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당신에게 닿기까지 (1)
더 침착하게 말할 생각이었다. 더 차분하고, 조용하게.
그런데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준비했던 말들이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대뜸 물은 것이다. 로제가 아니라 나였는지.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감정들이 모조리 폭발한 것처럼.
“정말, 나예요?”
다시 묻는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머릿속에는 온통 질문들이 휘몰아쳤다.
정말 나야?
그렇다면 언제부터?
맞다면 당신은 왜 날 그렇게 봤었어?
믿고 싶은데, 믿을 수가 없어.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당신이 여기에 버티고 있는 이유가 설명이 안 돼.
아니라고 한다면 나는, 다시 침몰하겠지. 견딜 수 없을 거야. 그러니 무슨 말이라도 해, 제발.
제발…….
그때였다.
“힐데아, 당신은 정말.”
바람 같은 부드러운 웃음소리였다. 질끈 감았던 눈을 번쩍 뜨고 그를 바라봤다.
줄곧 나를 바라보고 있던 사람을. 더는 차갑게 바라보지 않는 가브리엘을.
그는…… 사랑스러운 것을 보듯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제가 지금 얼마나 기쁜지 모르실 겁니다.”
머리가 멍했다. 기쁘다고?
“제가 얼마나 환희에 차 있는지.”
그가 손을 뻗어 내 손목을 부드럽게 휘어 감았다.
“그것도 모르시겠죠.”
다정한 손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손길이 도망가지 못하게 하겠다는 듯 느껴졌다.
“당신이, 드디어.”
나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왜, 지금 이 순간 왜 저리 웃을까.
“물어봐 주셨으니까. 제가 왜 여기에 있는지, 드디어 궁금하신 것일 테니.”
“……가브리엘.”
꼭 이 순간만을 끔찍하게 기다려왔다는 것처럼.
“제가 당신께 닿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하시다면.”
그의 도드라진 목울대가 울렁였다. 꼭 마른침을 삼키는 듯했다.
여유로운 척하고 있지만, 나만큼이나 그도 긴장한 것처럼 보이는 건 착각일까?
“부디.”
가브리엘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열린 문 안쪽, 집안을 가리키며 말했다.
“안으로 들어오세요, 힐데아.”
더는 도망가지 마.
그런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눈이 마주쳤다.
그는 간절했고, 나 또한.
‘들어야 해.’
반사적으로 한걸음 물러나려고 했던 몸뚱이가 그의 시선에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멈추었다.
그래. 문을 두드린 것도 나고, 말을 시작한 것도 나다.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모른 척, 눈을 감은 척, 듣지 못한 척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래요. 들어갈…….”
나는 입술을 핥은 뒤,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이었다.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부드럽게 잡아당기는 가브리엘의 힘에 이끌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
탁.
문이 닫혔다.
*
집 안은 평범했다. 앉으라는 손길에 어떤 정신으로 움직였는지도 모르겠다.
눈을 깜빡이며 정신을 차렸을 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이 그와 내 앞에 하나씩 놓여 있었다.
그리고 시선도.
시선도 닿았다.
‘무슨 말을 먼저 해야.’
나는 대화에 자신이 없는 사람이었고, 내가 알기로 가브리엘도 과묵한 편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상성으로 따지면 최악일지도 몰라.
그런데도 이상한 것은 찻잔의 김을 바라보고, 날 가만히 지켜보는 가브리엘의 시선 앞에서 점점 안정되어 갔다는 것이다.
꼭 지난 며칠, 그의 시선에 긴장하다가도 결국 편안하게 숨을 쉬게 되었을 때처럼.
그것이 꼭 그의 시선에 익숙해질 시간을 마련했던 것 같아서 의아해졌다.
그는 정말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왜, 그렇게 웃어요?”
당신은 내게는 웃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무엇이 당신을 그렇게 바꾸어 놓았을까.
두 달의 시간?
그 두 달 동안 로제리엘을 사랑하다가 갑자기 나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그 소리를 한 것일까?
아니면 내가, 내가 생각한 것처럼 사실 청혼의 상대조차 로제가 아니라…….
“처음부터.”
나는 화들짝 놀랐다.
그가 꼭 내 속마음과 의문을 읽은 것처럼 말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당신이었습니다.”
나는 당혹스러워 눈을 내렸다.
하지만 그는 내 혼란의 뿌리조차 남기지 않을 기세였다.
단호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힐, 저는 언제나 당신뿐이었어요. 처음부터 당신이었습니다. 당신 외엔 다른 누구도 마음에 담은 적도, 바라본 적도 없으니까.”
“…….”
“보는 순간부터 당신에 관한 생각을 끊을 수가 없었어요. 그 어린 시절부터 그러했습니다.”
시선을 피한 건 끓는 것 같은 그의 음색이 부담스러웠던 것도 있으나, 잔뜩 힘을 줘 구부러진 손가락 끝을 툭툭 두드리는 그의 손길 때문이었다.
그러지 말라고.
손톱 자국이 생기지 않도록 힘주지 말라고 그리 말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마다 터질 것 같은 내 심장 때문이었다.
붉게 달아오르며 열이 오르는 얼굴 때문이었고.
“그…….”
상처 입어 기쁨을 몰랐던 심장이 그 한마디에 환희로 물들어가는 것이 비참할 정도로 달콤했기 때문이었다.
고작 말 한마디, 상대의 말 한마디에 정처 없이 흔들린다.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 말이 사실이길 바라는 내 미련과 짝사랑을.
나는 여전히 가브리엘을 사랑하고, 의식하고, 바라보고 있었다.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저는.”
“네, 힐. 말하세요.”
그가 또 그런 표정을 했다.
천천히 말해도 떠나지 않겠다는 그런 표정.
당신의 말을 내가 경청하고 있다는 얼굴.
‘낯설어.’
예전 다가왔다가 제멋대로 떠난 사람들의 얼굴은 항상 같았다.
전생에도, 힐링턴의 힐데아였을 때도.
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감정을 다잡기도 전에 내 무표정에 상처 입고, 알아서 판단하고 멀어지던 사람들과는 다른 얼굴.
‘하지만…….’
꼭 우리 로제 같아서.
다정히 바라보는 엘라, 귀엽게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루아, 수줍게 응시하는 영주님, 그 밖의 모든…….
‘저 다정한 시선이, 좋아.’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사람들과 같은 시선이라서.
나는 홀린 듯 말했다.
“난 두려웠어요, 가브리엘.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마을에서의 당신을 지켜봤던 것은 무서워서였어요. 비겁하게 모른 척했어요.”
가브리엘은 재촉하지 않았다.
나는 말을 이어나갔다.
“로제나 가족들 부탁으로만 데리러 온 것이라고만 생각했어요. 당신이 술에 취해 내뱉었던 그 많은 말들은 다 거짓이고, 착각이라, 그렇게 눈과 귀를 닫았어요. 하지만.”
입술이 잘근 깨물렸다.
“하지만 아닌 거야. 맞죠?”
“힐.”
“당신 정말 로제와 결혼도, 약혼도 하지 않았어요?”
손을 두드리던 손길이 멈췄다.
그리고 가브리엘은 내가 움찔거리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 손등에 제 손을 얹었다.
꼭 예전에 우리가 테라스에서 손을 잡았을 때처럼. 단지 위치가 달랐을 뿐이었다.
“네, 압니다. 믿기 힘드시리라는 것을.”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급할 필요 없어요, 힐.”
휙 마주친 시선이 녹아내릴 듯하여 다시 고개가 푹 맞닿은 손으로 향했다.
그는 여전히 내 손을 놓지 않았고, 내 온 감각은 그곳에 집중되어 있었다.
머리 위로 부드러운 말이 쏟아졌다.
“사실은 그런 게 아니었다고 말해봐야 보아 온 것이 있고, 느껴온 것이 있는데 갑자기 마음이 변할 리가 없지요. 아는 것과 다르다고 해서 당신을 탓하고, 책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뱉는 말들은 툭, 툭 단단히 웅크리고 닫힌 마음을 두드렸다.
“저라도 그랬을 겁니다.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갑자기 안심될 리도 없습니다. 알아요. 그러니…… 저는 당신이 하루아침에 바뀌길, 당신의 상처가 없던 것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잡은 손은 무척 따뜻했다.
“다만 당신이 아니었다는 그 오해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그래서 당신이 마음 조각을 다른 놈에게 주는 꼴은 결코 볼 수가 없어서. 제 인내심이 이것밖에 되지 않아서.”
아파할 필요 없다고, 겁먹어도 된다고, 하지만 도망치지는 말라는 듯 잡아 왔다.
“지금은 그것만 알아주십시오, 힐. 내가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누구였는지, 우선 그것만 삼키세요.”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처음부터, 나였다고.’
예상하고 의심하고, 여기까지 오게 한 말을 결국 그의 입에서 들었다.
“하지만…….”
나는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과거, 그와 만났던 일부터 지금까지의 일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내 착각이었다고?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고?
그는 말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나를.
잠깐만.
“잠깐만요, 가브리엘. 우리의 처음부터라면…….”
착각일까?
가브리엘이 뭔가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 내 시선을 처음으로 피하더니 헛기침했다.
“흠.”
“가브리엘?”
“이제 도둑질은 하지 않습니다.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
그리고 그렇게 중얼거리는 것이다.
잔뜩 삐친 어린아이가 투덜거리며 투정을 부리듯. 그걸 꼭 지금 짚어야 해? 라고 말하는 것처럼.
“정말입니다. 제가 뭐가 아쉬워 도둑질을 하겠습니까. 그때는, 상황이 조금.”
나도 모르게 입가에 힘이 풀린 것도 그 순간이었다.
자연스럽게 웃는 법을 깨친 몸이 드디어 제 역할을 하듯, 어쩐지 귀여운 가브리엘의 반응에 웃음이 터졌다.
풋.
하지만 의식하지 못했다.
분위기가 부드럽게 풀리고 있었다는 것도, 내가 웃는 것을 가브리엘이 집요하게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도.
“첫 만남이 좋지 않았던 것은 알고 있지만, 당신이 절 구한 생명의 은인이라는 건 확실히 기억합니다.”
“풋, 생명의 은인…….”
그래, 맞다. 그의 멈췄던 심장을 내가 뛰게 했다.
자세한 방법이나 과정을 기억하진 못하지만 내가 개구멍을 통해 밖으로 밀어내던 순간에는 정신을 차렸던 것일 수도 있지.
그 이후의 과정들은 그래서 원작과 달랐던 것일까? 내가 가브리엘을 만나고, 그를 살려서?
“그때 첫눈에 반했습니다.”
나는 멍해졌다.
뭐라고?
“그래서 찾아갔죠.”
아, 부끄러웠는데도 더 듣고 싶었다.
그의 설명이, 그의 변명 같은 말들이. 쩍 갈라졌던 상처를 치료하는 연고 같아서.
“말도 안 돼요.”
“왜 안 됩니까?”
“그건 너무 어릴 때고.”
“네, 기억납니다. 당신께선 그때 저를 귀찮아하셨죠.”
내가?
“그것까진 아닌 것 같은데.”
“매번 피하셔서 로제리엘 영애를 통해 어디 계신지 알아야 했으니까요.”
내가?
아니, 로제가 뭘 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