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착각이 깨지는 순간
가장 먼저 본 것은 영주님의 터질 것 같은 얼굴, 그리고 그 손에 들고 있는 화려한 꽃다발이었다.
나는 멍하니 그 꽃다발에 시선을 두었다.
“히, 힐. 잠깐만 둘만 있고 싶습니다. 괜찮을까요?”
영주님은 꽃집 안에 들어와 있는 가브리엘을 힐끔 보고 그렇게 물었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얼굴을 굳혔다.
꽃다발을 보자마자 선명한 배신감이 들었기 때문에.
‘언제는 내 꽃집의 꽃이 최고라고 했잖아요, 영주님?’
저건 내가 만든 꽃다발이 아니었다. 어디 가서 사 온 거야?
자존심이 조금 상했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는 순간이었다.
내가 말을 놓친 것도 모르고 영주님이 다부지게 말했다.
“아니, 상관없습니다. 여기서, 여기서 말할게요.”
“네?”
내가 눈만 깜빡이고 있는데, 망가진 인형처럼 이상하게 걸어온 영주님이 내 앞에 뚜벅뚜벅 걸어와 그 화려한 꽃다발을 내게 척 내밀었다.
그리고 말했다.
“힐. 받아주세요.”
“…….”
확 꽃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아니, 그게 아니라.
“네?”
아주 잠깐 혼란스러웠다.
‘이걸 왜 주지?’
꽃집 사장에게 다른 집에서 만들어온 꽃다발을 건네주는 건, 이걸 보고 배우라는 건가?
참담했다.
그래, 내가 손재주가 없어서 꽃다발 장식을 만드는 것에는 좀 약하기는 하지만 이렇게 돌려 말하는 방식은 너무 섭섭…….
“좋아합니다!”
……해야 하는 게 아니었구나.
“네?”
나는 너무 놀라 눈을 깜빡였다.
“힐, 제가 당신을 좋아합니다!”
머리가 텅 비는 느낌은 바로 이 순간이 아닐까 싶었다.
뒤에서 드르륵-하는 소리와 함께 가브리엘이 일어나는 기척이 났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고백한 영주님을 볼 수밖에 없었다.
영주님은 얼굴이 토마토처럼 물든 채로 빠르게 말을 이었다.
“제 동생을 고쳐주셔서, 돌봐주셔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당신이, 정말 당신이 너무 좋아요, 힐…….”
“…….”
좋다고.
내가?
“청해도 된다면 평생, 제 영주성에서 함께 해주셨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영주님이 고백했다.
분명 고백이었다.
누구에게? 바로 나에게.
나를 좋아한다고? 영주님이?
“당신이 미치도록 좋아요.”
수줍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엘라의 짓궂은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영주님이 널 얼마나 좋아하는데? 왜 그걸 너만 모르니!
그때마다 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당연하지. 당연하니까.
대체 누가……. 누가 날 좋아하겠어?
가족들도 사랑하지 않던 차갑고 냉정한 힐데아 폰 힐링턴을, 과연 누가.
그런 거 아니야. 그렇게 말하면 엘라는 슬픈 얼굴로 말했다.
‘힐, 넌 왜 아무도 널 사랑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건데?’
왜 묻는지 이해 못할 만큼 당연한 말이었다.
그야, 엘라. 내가 그런 사람이니까.
‘힐, 내 친구야. 넌 사랑 받을 만한 사람이야. 그걸 이제는 좀 알자. 응?’
마음속에 수천마리의 나비가 일제히 날아오르는 것 같았다.
평소처럼 순했지만 물러나지 않겠다는 듯 또렷한 눈동자가 보였다.
나를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 정말로, 나를.
보이지 않는 손이 가시덤불 위에서 멈춰 있던 내 등을 살짝 밀어낸 기분이었다.
자. 걸어가.
걸어가서 앞을 봐.
“지금, 다른 사람이 아니라 제게…….”
“네!”
“영주님.”
“당신이 좋아요.”
로제처럼 환히 웃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무뚝뚝하고, 제대로 표현할 줄 모르는 나를 사랑한다고.
신기했고, 동시에 깨달았다.
“아……. 저는.”
내가 아직 놓지 못한 한 가지의 미련이 아직도 선명히 웅크리고 있었다는 것을.
그것이 내게 고백해준 상냥한 이에게 어떤 실례가 되는 줄 알면서도, 나는 가브리엘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나는 운을 떼기 위해 입술을 핥았다.
“영주님, 저는.”
눈이 마주치는 순간, 슬프게 일그러지는 눈을 보면서 말을 삼켰다.
‘이 말을 내뱉으면 영주님을 아프게 하겠지.’
하지만 말해야 했다.
이대로 넘기는 것은 날 좋아해준 저 사람에 대한 실례였고 무례였다.
속으로 말들을 한 번 정리했다.
미안해요, 영주님. 저는 아직 완전히 마음을 놓지 못했어요. 그래서…….
그 마음을 정말 끝내기 전까지는, 새로운 사람을 받아들일 수 없어요.
“저는.”
그렇게 말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
바로 그 순간, 무언가가 내 눈을 가렸다.
애달팠던 얼굴의 영주님이 사라지고 깜깜한 암흑만이 시야를 대신했다.
뭐, 야?
시야를 가린 무언가가 뜨겁게 달아오른 가브리엘의 손이라는 걸 깨달은 것은 이후에 들린 낮은 목소리 때문이었다.
“지금.”
무척 낮은, 동굴에서 울리는 것 같은 목소리가 바로 뒤에 있었다.
가브리엘?
“지금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끓는 용암 같다고 생각했다.
멍하니 입을 벌렸다.
가브리엘의 손을 떼어내려고 했지만, 영주님의 반박이 더 빨랐다.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끼, 끼어듭니까?”
눈을 가린 손끝에 아주 잠깐 힘이 들어갔다.
꼭 분노를 참는 것처럼.
내뱉은 가브리엘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비틀려 있었다.
“자격? 있지.”
“뭐라고요?”
“가문 대 가문, 정식 서류로 거절당한 것은 아니니까.”
“……힐은 당신이 그냥 동향사람이라고 했, 아니. 됐습니다. 비키세요. 지금 난 힐에게 고백을 한 거니까요.”
픽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가브리엘의 웃음이었다.
“그러니 끼어들어야지. 이 소리를 듣고도 가만히 있으면 병신이지. 안 그런가? 어떤 심정으로, 어떻게 참고 있는데.”
이해할 수 없는 말들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눈을 가린 손을, 그 손을 떼어낼 수가 없었다.
‘가브리엘, 당신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 얼굴을 강하게 쥐고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도 이상하게 떨쳐낼 수가 없었다.
가브리엘이 내게 속삭였다.
“그렇잖아요, 힐.”
칼에 찔리기라도 한 것 같은 목소리여서 심장이 덜컹했다.
“가, 브리엘?”
“힐. 저는 말했습니다. 당신이라고. 착각하지 않았다고.”
“…….”
가려진 시야 속에서 선명히 닿아오는 것은 가브리엘의 음성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선명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다면 맞닿아 있는 등을 통해 느껴지는 그의 심장 소리.
쿵, 쿵, 쿵.
내 것처럼 크고 빠르게 뛰고 있는 격렬한 소리.
“약혼자입니다.”
순간의 정적이 흘렀다.
“네?”
“네?”
영주님의 황당한 물음이 곧 내 물음이었다. 가브리엘, 지금 뭐라고요?
“약혼자라고 했습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가 내 눈을 가린 손을 거두었다.
“내가.”
살짝 찌푸렸던 눈을 깜빡이며 바라보자 어느새 뒤에서 고개를 숙여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가브리엘이 보였다.
“힐의.”
주시하는 것 같은 선명한 보라색 눈동자.
입이 뻐끔거렸다.
머리가 뒤죽박죽 모두 뒤섞였다.
애써 술주정이라 치부했다.
‘당신이 내 약혼자라고?’
모든 것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그런 것을 오래 착각할 리가 없지 않느냐고.
하지만 날카로운 발톱이 할퀴듯, 다시 만난 가브리엘이 말했던 말들이 계속 나를 괴롭혔다.
‘내 청혼을 그렇게 짓밟고 기껏 도망간 곳이 여기입니까.’
‘또 도망가도 소용없습니다. 당신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가서…….’
‘나만 보게 할 겁니다.’
‘압니다.’
‘이 눈은 날 보고 있는데.’
‘이렇게 날 갖고 싶다는 눈으로 보는데.’
그래, 나는 무서웠다.
내 감정이 어떤 이름을 갖고 정확히 끝맺게 되는 것이.
사랑하는 로제도, 가브리엘도, 가족들도, 그리고 나도 도망치는 것이 가장 마음을 다치지 않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하나는 알겠다.
입술을 잘근 깨물며, 생각했다.
‘저 눈은 절대…….’
절대 약혼녀의 언니를 바라보는 눈이 아니라는 것을.
*
영주님은 처연하게 울었다.
넓은 어깨가 축 처진 것이 안타까웠으나 토닥이진 못했다.
나는 이제 누군가의 감정 앞에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차분히 대화했고, 영주님의 따뜻한 말들을 들었다.
어떻게 좋아하게 되었는지, 정신을 차리고 보면 당신만을 바라보게 되었다고, 항상 꽃집을 배회하고 루아의 방문을 핑계로 찾아왔었다고.
예전이었다면 그런 말들을 들었더라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 눈에 담긴 진심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조용히 꽃을 받았다. 그러나 영주님도 나도 알고 있었다.
미안해요, 영주님. 하지만 고마워요.
‘당신은 제가 처음 좋아한 사람이었어요, 힐. 하지만……. 마음은 강요할 수가 없는 거지요. 어쩌면, 저는 처음부터 알았을지도 몰라요. 그래서 그렇게 초조했던 것일지도 몰라요…….’
‘영주님?’
영주님은 결국 눈물을 보이고 말았지만, 씩씩하게 일어섰다.
그리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고맙다고 해줘서 감사해요.’
다음에는 친구의 모습으로 당신 앞에 서겠다고 그리 말하면서.
영주님은 나 같은 것보다 훨씬 더 용감했다. 그러니까, 지금의 나보다도 훨씬 더.
“할 수 있어, 힐데아.”
지금은 밤이었고, 나는 집에 있었다.
나는 마사 부인에게 얻어온 진한 과일주를 한잔 따라 놓은 채, 마른 침을 삼키는 중이다.
“후우.”
맨정신으로 움직이는 것보다 술의 힘을 빌리는 것이 좋을 듯했기 때문이다.
완전 취하는 건 아니고, 조금만.
조금 용기를 얻을 수 있을 정도로만.
“좋아, 가자.”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과일주를 벌컥 들이켰다.
달달하면서도 알싸한 느낌이 목구멍을 스치며 온몸이 홧홧해졌다.
동시에 벌떡 일어났다.
몇 걸음 걷기만 하면 보이는 그 집. 가까워도 너무 가까운 옆집.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누군가를 향해.
똑똑, 문을 두드리자 부드럽게 문이 열렸다.
지독하게 잘생긴 얼굴이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
“가브리엘.”
환상이 아니라고, 도망치지도 않겠다고, 그렇게 말하면서.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요. 가브리엘.”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손가락도 떨렸다.
이 말을 내뱉고 나면 되돌릴 수 없을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알의 껍질은 깨지게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깨진 조각들이 발을 찔러 피를 낼지, 아니면 안에 있는 것을 세상에 토해낼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도 도망칠 순 없어.’
드디어, 나는 주먹을 질끈 쥐며 입을 열었다.
“혹시, 로제가 아니라.”
“…….”
“로제가 아니라 나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