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질투하는 남자는 물어요 (2)
루다나 마을은 무척이나 평화롭고 고요한 곳이었다.
여기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이 마을을 벗어나지 않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옆집이 오늘은 어떤 메뉴를 아침으로 먹었는지까지 알고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젊은 남녀의 사랑 싸움이란 이곳에서 가장 보기 힘든 것들 중 하나였는데…….
“어머, 나 이런 장면 소설에서나 본 것 같구나. 꽤 낭만적인걸?”
마사 부인이 푸근히 웃으며 말했고, 옆에 있던 엘라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잘생긴 남자 둘이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치열하게 경쟁……하긴 하는데, 아무리 봐도 우리 영주님이 좀 밀리는데요. 저건 겁먹은 얼굴이잖아?”
“그건 그렇구나. 저렇게 자신감이 없으셔서, 원.”
오늘은 온 마을의 사람들이 함께 밭을 일구고 그것을 돕기도 하고, 함께 노래를 부르기도 하며 시간을 보내는 날이었다.
엘라가 혀를 차며 말했다.
“힐은 아니라고 하지만요. 제가 보기에 저 남자는 힐을 엄청나게 좋아하는 것 같거든요.”
“음.”
“저 눈 좀 보세요, 으으, 아주 그냥 잡아먹을 것 같은데요? 어떻게 저 눈을 보고 아무 사이 아니라고 생각을 하죠?”
마사 부인이 인자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무슨 오해가 있는 모양이지. 그래도 잘했구나, 엘라. 힐은 너무 침착하고 생각이 많아서 가만히 놔두면 끝도 없이 땅을 파고 들어갈지도 몰라.”
“그건 그렇죠. 그런데 그럼 영주님은 어떡하죠?”
그때 듣고만 있던 촌장 부부가 훅 끼어들었다.
“사랑이 불타오르는 데 바쳐지는 제물이 되시겠지.”
“무슨 소리야! 우리 영주님이 힐에게 새 마차가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고!”
엘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됐든 힐만 행복하면 돼요.”
“그건, 그렇지.”
마을 사람들이 보는 힐은 그랬다. 정말 착하고,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그런데 마음에 상처가 많았다.
꼭 어디 가서 구박만 받고 자란 아이처럼 처음에는 웃지도 못하고, 눈도 오래 마주치지 못하고 제대로 말도 못했다.
그래서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그들은 힐이 애틋했고 그래서 행복하길 바랐다.
그래서 저 집요한 눈으로 좇아온 무시무시하게 잘생긴 남자가 괜찮은 인간인지 시험하기 위해 이곳으로 데려온 것도 있었다.
귀족일 것이 분명한 사내에게, 평민들이 잔소리를 툭툭 내뱉고, 불쾌한 말들을 하고, 대뜸 밭일을 하게 만들었어도 묵묵한 태도는 일단 합격이었다.
애써 화를 참는 것 같지도 않았고, 도리어 힐에게 일을 하지 말라 밀어내기까지 했다.
암만 봐도 괜찮아 보이는데 두 사람은 왜 저렇게 꼬였을까?
“근데 정말.”
마사 부인은 눈치를 보다 결국 이쪽으로 쪼르르 도망쳐 오는 루아를 품에 안아준 뒤, 새삼 질린 듯 말했다.
“만만치 않은 사람이구나.”
정확히, 영주를 노려보는 가브리엘을 바라보면서.
그 눈이 꼭 먹잇감을 앞에 둔 늑대 같아 보였으니까.
*
“싫다?”
“네, 시, 싫어요.”
“어째서?”
“저는, 방해한 것이 없습니다.”
“당사자가 방해라고 했는데 아니다?”
“히, 힐이 그런 말은 하지 않았으니까요!”
“호오.”
가브리엘의 비웃음도 당황스러웠고 지지 않고 말하는 영주님도 당황스러웠다.
“저, 그만하세요.”
나는 얼른 둘의 사이에 손을 휘저어 시선을 내 쪽으로 돌렸다. 아니 왜 싸우고 그래요?
“음…….”
그런데 왜 둘 다 나를 무슨 심판 보듯이 바라보는지 모르겠다.
무슨 말이라도 하라는 듯 압박하는 눈에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그, 아무래도 일을 해야 하니까 영주님이 물러나 주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히, 힐?”
아무래도 이게 맞지. 우리가 지금 놀러온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열심히 일하고 있을 테니까.
물론 내가 가만히 앉아 있다고 일에 도움이 되는 것 같진 않지만 일하고 있는 사람 뒤에서 시시덕거리면 기분이 나쁠 수 있지.
“그, 그런가요…….”
사람 좋은 영주님이 마음에 상처를 입은 듯 시무룩해지는 모습이 안타깝긴 했지만, 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하지만 후작 건에 대해서는 저도 듣고 싶어요. 그러니까 나중에 꽃집에 방문하실 때 듣기로 하지요.”
“네! 꼭 방문할게요!”
아, 깜짝이야.
다 죽어가는 것처럼 변했던 영주님이 갑자기 와락 소리를 지르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나는 놀라 휘청였고, 바짝 다가와 있었던 가브리엘의 팔이 내 등을 받쳤다.
가브리엘의 커다란 손이 등에 닿자, 심장이 다른 의미로 펄떡거리며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뜨, 뜨거워. 나는 입술을 마구 깨물었다. 무시하고 외면하려고 해도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이 가브리엘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어서.
“머지 않아 찾아뵐게요, 힐. 꽃집으로. 꼭 말입니다.”
“그, 그래요. 영주님. 곧 뵈……요.”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영주님이 아쉽다는 듯 멀어질 때에도 등에 닿은 손에 딱딱히 굳어만 있었다.
“저, 가브리엘.”
“…….”
그만 받쳐줘도 될 것 같은데.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순간 등이 시원해졌다.
가브리엘의 손이 멀어진 것이다. 순간, 아쉽다는 생각이 들어 입술을 깨물었다. 난 구제불능이야.
입술을 놓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는데 그가 아직도 그곳에 있었다.
가브리엘은 아직 할 말이 있다는 것처럼 한걸음 물러난 상태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힐.”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
“힐데아.”
내게만 닿게 부르는 내 진짜 이름.
두 달간 꾸준히 힐이라고만 불려왔기 때문인지, 그가 이름을 부를 때마다 심장이 옥죄었다.
보라색 눈이 선명하고 아름다웠다. 언제나처럼.
그래. 내 심장은 아직도 당신을 보며 빠르게 뛰어.
“……네. 가브리엘.”
그게 그렇게 무서웠는데, 지금은.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아마, 이때가 내가 그의 눈을 평온히 바라보는 아주 오랜만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저 영주와 친하시더군요.”
“네?”
“저자가 좋으십니까?”
뒤따른 말에 와장창 박살이 나고 말았지만.
“……네?”
“저 새…… 영주에겐 편하게 말씀하시더군요. 웃으시고.”
앞에 웅얼거린 말이 잘 들리진 않았지만, 뭔가 불퉁한 목소리였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수도에서보다 훨씬 편해 보이십니다.”
나도 모르게 편하게 말이 흘러나온 것은 가브리엘의 태도가 이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명확히 인지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말이 끝나기 전에 인상을 찌푸리지도, 물러서지도 않았으니까.
어쩐지 신기한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어쩐지 이곳이 더 편해 보인다 말하는 가브리엘의 목소리가 시무룩해진 것 같아서.
당신 정말 무슨 생각이에요?
피하기만 하던 그 목소리에 담긴 마음이 조금은, 아주 조금 궁금해졌다.
“이 마을이 좋아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많이 배웠어요. 특히 영주님은.”
“…….”
“정말 좋은 분이죠. 이 마을에 정착할 수 있게 가장 큰 도움을 주신 분이었어요. 그리고 루아도 귀엽고요.”
“그게…… 다입니까?”
“더 뭐가 필요한가요?”
집요하게 바라보는 눈길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여전한 그의 시선이 느껴져 정수리가 뜨거워질 정도였다.
엘라의 말이 뇌리에 소용돌이쳤다.
대화를 제대로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그래서 둘만 있게 해준 것은 알겠는데, 정말 대화를 오래 나누게 될 줄은 몰랐다.
“가브리엘, 당신은.”
왜 그는 질책하지 않을까. 나는 가족들을 찾으면 그들이 날 가장 먼저 비난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러니까 당신은…….”
왜 그렇게 떠났는지, 대체 언제부터 떠날 준비를 했던 건지, 왜 하필 그 시점이어야 했는지, 이런 말들.
결혼을 앞둔 동생을 두고 언니가 가출해버리는 상황이 사실 얼마나 무책임한지 알고 있는데.
‘난 언제나 내 감정에만 몰입되어서 아무것도 보지 않았고.’
루다나 마을에서 하나씩 배워나갔다.
‘어쩌면.’
사람에게 마음을 표현하는 법, 시선을 맞추고 대화하는 법, 웃으며 호의를 호의로 대하는 법. 모두가 나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라는 확신.
‘정말 어쩌면.’
천천히 다시 가브리엘의 눈을 바라봤다. 그 눈에 비추는 것이 정말, 정말 경멸과 혐오인지.
그리고 마주쳤다.
고요한 눈을.
아니, 조용히 눈꼬리가 휜 부드러운 시선을.
“힐. 천천히, 차분히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세요.”
아까 영주님께 향하던 시선과는 천지 차이의 그 눈매를.
“도망치지도.”
“…….”
“피하지도 않을 테니.”
“…….”
“제 표정이 당신을 아프게 하는 일도 없을 겁니다.”
가브리엘이 나를 저렇게 쳐다보던 사람이었나, 하고.
그 눈이 저렇게 부드러웠었나, 하고.
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그러면.”
“네.”
“밭일, 나도 같이 도울게요.”
*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후작 관련된 일을 설명하겠다고 한 영주님은 바쁜 일이 생겼는지 바로 찾아오진 않았다.
후작의 그 못된 성격을 보았을 때, 힘으로 누른다고 해도 더 발악할 성격으로 보였는데 확실히 지금 상황은 모두 이상했다.
‘아예 그런 생각을 못하게 만들어버릴 인물이 아니고서야.’
나는 그럴 수 있는 인물이 얼마나 있는지 떠올려보았다. 내 고객들처럼 왕족이거나, 아니면.
‘제국의 고위귀족.’
이를테면, 제국의 하나밖에 없는 전쟁 영웅 같은.
‘설마 가브리엘?’
시기를 생각해보면 비슷했다.
하지만 정말 저 사람이 그랬다고?
내 시선이 자연스럽게 꽃집에서 훤히 보이는 카페의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있던 가브리엘에게 향했다.
그 순간 그와 눈이 마주친 느낌이었다.
나도 모르게 깜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며칠간 가브리엘과 난 존재하지 않는 투명 인간, 그림자처럼 서로를 대했다.
나는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을 애써 묻지 않은 채 시간을 보냈고, 가브리엘은 아무런 재촉도 하지 않은 채 정말 꽃집을 호위하듯 지켰다. 시선 닿는 곳 어딘가에는 항상 있었으니까.
어쩌면…….
어쩌면, 그 모습은 내가 먼저 무슨 말을 꺼내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을.
무슨 말을?
그래서 나는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스치듯, 술주정이라고 넘겼던 가브리엘의 말들이 점점 뇌리를 잠식했다.
혹시.
하지만…… 설마?
엘라의 말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눈을 가리지 말고 대화를 하라고.
그 아슬아슬한 줄이 끊어진 것은 영주님이 찾아온 날이었다.
*
딸랑, 꽃집의 문이 흔들렸다.
고개를 들자 보인 것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영주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