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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102화 (102/155)

102화. 옆집에 그가 산다 (2)

옆집 남자라고 불리는 것도 웃긴 그 사람. 가브리엘.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어쩐지 손 끝이 차가워졌기 때문이다.

“아, 아니야.”

습관적인 부정이 목구멍을 치고 올라왔다. 하지만 엘라는 수도의 사람들이 아니었고, 내 표현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힐. 나는 너한테 지금 추궁하고 있는 게 아니야.”

“…….”

“난 네 친구고, 네 감정이 무엇인지에 따라 적극적으로 도와주려고 하는 것뿐이야. 그러니까 사실대로 말해줬으면 좋겠어.”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괜히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었다.

전생에도 겪어본 적 없던 애정이었다. 아마 상냥한 엄마가 있었다면, 손위의 언니가 있었다면 이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그 사람을 피해 네가 있던 곳에서 도망쳐온 거야?”

나는 깜짝 놀라 엘라를 바라봤지만, 그녀는 진지했다.

“네가 어디에서 온 건지는 몰라. 하지만 적어도 이런 곳에 덩그러니 떨어져 살게 될 만한 애는 아니라는 건 알아. 평민이 아니라 귀족일지도 모른다는 것도 알고 있어.”

“……엘라?”

나는 멍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가,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것일까.

“그런데 왜…….”

나와 친구해줬어?

아무렇지 않게 손 잡아줬니?

편하게 이름을 부르고, 안아줬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어?

내가 있던 곳에서는 쉽지 않았던 그 대단한 것들을 엘라 넌, 왜 아무렇지 않게 준 거야?

그때, 엘라가 뺨을 긁으며 수줍게 웃었다.

“나 지금 처음 고백하는 건데, 제대로 된 친구 사귀는 건 네가 처음이야. 힐.”

나는 멍하니 대답했다.

“하지만 엘라는 주변에 사람 엄청 많잖아.”

“또래 친구 말이야. 이 마을에 애들이 얼마나 적은데. 다 내 동생들이거나, 아니면 언니 오빠들이었다고.”

엘라가 툴툴거리며 땋은 내 머리카락을 장난스럽게 손가락으로 흐트러뜨렸다.

“그래서 나한테는 네가 처음이란다, 힐.”

“…….”

“그만큼 소중하고! 네가 항상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머리카락이 풀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아마 강하게 땋았던 모양 그대로 구불구불 흐트러졌을 것이다.

엘라가 눈을 찡긋했다.

“게다가 첫 친구가 이렇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예쁜! 애가 생기다니 얼마나 좋았게?”

지금만큼은 혼란했던 마음도 잊고, 얼굴에 열이 올랐다.

“그, 런 소리를 또 아무렇지 않게 하고.”

“봐, 으이그, 귀여워. 이렇게 부끄러워하는 모습도 얼마나 재밌는데?”

“아, 정말.”

깔깔 웃은 엘라가 내 손을 양손으로 꼭 붙잡았다.

심장이 욱신거렸다. 우리 로제도 이렇게 손을 꼭 잡곤 했었다.

“힐. 그러니까 편히 말해봐. 그 남자가 널 괴롭혀서 네가 여기까지 도망쳐 와야 했던 거라면, 그 대왕 거머리.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쳐 떼내어 줄게!”

웃음이 팍 하고 터졌다.

대왕 거머리라니.

귀신 공작으로 불렸던 전쟁 영웅을 그런 취급하는 곳은 바로 이 마을밖에 없을 것이다.

내 웃음에 안심했던 것일까.

얼굴을 푼 엘라가 내게 말했다.

“하지만 만약에라도, 다른 감정이라면. 네가 지금 이렇게 한숨도 못 잘 만큼 그 사람에게 마음이 있는 것이라면 내게 말해. 어떻게든 도와줄 거니까. 보니까 저 남자도 여기까지 따라온 것을 봐선…….”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것만은 아니었다.

“아니야, 엘라. 그건 절대 아니야. 난……. 난 저 사람을 피해 도망친 건 맞아. 하지만 그건, 저 남자가 내 여동생의 약혼자이기 때문이었어.”

엘라가 굳었다.

그리고 음산하게 물었다.

“그럼 저 새끼가 너랑 네 여동생을 두고 양다리를 걸쳤다는 소리야?”

어, 나는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 아니야. 그냥 나 혼자! 나 혼자 그렇게 된 거야. 전하지도 않은 짝사랑, 이었어.”

“하지만.”

엘라는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했지만,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뱉고 나니 후련하기도 하고, 여동생의 약혼자라는 말을 다시 끄집어낸 것이 먹먹하기도 했다.

사랑하는 로제에게 죄책감을 품게 되는 순간, 더는 로제의 웃음을 편히 볼 수 없었다.

“더는 그 감정을 이길 수가 없어서. 그대로 내가 숨이 멈춰버릴 것 같아서 이곳으로 도망쳤어. 그런데.”

더는 가브리엘의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그 찡그림조차도 눈에 담는 것이 죄스러웠기 때문이다.

“저 사람이 왜 여기에 있는지, 정말 모르겠어.”

마침내 체념을 마음에 새겼을 때가 되어서야 둘을 편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아니, 어쩌면 편하게 바라본 것이 아니라 그저 삭막하고 건조하게 말라서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고 눈에 담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힐, 그만.”

갑자기 엘라가 그렇게 말하며 내 뺨을 장난스럽게 꼬집지 않았더라면, 또 묵직한 감정의 늪에 빠졌을 것이다.

난 따끔한 아픔에 눈을 동그랗게 떴고 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엘라를 보았다.

그것도 금세 장난스러운 미소로 변했지만.

“엘라?”

“안 좋은 생각은 그만. 자, 정리해볼게. 너는 저 남자를 좋아해. 그렇지?”

나는 눈을 굴렸다.

고개를 저으려고 했다가 엘라의 엄한 목소리에 다시금 눈을 굴리다 결국 인정했다.

그래. 그랬었다.

“사랑했었던 거야.”

“그럼 지금은 아니고?”

“……그럴 거라고 생각해.”

“정말?”

“……모르겠어.”

사랑하는 건지, 사랑했던 건지.

자신 없는 목소리에 엘라가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래, 거기까지만 하자. 그러면 다음은 저 남자. 이름은 뭐야?”

그에게 어떤 애칭이 있는지 떠올려 보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가브리엘이라는 이름 자체는 그렇게 희귀한 이름이 아니었으니, 이 먼 왕국의 사람들이 단박에 귀신 공작이라는 걸 알아채진 못할 것이다.

“가브리엘.”

“오, 되게 잘 어울리기도 하고, 분위기랑 안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이름이네.”

“풋, 그게 무슨 소리야?”

“아, 왜. 가브리엘. 천사의 이름이잖아?”

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내겐 가브리엘은 그저 가브리엘이었기 때문에, 이런 감상이 신기했다.

아마 수도의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 아닐까?

벨키우스 공작은 어릴 때부터 온갖 무서운 소문들을 달고 살아왔으니까.

내가 처음 보았을 때의 그도 그 나이의 소년 같아 보이지 않았더랬지…….

“무표정으로 있을 땐 얼마나 싸늘하던지, 근데 또 너랑 있을 땐 제법 온화해 보였단 말이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

“정말인데?”

엘라의 희한한 감상에 헛웃음을 터뜨리자, 그녀는 말을 이었다.

“그럼 너는 네 감정을 잘 모르겠고, 저 남자가 널 왜 따라왔는지도 모르겠다. 이거지?”

“응. 원래는 지금쯤 동생과 결혼생활을 하고 있었어야 할 테니까. 나는……. 떠나온 뒤로는 고향 소식은 끊고 살았었거든.”

“흐응, 그렇다 이거지.”

엘라가 갑자기 씩 웃었다.

그리고 내 어깨를 단단히 잡았다. 뭔가 불길한 기분에 눈을 깜빡이자, 그녀는 든든한 표정으로 입술을 휘었다.

“나만 믿어, 힐! 속마음을 알기 위해 가장 좋은 건 대화를 나누는 거지! 그리고 알아보자. 네가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

아니. 난 그 사람이랑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후후, 좋아.”

엘라 너, 왜 그렇게 웃니……?

“그런 의미에서 당장 일하러 가자! 기회는 만드는 자에게 오는 법!”

“뭐, 라고?”

“자 얼른 일어나. 굼벵이가 되고 싶은 거 아니라면!”

아까까지는 침대에서 쉬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응?

나는 어느새 엘라의 손에 이끌려 그녀가 가져온 아침을 입에 우겨넣다시피 하고, 대충 씻고, 옷을 갈아입고, 바구니와 호미까지 챙긴 채 밖으로 나서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좋은 아침입니다, 힐.”

당혹스러운 순간을 마주해야 했다.

가브리엘은 자신의 손에 들린 것을 한번, 그리고 내 꼴을 한번 바라봤다.

그리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무엇인지.”

말끔한 얼굴로 날 보고 인사하는 가브리엘을 보아야 했다.

“우리가 왜 이곳에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그러게요.

내 손에는 호미가, 그리고 그의 손에는 밭을 가는 기구가 들려 있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노동요라며 마을 노래를 부르는 마을 사람들과, 멍한 우리를 보며 우렁차게 외치는 엘라까지.

“자, 일들 해요, 일!”

그녀는 우리를 밭 한쪽으로 떠밀어버렸다.

“에, 엘라!”

“왜? 제일 작은 밭을 넘겨줬잖니, 힐.”

어이가 없어 바라보는 나와 가브리엘에게 엘라가 허리에 손을 얻고 엄격한 목소리로 혼을 내듯 말했다.

“일하지 않으면 점심도 없는 거야. 그리고 그쪽, 애초에 따라오겠다고 극구 우긴 것은 당신 쪽이었잖아요? 그런데 그런 황당한 얼굴 할 건 뭐람. 가만히 구경만 할 줄 알았나요?”

어쩐지 당황한 것 같은 가브리엘에게 그렇게 쏘아붙인 뒤.

“힐. 너도 그렇게 귀엽게 보고 있지 말고 그 장정 데리고 얼른 잡초라도 뽑아! 저 밭은 네 담당이니까, 어서!”

“에, 엘라?”

“자아, 단둘이 알콩달콩 대화도 좀 하면서 열심히 일하는 하루 되세요. 알았죠?”

악.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이게 도와준다는 거였니, 엘라!

*

“풋.”

황후 데자이아는 너무 우스워 터지는 미소를 참지 못했다.

결국 깔깔 높다란 교성으로 이어진 웃음은 한동안 방 안을 시끄럽게 울렸다.

“하, 하하, 정말, 내 남편은 가끔 멍청한 것인지 똑똑한 것인지 구분을 하지 못하겠단 말이야.”

어쩌면 이렇게 바라는 대로 흘러갈 수 있는 것인지 감탄이 다 나왔다.

축언 도둑에 당하지 않고 살아남은 생존자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데자이아는 하던 일도 멈추고 접시를 깨버리고 말았다.

그랬는데 회의의 방향이 아주 우스웠다.

어화둥둥 어르며 데리고 와도 모자랄 그 치료사라는 것을 죄인 몰 듯 끌고 오겠다는 황제의 명령이라니!

“그게 자기들이 유일하게 살 방법일 수도 있는데 말이지.”

아주 재밌었다.

앞으로 돌아가는 꼴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황후는 더 한 혼란을 바랐고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축언 도둑은 더 활개를 쳐야 했고 그것의 원인이든 해결책이든 밝혀지는 것은 황후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그 치료사를 죽여버리거나, 아니면 황제가 자충수를 두어 그 치료사를 범인으로 몰게 해야 했다.

그런데 그 치료사 이름이 힐이라고 했다고.

황후는 치밀던 웃음을 뚝 멈추었다. 힐. 힐이라.

그것은 지금 그녀에게 아주 진저리가 나는 이름이 아닐 수 없었다.

마침 자신을 보러 오기로 약속했던 황태자, 벤자민이 왔다는 소식을 밖의 시종이 전했다.

“들어오라.”

문이 열리고, 해쓱해진 것 같은 제 아들의 얼굴이 보였다.

무려 일주일 만이었다.

황후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황태자. 설마, 아직도 그 계집을 찾고 있는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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