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107화 (107/155)

107화. 당신에게 닿기까지 (2)

“매번 도망치셨습니다. 아주 거추장스러운 상대를 보듯이. 그래서 매번 상처를 입었다가도 당신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곤 했습니다.”

“…….”

나는 눈을 크게 떴다가 어색하게 눈을 돌렸다.

그야 당신이 맨날 날 노려보는 줄 알았지.

내가 너무 싫어서.

그게 아니었단 말이야……?

“하지만 그 이후로도 좋진 않았잖아요. 제가 나무에서 당신을 깔아뭉갤 뻔했었고요.”

그땐 정말 끔찍했다.

하지만 같은 상황을 그는 다르게 받아들였던 모양이었다.

이렇게 말했으니까.

“아, 그때의 놀란 표정은 아직도 기억합니다. 토끼같이 귀여우셨죠.”

“…….”

얼굴에 열이 올랐다.

미쳤나 봐. 무슨 토끼 타령이야.

가브리엘 당신, 원래 이런 타입이었어?

나는 떨리는 손을 들킬까 봐 잡힌 손을 천천히 빼냈다. 그리고 찻잔을 두 손으로 꼭 잡았다.

“토, 토끼 같았을 리가 없잖아요. 그 뒤에도 우리는 최악이었는걸요. 호수에 빠졌던 거 기억나지 않아요?”

“아. 그때.”

가브리엘은 잔잔히 웃었다.

나는 홀린 듯이 그 미소를 보다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놓으려 했던 감정이 더욱 두꺼운 밧줄이 되어 내 심장을 옭매는 것 같다.

고백은 그가 하고 있는데, 왜, 내가 더 반하는 것 같지.

“기억납니다. 헤엄쳐 당신을 데리고 나왔죠. 팔 힘이 튼튼했다면 같이 넘어지지 않고 구할 수 있었을 텐데. 그때는 아쉽게 생각합니다.”

죽을 뻔했던 일을 너무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고 있는 거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나를 최악으로 여기고, 나도 그를 더욱 꺼리게 되었는데.

같은 상황을 이렇게다 다르게 보고 있었다니, 기분이 점점 이상해졌다.

“그때 일로 로제리엘 영애가 저를 쥐잡듯 잡았습니다. 언니 사랑이 얼마나 지극한지, 아주 짜증…….”

“네?”

“아닙니다. 지금 로제 영애에 대해 변명까지 해주고 싶진 않아서.”

이제는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가브리엘이 보였다.

“로제 영애로 착각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분명 구토하는 시늉을 할 겁니다. 당신의 동생께선 저와 약혼 이야기 나오기만 해도 역겹다고 하더군요. 저도 마찬가지이고.”

역, 겹…….

‘그러고 보니.’

어쩐지 유독 로제가 어디 가느냐고 묻거나 했을 때, 그다음 날 가브리엘을 만난 일이 많았던 것이 떠올랐다.

가브리엘이 어떠냐고 자꾸 물어본 적도 있었고.

나는 그게 첫사랑에 빠진 동생이 나도 가브리엘에게 마음이 있을까 걱정하는 거라 생각했었는데…….

오웩, 하고 헛구역질했던 로제의 소리를 나도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정말.’

정말 아니라고.

이상하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어느새 내 눈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힐!”

“아.”

다급한 듯 손을 뻗는 가브리엘의 모습도.

그는 정말 초조하고, 놀란 듯 보였다.

“그, 그게 왜 눈물이…….”

나는 어정쩡하게 손을 올려 뺨을 매만졌다.

홍수라도 난 것 같다.

정말 주체할 수 없게 떨어지는 눈물이 얼마나 많은지, 눈물샘이 고장이라도 난 것 같았다.

“울지, 울지 마세요.”

“미안해요. 울려고 한 게 아닌데.”

“사과도 하지 마세요.”

가브리엘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예전에도 손을 떨었던 것이구나. 이런 마음으로, 저런 표정으로.

그의 얼굴은 예전의 내 앞에서 딱딱해지던 것과 비슷했다.

그러나 예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 슬며시 마음을 파고들었다.

흔들리는 눈은 당혹스러움과 걱정이 한가득 담겨 있었고, 힘을 준 턱관절에는 애틋함이, 찌푸려지는 미간에는 슬픔이 담겨 있었다.

나를 경멸하는 게 아니야.

혐오하는 것도, 아니야.

“믿, 기지가 않아요. 그래서 그래요. 당신 때문에 우는 게 아니라.”

“무엇이 말입니까.”

당신과 이렇게 대화하고 있는 현실이. 당신이 나를, 내가 당신을, 우리가 서로 바라보고 있다고 말하는 당신이.

나는 언제나 외톨이였는데.

“당신이 너무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들을 하니까.”

“…….”

“거짓말 같잖아요. 이 상황이, 너무. 어떻게 갑자기 이럴 수 있을까 싶고, 으, 그래서.”

점점 들썩이는 어깨에 당혹스러웠다.

“아, 정말, 보지 마요, 가브리엘. 금방 흐으, 금방 그칠.”

꼭 아이가 울음을 참지 못하는 것처럼 이상한 소리가 났기 때문에.

머리 위에서 작은 한숨이 났다. 그가 일어나 내 곁으로 다가왔다.

“누구에게 가시려고요.”

“흐, 으?”

“당신의 이런 모습을 누구에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나를 품에 끌어당겼다.

“차라리 제 앞에서 우십시오.”

“가, 브…….”

그의 품은 부드럽거나 포근하진 않았지만, 단단하고 넓어 나를 놓지 않을 것처럼 단호했다.

“제 부관이 사람이 흘리는 눈물은 나쁜 것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약해지는 것도, 쓰러지는 것도 아니라고.”

뭐야. 그렇게 등을 두드리면, 더 울음이 나오잖아.

“우세요.”

훌쩍거리는 내 소리를 달래려는 것인지 그가 말을 이어나갔다.

등을 여전히 토닥토닥 두드리는 채로.

“처음에는 당신의 자취를 미친 듯이 찾아 헤맸습니다. 미친 사람처럼. 그러다 좌절하고, 절망하고.”

그게 내가 떠났던 시간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았다.

“어느 순간 깨달았습니다. 당신을, 당신을 사랑한다고 했는데.”

사랑.

“정작 당신에 대해 아는 것은 없더군요. 어디서 무엇을 했고, 누구를 만나고, 어떤 생각을 했고……. 당신이 어떤 것들에 상처받아왔었는지.”

가브리엘의 목소리는 감미로웠다. 달래듯, 조곤히 말하는 음성은 더욱 낮고 부드러웠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상처 주었었는지도 몰랐습니다.”

그의 품이 멀어졌다.

어느새 몸을 구부리고, 꼭 기사가 충성을 맹세하듯 무릎을 꿇은 그가 내 뺨을 매만졌다.

언제 꺼냈는지 모를 손수건이 부드럽게 피부를 훔쳤다.

“당신께서는 제 반응을 무서워하셨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그 다정한 말에 다시금 눈물이 울컥 쏟아졌다.

사람의 반응이 무섭다고, 눈을 마주치는 것이, 내 스스로의 얼굴 때문에 거울조차 보지 못하겠다고.

“그, 건.”

“노력하겠습니다.”

“…….”

“당신이 믿을 수 있도록.”

“가브, 리엘.”

“제 감정을 모두 털어 보여드릴 겁니다.”

그런 나약한 말들을 아무에게도 솔직히 토로하지 못했다.

다정하게 손을 내미는 로제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곳 생애의 일이 아니라 이전 생에 다쳤던 마음들을 누가 알 수 있겠는가.

“믿을 수밖에 없게 되시도록.”

호화롭게 생활하며 먹을 것, 입을 것 무엇 하나 부족하게 살지 않았던 힐링턴 공작가의 첫째 영애의 결핍을 누가.

“그리하겠습니다. 더는 당신이 상처받지 않도록.”

대체 누가.

“눈 돌리지 않도록.”

“무슨 말을…….”

“압니다. 숨기지 않으셔도.”

이해받으리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그래서 말하지도 않았다. 버티고 내가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 표정, 제 태도, 제 말투. 당신에게 대하던 모든 것들. 긴장하고, 두렵고, 그런데도 당신이 너무 좋아서 굳어버리던 내 순간들이 당신에겐 칼이 되어 박혔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았습니다.”

겁이 덜컥 들었다.

“몇 번을 답습하고, 되새기고, 돌아보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제 어수룩한 반응을, 당신이 너무 좋아 숨기지 못하고 굳던 반응을, 당신께선 보지 못했다는 것을.”

아아. 이게 다 사라지는 꿈이면 어떡하지?

꿈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좋은 말들을 해줄 리가 없잖아.

“당신이 너무 좋아 애송이처럼 굴었는데.”

검을 잡아 굳은살이 박힌 손가락 끝은 마냥 부드럽진 않았다.

그러니 몇 번이고, 간지러울 정도로 부드럽게 내 뺨을 훔쳤다.

“당신이 이런 표정을 짓게 하려는 건 아니었는데.”

입술이 덜덜 떨렸다.

잔뜩 허물어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한심, 하다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나는 귀족 영애예요. 아버지도, 사랑스러운 동생도, 주변 모두도 내게 위해를 가한 적도, 말과 행동 모두 폭력을 저지른 적도 없어요. 온갖 교육과 호화스러운 생활을…….”

“그만.”

그가 내 말을 멈추게 했다.

“아무도.”

턱 끝으로 떨어지는 눈물을 엄지로 훔쳤다.

“아무도 사람 속마음은 모르는 겁니다. 세상에서 가장 오만하게 구는 저도, 당신을 생각하며 전쟁터에서의 괴로움을 참았습니다.”

눈물마저 멈추는 말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경직된 표정이었지만, 나는 보았다.

그의 서서히 붉어지는 귓불을.

‘아.’

그리고 그것이 내게 너무나 익숙하다는 사실을.

‘몇 번이나 본 모습이야.’

예전 행동이 어수룩했다고 하는 가브리엘.

숨기지 못했다고 하는 가브리엘.

내 눈앞에 있었던 그는 여전했다. 나만 몰랐을 뿐.

붉은 귓불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사람을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는 게 누구에게 기쁨이었을까. 하지만 사령관은 괴로워하고 나약해지면 안 됩니다. 강인한 공작이길 바라는 자들에게 그 속마음은 나약하고 겁쟁이 같은 모습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건, 아니에요. 누가 감히-”

“네. 그렇게. 당신께선 그렇게 위로해주셨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담담하게, 저도 사람이라고 하면서.”

“…….”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우리가 나눴던 편지를 말하고 있었다.

내가 설마, 당신이 직접 보낸 것은 아닐 거야. 그렇게 생각했던 편지들.

눈물이 다시 뚝 떨어졌다.

내가 마음에 품었던 그 편지들이 당신에게도 위로였구나. 애정이었구나. 혼자, 혼자 보냈던 것이 아니구나.

“당신과 내가 어떻게 같, 아요.”

“부자로 살아온 귀족이라 하여 마음의 상처가 하나도 없어야 한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제게 데려오십시오.”

“왜, 요?”

“죽여버리게.”

응?

“……네?”

지금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눈물이 쏙 들어가는 서늘한 목소리에 눈을 깜빡이는데, 그가 그 표정을 숨기려는 것처럼 아예 몸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 일어났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이제는 내가 그를 올려다보아야 했다.

손가락이 헝클어진 내 앞머리카락에 닿았다. 눈을 질끈 감는데, 촉각은 선명해졌다.

머리카락을 사르륵 간지럽히는 감각이 무척이나 간지러웠다.

으, 도망가고 싶어. 아니, 있고 싶어. 아니, 내가 뭐라고 하는 거야.

“지금은 하나만 알아주시면 됩니다.”

가브리엘의 백금발이 오늘따라 유독, 아름답게 빛났다.

“제가 청혼한 것은 당신이고. 그리고 저는 아직.”

선명한 보라색 눈동자는 제비꽃의 색깔이라는 것도.

“당신의 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