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108화 (108/155)

108화. 당신에게 닿기까지 (3)

처음 루다나 마을에 와서 가브리엘을 가장 놀라게 만든 것은 하나였다.

힐데아가 꽃집을 열고 사람들을 대하고 있다는 것도, 그녀가 평민 힐로 이 마을에서 치유사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도, 그녀가 용병까지 고용해서 이 먼 거리까지 도망치는 걸 강행했다는 것도 아니었다.

바로.

환히 웃고 있는 힐데아였다.

“풋!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엘라.”

그 명랑한 목소리가 누구의 것이었는지,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다.

“아, 왜. 내 말이 거짓말인 것 같아? 정말이라니까. 우리 루다나 마을의 초대 촌장 할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했단다. 후후.”

차마 바로 들이닥쳐 그녀의 앞에 나타나지 못했었던 이유.

어깨까지 흔들면서 웃고 있는 환한 미소.

휘어지는 눈가와 환히 벌어지는 입술.

너무나 편안한 힐데아.

‘아.’

한 번도, 정말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이었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오만하고 냉정하게 주변을 훑어보던 공작 영애는 없었다.

힐데아는 사랑하고 아끼는 로제리엘의 앞에서도 붓꽃처럼 고요하고 조용히 웃었었다.

그랬는데…….

‘어째서 그렇게 웃습니까.’

참담한 상실감과 아픔이 천천히 사그라들고 먹먹하고 안쓰러운 슬픔만이 남았다.

‘왜 그렇게 예쁘게, 웃어요.’

저렇게.

‘내가 없어서 편한 사람처럼.’

저렇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왜 우리 중 아무도 없는 곳에서 그렇게 웃어.’

그래서 가브리엘은 바로 다가가지 못하고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자신이 없었다.

자신이 나타나면 분명 저 아름답고 환한 미소가 와장창 깨져버릴 것이 분명하기에.

그것을 보면 겨우 생긴 그녀도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얄팍한 믿음이 또다시 무너질 것 같아서.

좌절과 절망으로.

툭, 툭 치며 지나가는 다른 사람들을 보지도 못하고 가브리엘은 멍하니 멀어지는 힐데아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제 뭘 해야 하지?

그녀를 뒤따라도 되는 건가?

하지만…… 저 미소를 깨도 괜찮은 건가?

내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

그녀가 나에 대한 마음을 지웠다면?

이제 와서 그것을 꺼내도 되나?

가브리엘은 낯선 자를 경계하듯 바라보는 사람들 속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이곳에 오게 된 로제리엘의 목소리를 떠올리면서.

‘언니의 흔적을 알려주는 대신 당신이 알아야 할 것, 그리고 나와 약속해야 할 것이 있어요.’

‘끄응, 나는 직접 말할 수가 없는데……. 저기요, 전쟁 영웅님. 제발 저기 들어가서 서랍에 담긴 편지 좀 보면 안 될까요? 서랍 하나 뜯는 거 쉽잖아요.’

‘그것을 보고도 땅 파면 당신은 정말 세상에서 제일 멍청한 바보인 것이고요.’

‘자아, 가브리엘. 말이 없네. 충격이 컸나 봐요. 그럼 이제 언니 찾으러 갈 거예요? 아니면 아까처럼 다 포기하고 술만 퍼마실 거예요?’

‘거 봐. 알았어요, 그럼 언니의 흔적을 알려주는 대가로 하나만 약속해요. 아, 내기하는 거 아니에요. 나도 이번 일로 얼마나 반성 많이 했는데요. 부탁이에요. 당신이 그곳에 도착하면…….’

‘언니가 이곳으로 돌아오겠다고 말하게 할 것.’

로제의 말대로 서랍에 들어 있던 그 편지들.

순간 멍해졌다.

버리지 않고 모아놓은, 그가 그러했듯 여러 번 읽어서 해져버린 그 편지들을 보는 순간 잃어버렸던 확신이 치솟았다.

기쁨과 고통스러운 환희가 치솟았다.

그녀도 같아. 나와 같다!

일기장에는 그에 대한 언급도 없었지만, 힐데아는 분명 자신과 같은 마음이었다.

그렇다면 왜? 왜 엇갈렸을까.

언제부터 착각했던 것일까.

설마 처음부터 제 감정은 전해지지도 않았던 것일까?

편지 이후 입을 다물어버린 로제리엘에게 매달리지 않고, 그는 스스로 되돌아봤다.

곱씹으며 일기장에 적혀 있던 내용들을 토대로 유추했다.

힐데아는 마음의 상처가 깊은 사람이었다. 타인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보지 못할 만큼.

그렇다면 모두가 알 만큼 어수룩했던 자신의 반응도 그녀만은 다르게 받아들였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전혀 보지 못했던가.

‘이 꽃.’

애원처럼 매달렸던 그 화분이 힐데아가 두고 간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로제리엘의 정보로만은 부족했기 때문에 쥐새끼 한 마리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암시장을 뒤졌고, 치료사 힐과의 연관성을 찾았다.

모든 것을 확인하자마자 그 화분의 꽃을 책갈피처럼 꽂아 품에 넣고 출발했다.

어떤 정신으로 이곳까지 달려왔을지 모를 정도로 미친놈처럼.

그러나 그 미소를 보는 순간, 자신감이 사라졌다.

아마, 그 뒤에 좌절하여 술을 먹고 쳐들어가지 않았다면 분명 가브리엘은 한참이나 그녀의 뒷모습이나 보며 끙끙댔을 것이었다.

힐데아를 괴롭히는 애송이 후작을 짓밟으며, 영주라는 놈의 다정한 고백을 듣고 웃는 힐데아나 보게 되었겠지…….

한심하게도.

*

그렇게 현재.

“흐윽, 흑.”

제 앞에서 울고 있는 힐데아 폰 힐링턴을 마주한 가브리엘은 생각했다.

축축하게 젖어간 붉은색 눈동자가 지독하게 아름답다고.

어떤 감미로운 예술품을 앞에 두고도 흔들리지 않는 남자는 힐데아의 시선 한꺼번에 가루처럼 녹아내렸다.

눈앞의 여인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파도처럼 번민하고 있는 가브리엘, 자신의 속마음을.

그가 얼마나 한가득 쏟아내고 싶은 감정을 참고 있는지.

‘당장이라도 당신을 품 안에 끌어안고 입 맞추고 싶어. 사랑한다고, 당신만을 사랑한다고 계속 속삭이고 싶지.’

가브리엘은 눈이 시린 듯 훌쩍거리고 있는 사랑스러운 사람을 눈에 담았다.

닿고 싶었다. 더욱 친근하게 손을 내밀고 싶었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입술로 마시고, 머리카락에 경애를 담아 슬픔과 괴로움이 아니라 기쁨의 탄식이 흐르기를 바랐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쓸고 자신만 보게 하고 싶었다.

치졸한 독점욕이 치솟아 머리를 들이미는 느낌이다.

하지만 그렇게 갈급하게 다가선다면 겨우 한걸음 내디딘 힐데아는 다시금 뒤로 물러나게 될 것이다.

그건 안 될 말.

‘나는 오로지 당신으로 인해 사는데.’

흘러가듯 말했으나 진실이었다. 가브리엘은 눈앞의 힐데아로 인해 살고, 죽고, 웃고, 울었다.

그녀가 그의 심장이었다.

그의 모든 감정은 힐데아를 만나면서부터 생기를 지니게 되었다.

그 모든 뿌리가 그녀였다.

“힐데아.”

이전과는 다르다.

“……네, 가브리엘.”

“이제 눈물은 좀 그치셨습니까?”

“놀, 리지 말아요.”

“이런. 전 웃었습니다만.”

“그게 놀리는, 거잖아요.”

부르는 목소리에 힐데아의 눈이 그를 응시했다.

피하지 않고 서로 마주 보는 시선이란 너무 사랑스러워서, 그녀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심장이 멈추기라도 할 것 같았다.

가브리엘은 벅차오르는 기쁨을 삼키고 숨기며 웃었다.

되도록 이전과는 달리 그녀의 앞에 여유롭고 부드럽게 보이기를 간절히 바라며.

“힐데아, 제게 주신 이전의 거절은 받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도망치신 것, 없던 일로 할 겁니다.”

“어, 네?”

당신은 내 청혼을 거절한 적이 없는 거야.

알지도 못했으니, 당사자에게도 닿지 않았던 청혼은 무효다.

그렇게 우기는 것을 알았을까?

“하지만 가브리엘, 그건…….”

피하지 않고 서로를 마주 보는 시선이라는 것이 이토록이나 달콤한 줄 알았다면 더욱 용기를 냈을 것을.

좋아하는 것이 궁금했다면 힐데아에게 직접 물었어야 했다.

그녀의 차갑다고 생각한 시선에 상처 입고 물러설 것이 아니라, 유심히 살피고 또 살폈어야 했다.

“부디, 그렇다고 말해주세요.”

손을 잡고 애처롭게 속삭이니 힐데아의 눈이 흔들렸다.

“이제 다시 시작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없던 일로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요?”

힐데아의 눈에는 익숙한 걱정이 떠올랐다.

아마도 저 똑똑한 머릿속에는 청혼의 대상이 자신이었을 때 벌어졌을 뒷일에 대한 걱정이 가득할 것이다.

흔들리는 눈은 분명 남겨진 힐링턴, 그리고 귀족 사교계의 일들에 대한 걱정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는 모른 척하며 밀어붙였다.

벌써부터 지긋지긋하리만치 우애 깊은 여동생에게 힐데아의 애정과 걱정을 나누고 싶지 않았다.

지금만큼은 내게 집중해 줘.

피어나는 독점욕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으며, 가브리엘은 힐데아의 시선을 옭아맸다.

지금은 나만.

나만 생각하십시오.

“네. 당신과 제가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 얼마든지.”

멍한 표정을 하고 있던 힐데아가 눈을 깜빡였다. 맺힌 눈물이 마지막이라는 듯 후드득 떨어졌다.

그것이 꼭 흰 진주 같았다. 자신이 얼마나 어여쁜지 모르는 여자는 몽롱한 목소리로 말했다.

“몰랐는데 가브리엘, 당신 좀 뻔뻔한 것 같아요…….”

당신은 이렇게 순한 사람이었는데, 그걸 나는 몰랐고.

“이런, 힐데아.”

가브리엘은 눈을 휘었다.

“당신을 제외한 모두가 절 볼 때마다 하는 말입니다. 뻔뻔한 새끼, 냉혹한 새끼, 귀신도 무서워 도망할 놈. 그 밖에 다른 것들도 많습니다.”

“저는 그, 그렇게까지 말한 건 아니었는데.”

하, 헛웃음이 터졌다.

저렇게 흔들리는 눈빛을 보고 왜 차고 냉정하다고 생각했을까. 왜 자신을 꺼린다고만 생각했을까.

그게 아니었는데, 어떻게 저 모습을 보고도 몰랐지. 과거의 자신은 참으로 병신 같았다.

“네, 압니다.”

분하게도 로제리엘의 말이 아니었다면 여전히 땅을 파고 있었을 것을 생각하니 이가 악물렸다.

로제리엘.

그 정체불명의,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의 여동생.

사실 처음부터 얽히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지 모르지만 여태까지 참 많이 애쓰고 도와준 것도 사실인 동맹.

그러나 가끔은 이게 도와주는 것인지, 아니면 언니에 대한 사랑이 지극해서 가까이 가지 못하게 차단하는 것인지 헷갈릴 때가 있었다.

‘이번만큼은 확실히.’

도움이 됐지만.

“힐데아.”

“네.”

떨리는 음성을 감미롭게 가슴에 새기며, 그는 웃었다.

“당신께선 제게 설레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지금처럼.”

“아.”

빨갛게 물든 귓가에 부디 진득하게 닿기를 소망하며, 가브리엘은 속삭였다.

“그거면 돼, 힐데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