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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101화 (101/155)

101화. 옆집에 그가 산다 (1)

아직도 당신만 보면 이렇게 심장이 아픈 것처럼 뛰니까.

마치 두 달 전에 늘상 그랬던 것처럼 얼굴을 딱딱히 굳히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이미 결정했고, 내가 뭐라 해도 이 마을에 꿋꿋하게 있겠다는 거군요. 맞나요?”

“네, 그렇습니다.”

평소라면 벌써 고개를 돌렸을 남자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처럼 포기와 체념은 빨랐다.

그래. 무려 남자주인공에, 이 세계관에서의 최강자를 내가 어떻게 쫓아낼 수 있겠는가.

“알았어요. 하지만, 가브리엘.”

“예.”

평온해 보이는 얼굴을 보며 나는 다짐하듯 말을 박아 넣었다.

“부디 내 일상을 망가뜨리지 말아요.”

그러면 다시 도망쳐 버릴지도 모르니까.

*

“크흑.”

시어스 폰 힐링턴 공작은 손수건으로 눈을 찍었다.

요즘 숨만 쉬어도 가끔 눈물이 났다.

너무 소중해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이 혹여라도 험한 곳에서 궂은일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닐지 하루에도 몇 번씩 불안해졌기 때문이다.

그는 힐데아의 서랍에서 찾아낸 그 아련한 일기장을 몇 번이나 매만졌다.

특히, 그 문장.

아빠라고 부르고 싶었다는 그 문장. 보기만 해도 눈시울이 축축해졌다.

이렇게도 못난 아비였단 말인가.

딸아이가 이런 말조차 하지 못하는, 그런 아비였다고.

그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빠, 들어가도 돼요?

로제의 목소리였다.

그는 황급히 눈을 닦으며 들어오라 했고, 로제가 고개를 쏙 내밀며 웃었다.

“아빠!”

어린 시절이 생각나 아주 잠깐 웃음이 났다. 하지만 다음 꺼낸 화제에 곧 진지해졌다.

“가브리엘이 수도를 떠난 이야기는 들었다.”

“그게…….”

그는 입을 다물었다.

그 가려진 뒷말을 알 것 같아, 로제리엘은 씁쓸하게 웃었다.

“아유, 역시 아빠를 속이는 건 불가능하네요. 맞아요, 아빠. 언니……. 찾았어요.”

“그러면.”

“하지만 아빠.”

“로제, 힐이…….”

로제는 손을 잡고 말했다.

“걱정되시죠. 알아요. 하지만 조금만 더. 우리 차분하게 언니를 기다려요.”

“…….”

언니가 되돌아오겠다고 스스로 결심할 때까지.

누구도 강제할 수 없도록.

“괜찮죠, 아빠?”

그렇지 않다면 아무 의미가 없을 테니까.

로제는 아이처럼 눈시울을 적시는 아빠를 보며, 씩 웃었다.

*

꽃집에서의 대화 이후, 가브리엘은 하루 종일 보이지 않았었다.

머물겠다고 고집을 피운 것은 그였으니 내가 그 이후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다.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려 애써 노력하며 꽃집 문을 닫고 밖으로 나오는 순간.

“원래 이 시간에 끝나십니까?”

그가 기다리고 있지만 않았더라면, 내 하루의 끝은 평소와 같았을 것이다. 얼굴이 절로 굳었다.

“왜, 여기에 있어요?”

“곁에 있겠다고 했을 텐데요.”

다시 봐도 신기하다.

내 앞에서 또박또박 말을 끝까지 하고, 시선을 피하지 않고, 몸을 돌려 먼저 사리지지 않는 가브리엘이란.

하지만 나는 제정신을 차리려 노력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와서 그의 태도가 바뀐 것이 무슨 큰일이라고.

몸을 휙 돌리고 걸어가기 시작하자, 뒤에서 따라 붙는 고요한 발걸음소리가 들렸다.

그것조차 거슬렸다. 원인 모를 화도 났다.

온종일 그가 있는지 없는지 밖을 살폈던 스스로를 깨달았을 때 이런 분노가 치솟았을까.

아니면 고요하고 평온한 이 마을의 일상을 깨버린 그의 존재 자체에 화가 난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찾아놓고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차지하겠다는 그 선언이 어이가 없고, 분통이 터지는 것일까.

‘나만, 항상 나만 휘둘리지.’

나는 가브리엘이 어떤 인물인지 안다.

그는 이 세계관에서 가장 강한 자였고, 그가 원한다면 소리 소문 없이 움직일 수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러니 지금 앞선 내 뒤에서 차분히 따라오는 걸음소리는 일부러 그가 기척을 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건 또 왜인가.

왜 그런 친절을 내보이지?

두려웠다. 나는 가브리엘로 인해 내 현재가 또 변하게 되는 것이 몹시 두려워졌다.

도망치기 전에는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없을 정도까지 마음이 벼랑 끝에 몰려 있었다.

그 편지를 남기고 내가 불쑥 사라지면 로제리엘이나 가족들이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에 대한 생각조차 그때는 크게 하지 못했다.

일단 피하자. 그것만이 터지기 직전의 내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법이었다.

망가지기 싫었고, 더 이상의 비난을 받고 싶지 않았다.

특히, 내가 가장 사랑하는 로제에게 상처 줄 수 있는 이 상황이 끔찍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가브리엘에게 끝까지 내 마음조차 전하지 않고 도망쳤던 것은, 어쩌면 내 마지막 자존심이었을지도 모른다.

오로지 동생의 언니라서 상대하겠다는 듯한 건조한 남자에게 당신을 좋아한다 말할 수 없는 내 마지막 자존심.

‘그래서 싫어.’

더는 흔들리고 싶지 않아.

‘내가 왜 도망쳤는데.’

또다시 그 연회장에서 볼품없이 뛰어나왔을 때의 모습이 되고 싶진 않았다.

나는 얼굴에 힘을 줬다.

걸어가는 길이 제법 멀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둘 사이에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는 그것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굴었고, 나는 일방적인 무시를 했다.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가브리엘.

당신이 원하는 게 뭔지 몰라도 내가 그곳에 당신과 함께 다시 돌아갈 일은 추호도 없을 테니까.

그러니까.

나를 더 흔들지 말란 말이야.

“다 왔군요.”

퍼뜩 고개를 들고 바라보자, 아득한 내 집이 보였다.

그리고 제대로 시선조차 주지 않았던 내 옆집.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 수준이었던 그 집에 시선을 주었을 때, 저도 모르게 깜짝 놀라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너무 변해 있어서.

‘행동이 대체 왜 이렇게 빠른 거야?’

수리비를 많이 썼다는 말이 진짜라는 것을 알겠다.

내 집보다도 더욱 멀끔한 모습으로, 그것도 단 하루 만에 변모한 광경이 어이가 없었다.

사람을 얼마나 많이 고용해 처리한 것인지.

설마 그래서 하루 종일 보이지 않았던 것인가 싶기도 했다.

기묘한 얼굴로 바라보니, 그가 왜 그러냐는 듯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이상하십니까?”

난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니요. 그리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싶군요.”

제법 냉정한 목소리에 내뱉은 스스로가 놀랐으나, 가브리엘은 도리어 웃었다.

‘웃었…….’

스치듯 바람 빠지는 것 같은 미소였으나 분명 웃었다.

“왜, 웃죠?”

“당신이 귀여우셔서.”

“…….”

미, 쳤나?

“그렇게 싫은 티 내지 않으셔도 됩니다. 갑자기 집에 찾아가진 않을 테니.”

나는 큰 충격에 빠져 미간을 찌푸렸는데도, 내 세상을 반쯤 흔들어놓은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그 옆집으로 차분히 걸어갔다.

걸어서 1분도 되지 않을 거리.

문을 열고 가브리엘이 나를 바라봤다.

그 순간 이 순간에 대한 자각이 내 어깨를 후려쳤다. 자 봐, 힐데아 폰 힐링턴. 지금 저 남자가 네 옆집에 살고 있어.

“좋은 꿈 꾸십시오, 힐데아.”

“…….”

담담하게 말하며 내가 먼저 집으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않겠다는 듯 바라보는 시선을 보며,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집 안으로 도주하듯 들어왔다. 언제 그랬는지 모르지만 거칠어진 숨결이 낯설었다.

“대체, 왜.”

정말 모르겠다.

왜 내가 쫓기는 기분이 드는 것인지. 항상 미련 넘치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는 것은 나였는데.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문에 기댄 채로 주르륵 미끄러져 내렸다.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심장이 쿵, 쿵 뛰었다.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야…….”

혐오하고 무시했을 때보다 더 나빴다. 아무것도 담지 않은, 그러나 떨어지지 않는 집요한 시선이 자꾸만 심장을 괴롭혔기 때문이다.

그날 밤, 나는 늦게까지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다.

그것이 바로 옆집에 있는 누군가 때문이라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뻔한 사실이었다.

*

다음 날, 아침.

가게가 아닌 집으로 찾아와 문을 벌컥 열며 들어온 엘라가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우후후, 힐! 내가 따끈따끈한 아침을 가져 왔…… 헉.”

“…….”

그리고 귀신처럼 침대 위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나와 마주쳤다.

엘라는 들고 있던 바구니를 떨어뜨릴 뻔했지만, 가까스로 그것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나를 바라봤다.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굴에 숨은 다람쥐도 아니고, 지금 그게 무슨 꼴이야, 힐? 깜짝 놀랐잖니!”

“…….”

“어머, 뭐야. 정말 상태가 왜 이래. 설마 한숨도 못 잔 거야?”

“그건 아니고, 조금은 잤어.”

사실 한 시간도 못 잔 것 같기도 했다.

까무룩 잠들었던 순간에는 가브리엘이 다시 찾아온 그 순간의 일이 선명한 꿈으로 찾아왔으니까.

집요하게 바라보던 눈.

짙게 풍기는 술 냄새.

그리고 내 손목을 잡은 뜨거운 손의 체온.

내뱉던 말들.

그 말들.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닿았던 그 말들!

‘으, 또 신경 쓰고 있잖아.’

엘라가 침대 앞으로 다가와 내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뜨렸다.

그 친근한 접촉에 예전이었으면 흠칫 놀랐을 테지만, 지금은 제법 익숙해져서 그만 하라는 듯이 손을 휘젓기만 했다.

엘라는 보란 듯이 한숨을 푹 내쉬며 침대 위로 올라와 같이 앉았다.

그리고 내 머리카락을 붙잡고 의미 없이 가지런히 땋기 시작했다.

“어휴, 오늘 마을 사람들 돕기로 했잖아. 너 아무래도 안 되겠다. 오늘은 그냥 쉬어. 응?”

“아니야. 나도 갈래.”

하나 땋더니 본격적으로 다른 쪽도 땋기 시작하는 엘라의 손길에 까무룩 잠이 쏟아지려고 했다.

아, 부드럽다.

어쩐지 사락, 사락 머리카락을 스치던 리라의 빗질이 떠올랐다.

리라. 리라는 잘 지내고 있을까? 한 번씩 나와 시선을 맞추곤 하던 시엔도 잘 지내고 있겠지.

선물했었던 것들을 지금은 꺼내서 쓰고 있을까?

“으휴, 무슨 고집이야. 그 상태를 하고 땡볕 아래 있다가는 한 시간도 못 버티고 픽 쓰러질걸? 그랬다간 마을 사람들 난리 날 거 아니니. 사람들이 널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랬다간 내가 혼난다고, 내가.”

나는 픽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이 팍 사그라든 것은, 머리를 땋는 것을 멈춘 엘라가 내 얼굴을 돌렸을 때였다.

시선이 마주쳤다.

그 순간, 퍽 진지해진 얼굴의 엘라가 물었다.

“근데 힐. 너 잠 못 잔 거.”

“응?”

“옆집 남자 때문이야?”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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