 저는.”
말문이 턱 막혔다.
“그냥…….”
여동생의 약혼자라고 솔직히 말하면, 기분이 퍽 이상해질 것 같았다.
그래서 머뭇거리는데 마을 사람들은 다른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게슴츠레한 눈을 한 촌장님이 불쑥 그렇게 물었으니까.
“설마 빚쟁이여?”
“네?”
나는 너무 놀라 바로 변명을 못했다. 가브리엘이, 빚쟁이라고? 저 사람이? 저 전쟁영웅이?
“빚쟁이구먼! 그래서 얼굴이 그리 창백했던 것이고!”
“네?”
“어머, 그런 것이었니, 힐? 그것도 모르고 우리가 주책을 부렸구나!”
“네?”
“이런, 잘생긴 놈이라고 생각했더니만 실속 없이 따라온 빚쟁이 새끼였느냐?”
마을 사람들이 당장이라도 팔을 걷어붙이고, 잠든 가브리엘을 후려 패기라도 할 기세였기 때문에 나는 당황해서 손을 휘저었다.
아니, 아니,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대화가 왜 이렇게 휙휙 바뀌는 거야!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 사람이 약혼한 사람이-”
내 동생이야!
바로 그때 다시 한번 딸랑, 하고 종이 경쾌하게 울렸고, 나는 말을 끊어야 했다.
마지막 방문객과 눈이 마주쳤는데, 그는 들어오자마자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와르르 떨어뜨렸다.
챙강 챙강, 땡그랑!
“……약혼, 이요?”
그는 바로 영주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