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쫓아온 운명 (2)
“하아, 드디어 조용해졌네.”
영주님이 등장한 이후, 한동안 혼란의 시간이었다.
꾹 눌러왔던 것이 터진 것처럼 마을 사람들이 왁 하고 떠들기 시작했고, 나는 그것으로 인해 가브리엘이 당장 깰까 조마조마했다.
그렇게 한참 뒤 모든 사람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마지막으로 영주님이 꽃집을 나가기 전에 날 보며 뭐라 했었다.
‘저기, 힐.’
‘네? 왜 그러세요, 영주님.’
‘아마, 당분간 그 후작이 괴롭히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 손님이 계시니 나중에 자세히 말씀드릴게요.’
어쩐지 평소보다 훨씬 더 조용하고 시무룩해진 영주님이 그렇게만 말하며 루아와 함께 나가고, 드디어 나만 남았다.
아니지, 쿨쿨 자는 가브리엘까지.
그럼 자, 이제 집에 가야…….
‘이 사람을 어쩌지?’
……하는데.
“나 혼자 가브리엘을 어떻게 옮겨. 여덟 살 때도 아니고.”
나는 낭패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아, 이런 바보. 사람들이 왔을 때 옮기는 거 도와달라고 했었어야 했는데!
*
“역시, 맞지?”
“맞아, 맞아.”
마사 부인과 촌장은 어릴 때부터 친구였기 때문에 서로 눈짓을 교환하며 말했다.
엘라가 불쑥 끼어들었다.
“뭐가 맞아요?”
“뭐, 우리 중에 힐이 귀족이라는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니.”
“그건 그렇죠.”
루다나 마을 사람들은 처음부터 알았다. 힐이라고 이름을 밝히며 등장한 은발의 여성이 분명한 귀족이라는 사실을.
아마 억양을 보아하니 제국에서 온 것 같고, 특별한 사정이 있어 몸을 숨긴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들은 저 귀엽고 깜찍한 루아를 살려준 생명의 은인을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되도록 외지인들에게 힐에 관한 이야기가 새어 나가지 않게 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힐의 식물들이 너무 뛰어났기 때문에.
단순히 두통을 없애는 정도가 아니라는 건 순진한 마을 사람들도 알고 있었다.
그게 힘없는 평민 손에 들려 있다고 생각되면, 왕국의 귀족들이 어찌 나올지도.
“이게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럼 힐이 다시 자신이 있던 고향으로 돌아가는 걸까요? 저 남자,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던데.”
엘라는 루아의 손을 잡고 한층 더 시무룩해지는 영주님의 얼굴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힐은 무척 착했지만, 어째서인지 자존감이 심하게 낮았다. 누가 봐도 영주님은 힐에게 푹 빠져 있는데도 힐이 그걸 부정하는 눈은 퍽 진지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고백해버리라니까.’
그걸 못하고 저렇게 우물쭈물하더니, 결국에는 근사한 라이벌이 나타나지 않았는가.
저렇게 예쁘고, 우아하고, 똑똑한 데다 특별한 능력까지 있는 힐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게 더 이상하지.
“아무튼, 힐의 표정을 주의해보자고.”
마을 사람들은 의지를 다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갑자기 등장한 남자가 아무리 대단한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설령 제국의 황제라도, 힐이 싫어하는 상대라면 어떻게든 방해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싫어하는 건 아닌 듯했지?’
엘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
그렇게 다음 날.
나는 가브리엘을 바라보며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가 어느 순간 까무룩 눈이 감겼다.
‘헉!’
그리고 잠시 뒤, 나는 눈을 번쩍 뜨며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났다.
‘뭐, 뭐야. 어떻게 된…….’
반짝이는 햇살과 차가운 공기가 어느새 아침이 된 것 같았다.
나 얼마나 잔 거야?
“아.”
고개를 돌리자마자 보이는 풍경에 나는 바짝 굳었다.
“깼습니까.”
“가, 브리엘?”
“네, 접니다.”
질리게 잘생긴 얼굴, 아니, 정확히는 소파에 누워 있는 날 응시하는 가브리엘의 모습이 보였으니까.
푸석한 내 몰골과는 달리 가브리엘은 제법 여유가 생긴 모습이다.
제법 말끔한 모습이 어디 가서 씻고 오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래서 황당해졌다.
우리 꽃집엔 손밖에 씻을 곳이 없는데 저 여유는 뭐지.
이 꽃집은 내 꽃집인데 왜 당신이 주인처럼 그러고 있어요……?
진짜 이거 꿈 아니야?
“홍차를 우렸습니다.”
네, 알아요. 이렇게 향기가 진한데 그걸 모르겠어요.
“아직도 아침엔 쌀쌀합니다. 따듯한 차라도 드시지요.”
그가 내미는 잔을 얼결에 받아 놓고도 어안이 벙벙했다.
우리 이렇게 여유롭게 대화할 때가 아니지 않나……?
찻잎은 또 어떻게 찾은 거야?
“힐데아. 놀랐습니까.”
“어, 네?”
“어제는 실례했습니다. 후우, 순간 이성을 잃어버려서.”
나는 무엇이 이상한지 깨달았다.
두 달 전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그는 더는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떨떠름하다는 듯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지도 않았고, 턱관절이 굳지도 않았다.
‘어째서?’
그는 그저 차분했다.
오히려 초조해지는 것은 내 쪽이었다.
왜. 뭐가 달라진 거지?
묻고 싶었다.
어제 그 술주정은 뭐였어요. 했던 말들은 다 뭐야. 설마 내 마음을 알고, 그런 식으로 속여서 일단 달래려는 건 아니겠죠?
그러면서도 묻지 못했다.
만약 후자라면 정말 마음이 와르르 무너질 것 같았으니.
“조용한 마을이더군요. 조금 거추장스러운 것들이 있긴 했지만, 그 외에는.”
“가브리엘. 말 돌리지 말, 아요.”
주먹을 꽉 쥐며 아까부터 목구멍까지 치솟으려는 것을 겨우 물었다.
“우리 가족들은…….”
가족들이 날 데려오라고 했죠?
그렇게 물으려 했다.
하지만 내 말은 가브리엘이 한 말에 싹둑 잘려나갔다.
“당신의 옆집을 샀습니다.”
네?
“수리비에 돈이 꽤 들었습니다. 그래서 물리지도 못합니다.”
네?
모든 혼란의 생각들이 싹 사라지는 대답이었다.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봤는데, 잔에 입술을 축이는 남자가 보였다.
그 모습이 그림 같았지만, 지금 만큼은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그러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잠깐만요. 지금 뭘 샀다고요?”
“당신의 옆집. 우리는 이제부터 이웃입니다. 매일 질리도록 얼굴을 볼 예정이고.”
“……그게 대체 무슨.”
나는 내 집 옆에 있는 건물을 떠올렸다.
그래, 그것이 집이라고 할 수 있기는 하지. 다 쓰러져가는 것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그걸 저 남자가 왜 사? 그보다 언제 산 거야?’
흔들리는 내 눈을 본 것인지, 가브리엘이 잔을 내려놓으며 여유롭게 다리를 꼬았다.
“싫으셔도 참아주십시오.”
“네? 하지만.”
“힐데아, 그리고 죄송하지만.”
다리가 길기도 했다. 내 속은 그 다리처럼 꼬였지만.
“쫓아내셔도 지금은 안 갈 것이니 포기하십시오. 그 집은 제 소유입니다.”
그가 너무 자연스러워 보였기 때문에 되묻는 내가 이상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난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지금은, 이요?”
“예. 가지고 돌아갈 것이 있어서.”
그 가져갈 것이 나는 아니겠지.
나는 손을 떨며 잔을 꼭 쥐었다. 따뜻했다.
하지만 짙은 불신이 숨을 옥죄었다.
가브리엘은 천천히, 조용히 말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화를 내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목소리로.
“옆에 있겠습니다.”
미친 소리였다.
로제리엘은 어쩌고!
지금 한창 신부랑 깨 볶고 있어야 할 신랑이 왜 여기에 뚝 떨어진 건데.
설마 어제 술주정이 정말…….
“옆집이든, 이 꽃집의 호위든. 당신이 제게 익숙해질 때가 올 수 있도록.”
“네?”
“일당은 받지 않겠습니다.”
저건 또 무슨 말이야.
난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갑자기 하나부터 열까지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이 마구 밀려오는 기분이었다.
등장한 가브리엘만으로도 벅찬데, 이제 떠나지도 않고 옆에 있겠다고? 거기다 옆집? 호위?
내 얼굴이 아직도 담담하고 화가 나 보여서 그러는 걸까.
그래서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걸까?
나는 아직도, 아직도 저 남자 앞에서는 숨 쉬는 것조차 떨리는데.
지금도 당장 뒤로 넘어질 것 같은데.
“……나는요, 당신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요, 가족들이 날 찾고 있겠죠. 하지만 돌아가세요. 아무리 그래도 전 지금 돌아갈 생각이 없,”
“아니.”
그가 다시 내 말을 잘랐다.
꼭 내가 가족들의 이야기를 못 하게 하려는 것처럼.
“제가 왜 이러는지, 당신은 이미 아십니다. 그리고 말했을 텐데요. 옆집을 샀다고. 그런데 왜 갑니까.”
말문이 막혔다.
입술을 달싹이다가, 긴 침묵 끝에 겨우 튀어 나간 건 다른 말이었다.
“꽃집에, 호위가 왜 필요하겠어요. 당신처럼 고급 인력이 이런 곳에서 왜 시간을 낭비해요. 날 놀리는 거라면 적당히 해요. 제발.”
그는 내가 말을 넘겼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유롭게 잔의 손잡이를 매만졌다.
“낭비? 하, 시간 낭비라고 누가 그럽니까.”
그가 또, 다시 만났을 때처럼 으르렁거렸다.
“당신에 관한 일 중 어떤 것도, 시간 낭비는 없을 겁니다.”
“그…….”
당신 대체 왜 그래요?
어디서 뒤통수라도 맞고 왔나요?
“힐데아.”
집요한 그 눈에 사로잡혀 꼼짝 못 하는 사슴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피하지 마십시오.”
정말 이상해.
“적어도 지금은 그것만.”
겉모습은 분명 내가 아는 가브리엘인데, 고작 두 달 만에 사람이 완전히 바뀐 느낌이었다.
저렇게 말하고, 저렇게 쳐다보는 사람이었던가?
“그리고 호위, 필요한 것 같던데.”
“네?”
그가 언제 집요하게 바라봤냐는 듯 눈을 감고 한숨을 쉬듯 작게 웅얼거렸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쨌든 결론은 하나입니다.”
그 목소리가 너무 작아 잘 듣지 못했지만, 가브리엘은 습관인 것처럼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나는 흔들리는 그의 머리카락 끝에 정신이 팔렸었다.
그때 가브리엘이 말했다.
“힐, 당신이 절 두려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결코. 어느 순간에도.”
어쩐지, 그가 희미하게 웃은 것 같았다. 나는 멍해졌다.
“제가 당신에게 위협이 될 리 없을뿐더러, 감히 당신의 일상을 망가뜨릴 생각은 하지 않으니.”
아닌가.
“그저 조금. 당신의 하루 중 조금만 내어주시면 됩니다.”
왜 그렇게까지 해.
나도 모르게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제 일과는…… 특별한 것이 없어요. 평범한 꽃집이고, 조용한 마을 사람들일 뿐이에요. 지루하고, 평범한 일상일 뿐인데 정말 여기에 있겠다고요?”
“네. 그것도 좋습니다. 내쫓지만 않으신다면.”
“…….”
고집이 단단했다.
당장 나를 데려가는 것도 아니고, 가족들에게 알리는 것도 아니고.
정말 저 말을 믿어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눈앞의 남자는 도통 모르는 것이 틀림없었다.
내 도주의 원인은 바로 당신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