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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103화 (103/155)

103화. 질투하는 남자는 물어요 (1)

데자이아는 말을 하지 않는 황태자의 모습에 순간 머리끝까지 분노가 치솟았다.

성질머리 같아서는 몇 주 전 난리를 피웠을 때처럼 아들을 몰아세우고 싶었지만, 그때 황태자의 제대로 된 반항을 접한 그녀는 그날 이후로 조심스러워졌다.

황후는 이를 바득 갈면서도 애써 웃었다.

“무슨 연유인지 몰라도, 제국의 수도를 도망치듯 떠나버린 그 나약한 계집을 찾아서 대체 뭐하려고 하느냐? 잊거라, 황태자. 너에게는 더 중요한 대업이…….”

“어마마마. 저를 부르신 일이 고작 그것 때문이라면, 할 일이 급해 가보겠습니다.”

“…….”

차가운 그 말투에 데자이아의 눈썹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일이 이렇게 잘 되어가고 있는데! 가장 중요한 열쇠인 황태자가 이런 식으로 굴다니.

이게 다, 이게 다 그 힐데아라는 계집 때문이었다.

차라리 도망치기도 전에 먼저 잡아 죽여버렸으면 얼마나 쉬웠겠는가.

그랬다면 제 아들이 미친 사람처럼 그것을 찾아 헤맬 일도 없었을 터인데.

“황태자. 이 어미가 시킬 것이 있다.”

“저는 따로 할 일이 있습니다.”

“조건을 거마.”

“……무슨 말씀이신가요?”

그제야 멈칫하는 아들을 보며, 황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아들을 움직일 수 있는 패를 내밀었다.

“네가 내가 말하는 사람을 잡아온다면, 그 계집을 옆에 들이겠다 하여도 허락하도록 하마.”

“……그녀를 찾도록 공식적으로 허락해주시겠다는 말씀인가요, 어마마마?”

반짝이는 눈을 보아하니, 그나마 힐데아 폰 힐링턴이 사라지기 전의 착한 아들의 모습이 보여, 데자이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비의 자리까지는 들일 것이다. 그리고 이후에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하면 그만.

이미 힐데아는 황후의 눈 밖에 난 지 오래였다.

하지만 그 속셈까지 제 아들에게 말해줄 필요는 없을 터.

데자이아는 요요히 웃었다.

“리파드 백작의 행적을 좇아 황제가 찾는 자를 네가 먼저 데려오거라. 꼭 네가 먼저, 반드시 살려서 데리고 와야 할 것이야.”

“그게, 누구인가요?”

붉게 칠한 손톱의 끝이 벤자민의 가슴팍을 쿡 찔렀다.

“치료사 힐이라는 자다.”

그리고 축언 도둑의 죄를 뒤집어서 쓸 자이기도 하지.

“어서 그 자를 이 어미에게 데리고 오렴. 그러면 네 사랑을, 허락해 주마.”

데자이아는 부드럽게 미소했다.

*

할 말은커녕 눈앞에 두기만 해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사람과 단둘이 있는 것은 긴장된 일이었다.

항상 그랬다.

항상 그랬었는데, 어째서일까.

‘왜 오늘은 이 침묵이 불편하지 않지.’

그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일해서일까.

나는 어쩐지 우리 둘이 고립되었었던 그 날의 일이 떠올랐다.

‘그때도 이랬어. 내 마음은 달랐지만.’

그 조용했던 숲 안, 가브리엘은 그때도 이렇게 움직이고 있었다.

물론 저 손에 밭기구가 들리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지나치던 마을의 어른들이 그렇게 어설프게 일하는 것 아니라 조언을 한마디씩 툭툭 던지는 모습을 보며 처음엔 얼마나 당황했더랬는지.

‘화를 내면 어떡하지?’

물론 가브리엘이 그렇게 경우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귀족이니까. 귀족들은 평민들을 우습게 여기는 경향이 강하니까.

하지만 내 우려를 비웃기라도 하듯 가브리엘은 묵묵한 얼굴로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리고 물었다.

‘이렇게 말입니까?’

퍽 진지한 태도였고, 잔소리했던 분도 깜짝 놀랐다. 그리고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등을 짝 내리쳤다.

가브리엘의 등을.

나는 입을 떡 벌렸다.

‘허이구, 힘은 좋구만! 그래, 그렇게 해!’

‘알겠습니다. 조언 감사합니다.’

그 태연한 대화에 깜짝 놀란 것은 나뿐이었나 보다.

잠시 시선이 마주친 가브리엘은 다시 밭을 갈기 시작했고, 나는 들고 있던 호미만 꾹 쥐었다.

잡초와 작물을 구분 못 하고 파버리는 내 행동에 분통을 터뜨리는 어떤 할머니의 모습을 본 가브리엘이 자기 혼자만 일을 했기 때문이다.

뒤로 물러나 계십시오, 그렇게 말하면서.

그리고 지금까지 구경이나 하고 있는 처지였다.

가끔 눈이 마주치는 엘라가 눈을 부라리며 뭐라 하는 것 같은데 알 수가 있어야지.

그리고 시무룩하기도 했다.

가브리엘은 뭔가 단단히 오해한 게 틀림없었다. 나는 지금 무려 꽃집 사장이었다!

‘잡초랑 작물을 구분 못할 리가 없잖아.’

아닌데. 나 구분 잘 하는데.

그냥, 옆에 있는 가브리엘과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너무 놀라 푹 떠버린 것이었는데…….

“후우.”

그의 넓은 등은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고 나는 그것을 눈으로 따랐다.

그래도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저 사람이 언제 저런 일을 해봤을까. 왜 저런 불편함을 모조리 감수하고 있는 걸까.

괜스레 복잡한 마음에 신경이 쓰였다.

바로 그때였다.

“언니야!”

영롱한 목소리.

활짝 웃는 얼굴.

“루아?”

“언니 보러 와쪄요! 근데 저 오빠야는 왜 여기 이써요?”

놀러왔던 것인지 루아가 두 눈을 반짝이며 쪼르르 달려왔고, 그 옆에는 루아의 오빠인 영주님도 있었다.

“영주님?”

“안녕하세요, 힐.”

눈이 마주치자 영주님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근데 저분은 그때 그…….”

영주님의 시선이 힐끗, 가브리엘에게 향했다. 궁금한 티가 역력했다.

“아. 그때 보셨었죠. 그, 가게에서요.”

“예. 하지만 제대로 소개는 못 들은 것 같아서, 혹시 물어봐도 될까요? 그, 평범한 분은 아닌 것 같은데…….”

하긴. 가브리엘은 귀족의 태가 나지 않는 평범한 셔츠와 바지를 입고 있는데도, 확실히 남다른 아우라가 있었다.

그것 때문일까.

아무것도 모르는 영주님은 가브리엘을 눈에 띄게 어려워하는 모습이었다. 아니면 꼭 그가 누군지 아는 것 같기도 했고.

하지만 그럴 리가 없잖아.

나는 고개를 저으며 앞으로 나섰다.

“저 사람은 가브리엘이라고 해요. 그리고 저와는…….”

잠깐 멈칫했다.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어쩐지 그 순간 가브리엘과 영주님, 그 밖에 주변에 있던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내게 향한 느낌이었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킨 뒤 결론 지었다.

“저의…… 동향 사람이에요.”

“그, 게 다이군요. 동향 사람!”

“네?”

어째서인지 영주님은 얼굴이 밝아졌고 마을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그리고 가브리엘은.

난 힐끗 그를 바라봤다가 깜짝 놀랐다.

‘어?’

밭기구를 가는 움직임이 한층 거칠어진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지금 푹, 파이는 저게 땅이 아니라 푸딩이라고 해도 믿기겠다.

그때 루아가 내 치맛자락을 툭툭 잡아당겨 자신들을 보게 했다.

“히히, 루아 언니야 무릎에 앉고 싶어!”

“그럴래?”

“웅, 그럴래요!”

어째서인지 바위 위에 앉아 있던 내 무릎 위로 올라온 루아와 그 옆에 영주님이 앉게 되면서, 우리는 열심히 일하는 가브리엘을 구경하는 모습이 되었다.

‘이래도 되나, 정말?’

다들 일하는데 쉬고 있자니, 죄책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어쩐지 땅을 망치고 있는 것 같은 가브리엘의 모습도.

‘안 되겠다. 뭐라도 해야…….’

“저, 힐?”

만약 영주님이 말을 걸지 않았다면, 그에게 다가가서 뭐라고 말을 걸었을지도 모르겠다.

“아, 네. 영주님. 왜 그러시나요?”

눈이 마주치자 수줍게 웃은 영주님이 말을 이었다.

“그, 후작이 더는 괴롭힐 힐은 없을 거라고 말씀드렸었는데 자세히 설명을 못 드렸지요.”

아, 그거.

그 후작 때문에 골치 아팠던 것이 바로 얼마 전인데 우습기도 했다.

가브리엘의 등장에 온정신이 날아가 버리는 바람에 잊었구나 싶어서.

“후작이 부리던 용병들이 있는데, 그들의 팔다리가 모두 부러지며 활동이 중단되는 바람에 더는 사람을 부리지 못하게 되었다고 해요.”

나는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눈만 깜빡였다.

용병을 고용하면서, 후작이 부리는 이들에 대해서도 알아보았었다.

제법 잔뼈가 굵은 자들이라 골치 아프다는 반응들이 제법 있었기 때문에 의아했다.

내가 일을 벌이기도 전에 다른 누구와 시비가 걸렸다는 뜻인가?

아니, 어떤 실력자가? 하필 그들을? 이 시점에서, 왜?

근데 팔다리……가 부러진 상황이 어딘가 익숙한데.

어쩐지 격하게 움직이던 가브리엘의 등이 멈칫한 것 같았다.

“그래서 후작이 직접 저번처럼 찾아와 괴롭힐까 걱정이 되었었는데.”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만약 후작이 무례하게 행동하는 꼴을 가브리엘이 보게 된다면, 괜히 시끄러운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만약 그 과정에서 가브리엘이 누구인지 이 마을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그가 데리러 온 내 정체도 순식간에 들키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렇게 친근하게 말을 거는 루아도, 영주님도, 마사 부인도, 헤리스 씨도, 그리고 엘라도 잃을지도 모른다.

‘싫어.’

그때였다. 영주님이 한숨을 쉬며 말한 것은.

“걱정이 무색하게, 그, 후작도 두 다리가 부러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데?

나는 천천히 내 앞에 지는 그림자를 보았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언제 다가왔는지 앞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는 남자가 보였다.

말을 멈춘 영주님과, 같이 고개를 들어 올린 루아가 짤생겨써! 하고 감탄하는 소리.

그리고.

“언제까지.”

들끓는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놀고 계실 건지.”

말의 내용에 순간 어이가 날아갔다. 당신이 놀라고 했잖아.

뭐라 하기도 전에 가브리엘의 날카로운 시선이 옆에 앉은 영주님을 향했다.

“그쪽 분은 일하지 않으실 거면, 바쁘신 분 그만 붙잡으시고.”

그 눈이 어찌나 싸늘했는지, 내가 다 마른침이 넘어갔다.

어느새 눈치를 보던 루아가 내 무릎에서 내려가 제 오빠의 무릎을 꼭 잡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성질 나빠 보이게 입술을 비튼 가브리엘이 말했다. 나를 살짝 잡아당기며.

“다른 곳에 가주면 좋겠는데.”

이해할 수 없는 적대적인 태도에 깜짝 놀란 것도 순간, 뒤이어 내뱉어진 영주님의 말에 나는 한 번 더 놀라고 말았다.

“시, 싫은데요.”

영주님?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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