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그가 구애하는 방식 (2)
가브리엘은 내게 어떤 압박도,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아끼고 사랑한 동생, 로제리엘.
그 아이가 상처받지 않게끔 선택한 길이 도리어 그 아이를 상처 준 길일 수도 있겠다 싶었으니까.
그러면서도 당장 돌아갈 용기는 들지 않았다.
가브리엘과 내 사이가 오해였다고 치자.
하지만, 하지만 나와 가족들은?
나는 가브리엘과의 일만으로 도주를 결정했던 것은 아니었다.
켜켜이 쌓인 고통과 아픔은 무척이나 컸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게 되돌아가 가족들을 향해 웃어 보일 순 없었다.
특히, 루다나 마을에서의 온기와 행복을 느끼고 나서는 더더욱 그 외로운 곳으로 돌아가 다시금 버틸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때였다.
“지금은 제 생각만 해주셨으면 좋겠는데.”
“어, 네?”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계신 듯하여.”
헉.
“이를테면, 떼어내고 떼어내도 따라붙는 당신의 우애 깊은 여동생이라든가.”
저기, 당신.
독심술도 할 줄 알았어요?
“아니면.”
그 순간, 가브리엘이 그렇게 말하며 내 속눈썹을 훑었다.
나는 눈을 찡그렸다가, 황당함에 입을 벌렸다. 방금 뭐야?
“아니, 속눈썹을 왜…….”
“이번에도 우셨나 확인을 좀.”
눈썹이 꿈틀거렸다.
누가 들으면 내가 매번 우는 사람인 줄 알겠지 않은가?
내가 얼마나 이를 갈며 우아하고 도도한 귀족 영애가 되었는데!
“뭐, 라고요?”
“자주 우셨으니까.”
능청스러운 얼굴에 헛웃음이 터졌다.
“저, 울보 아니에요.”
“별로 믿음이 가는 말씀은 아닙니다만.”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던 그가 상체를 내 쪽으로 당긴 것도 그 순간이었다.
“그렇게 우기시니, 확인해야겠습니다.”
“…….”
거리가 훅 가까워지고, 향수 냄새가 코끝에 풍겼다.
심장이 쿵, 쿵 뛰었다.
“잠깐만요. 너무, 가까워요.”
크게 말한 것 같은데 정작 나온 목소리는 왜 이렇게 작을까.
꼭 내가 그에게 밀어라도 속삭이는 것 같았다.
“네, 가깝습니다.”
그런데 그도 나를 따라 나직하게 속삭이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당신의 얼굴이 잘 보입니다. 그래서 좋아요.”
그런 뜻이 아니잖아.
“저는 물러서는 게 좋겠다고, 말씀드린 건데요…….”
“정말 눈물은 없군요.”
눈물은커녕 모공까지 보일 거리였다.
황급히 물러나니 웃는 기척이 나서 부아가 치밀었다.
난 이렇게 여유가 없는데, 자기 혼자만 여유로운 모습이 퍽 얄미웠기 때문이다.
난 정색하며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가브리엘. 우리 어느 정도 예의는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너무 스스럼없는 건 안 돼요. 이를테면 이렇게 가까운 거리라든가, 스킨십이라든가요.”
“왜입니까?”
“그야! 우리는 아직 사귀는 사이도 아닌…….”
“아직?”
아, 젠장.
“아직입니까?”
“…….”
지금 일부러 그러는 거지.
‘얄미워.’
빙긋 웃으며 내 말실수를 꼬집는 그를 보는데, 정말 입술이라도 깨물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 나를 놀리기로 작정한 것 같은 가브리엘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우리가 아직 사귀는 사이는 아니지만.”
휘어지는 눈이 황홀할 만큼 예뻐서 넋이 나가버린 것은 정말 분통 터지는 일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가, 정말 너무 예쁘게 웃잖아…….
정신 못 차릴 만큼.
“우리는 정혼한 사이죠.”
힐링턴과 벨키우스.
그 정혼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 말에 슬그머니 열이 올랐다.
아아, 정말 더는 안 되겠다.
“가브리엘, 정말. 나 좀 그만 놀리면 안 돼요……?”
“제가 감히 그러겠습니까.”
정말 안 되겠어.
당장 저 입을 뭐라도 막지 않으면 심장 마비에 걸릴지도 몰라.
전생에 걸쳐 지금까지 제대로 된 연애 한번 해보지 않고 살아온 내겐 그의 꿀에 절인 말들이 너무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이것 봐, 얼굴이 또 뜨겁잖아.
이건 다 다정히 바라보는 저 눈빛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그렇구나. 우리 힐은 연애를 하면 저렇게 되는구나.”
……이건 누구 목소리지?
“…….”
“…….”
가브리엘과 나는 딱딱하게 굳어 서로를 응시했다.
우리 둘의 입이 열린 적은 없으니, 저건.
‘헉.’
삐걱거리는 고개를 돌리니 보이는 것은 여유롭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는 엘라였다.
“안녕, 친구야?”
방긋, 환한 미소가 유독 도드라졌다. 그러나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어, 어디까지 본 거야?
“그쪽도 그렇게 안 봤는데, 봉인 해제하니 닭털이 풀풀 날리네요. 대체 여태 어떻게 참았대?”
아아, 나는 왜 엘라가 들어오는 것도 몰랐을까.
나는 그렇다 치고 초인적인 능력을 지닌 가브리엘도 어떻게 몰랐을까.
사실 엘라가 숨겨진 이 세계의 최고 실력자……일 리는 없고.
멍한 우리 둘을 보며 엘라가 혀를 쯧쯧 찼다.
“저기요, 얼굴 빨개진 꽃집 주인 아가씨. 꽃 사러 왔다가 둘의 애정 행각에 기겁하며 도망간 사람이 사실 지금 세 명이나 되거든!”
저, 정말? 그렇게나?
그걸 몰랐다고, 내가?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다.
내 얼빠진 얼굴을 보며, 엘라가 짓궂게 웃었다.
“이제 마을에 소문 다 났겠다.”
“잘됐군요.”
그러나 당연하다는 듯 대꾸한 것은 내가 아니었다.
……가브리엘이었지.
엘라가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가브리엘을 보았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저 남자가 뭐라고 했지.
“뭐라고요?”
“그쪽 분, 엘라라고 하셨습니까.”
“그런데요……?”
깜짝 놀라 바라보았는데 아까의 다정한 미소와는 사뭇 다른, 입술을 비틀며 무섭게 웃은 남자가 엘라를 향해 도발했다.
“이왕 보셨으니, 힐과 제 관계에 대해 얼마든지 퍼뜨려주시길.”
“어머?”
잠시 멍해졌던 엘라가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우와, 이 분 좀 봐. 보통이 아니시네. 대체 누굴 견제하시려고요?”
“많지. 짜증날 정도로 말입니다.”
가브리엘이 불쾌한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유독 까칠해 보이는, 속된 말로 싸가지가 많이 부족해 보이는 그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특히 어깨가 넓은, 대범하게 고백까지 한 누가 있지 않습니까.”
“아니, 그분은 불쌍하게 차였는데, 그것조차 거슬린단 말이에요? 어머, 사람이 질투가 너무 심하면 질리기 마련인데요.”
“어떤 분께 예뻐 보이려 열심히 유혹하는 중이니 초치는 소리하지 마시죠.”
어쩐지 둘의 대화하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우리 로제가 생각나는 것은 착각일까.
멀리서 보았을 땐 항상 연인처럼 다정하고 로맨틱하게만 보였던 로제와 가브리엘이었다.
그런데 사실은 그들의 대화가 사실은 이런 분위기였을지도 몰랐겠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어쩐지 좀 비슷한 것 같아.’
왜냐하면 지금도 서로를 향해 웃고 있는 가브리엘과 엘라는 사이가 퍽 좋아 보였기 때문이다.
엘라가 코웃음을 쳤다.
“좋아요. 한쪽이 적극적이면 연애사업에는 호재겠죠. 그래도 장소를 가려서 애정 행각을 해주셨으면 하네요. 우리 힐의 체면을 위해서요!”
“쓸데없는 것에 관여하는 것까지 어떤 분을 많이 닮으셨군요. 혹시 이름이 로제라든가, 로즈라든가?”
“그게 누구람. 난 엘라라고 했을 텐데요?”
주고받는 대화는 살벌하기 그지없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래서였을까.
“풋!”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쪽을 돌아보는 둘을 눈치챘는데도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아. 어떡하지.
불현듯 우리 로제가 미친 듯이 보고 싶어졌다.
미안함으로, 그리고 그리움으로.
그러니까.
‘돌아가야겠구나.’
*
한참 화분들을 정리하고 있는 힐데아를 멀리 바라보며, 가브리엘은 급보로 전해온 편지를 열었다.
<황궁, 위험, 추적, 축언 도둑으로부터 살아남은 생존자 등장, 암시장의 힐>
보자마자 가브리엘은 미간을 찌푸렸다.
빌어먹을, 짜증나게도 뭐 하나 쉽게 넘길 만한 내용이 아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마침 지나가던 마을 사람과 웃으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힐데아를 보았다.
하. 저 자연스러운 미소가, 수도로 돌아가서도 지켜질 수 있을까?
가브리엘은 편지를 구겨 버린 후, 힐데아에게 다가갔다.
딱 봐도 이성적인 호감을 느끼고 말을 걸고 있던 마을 사내에게 눈을 부라리자, 시무룩해져서 물러나는 모습을 아주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그러고 보면 수도에서도 힐데아를 욕하면서도 그녀에게 이끌리는 쥐새끼들이 참으로 많았다.
아끼고 사랑하며 소중히 고백해도 모자란 사람에게.
힐데아에겐 자신 있게 말했지만, 가브리엘은 아직도 힐데아가 너무 소중해서 어찌 대해야 할지 모를 순간들이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가브리엘? 왜 그래요?”
당신을 쫓는 자들이 있답니다.
“가브리엘?”
어찌해야 할까.
다가오는 이들을 모두 죽여, 당신에게 이 평화를 선사할 수 있다면 그리할 텐데.
힐데아, 당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하지만 가브리엘은 알았다.
눈앞에 있는 여인은 절대 그런 것을 원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저 사람, 친한 사람입니까?”
“아아. 촌장님의 조카분이에요.”
“별것 아닌 사이군요.”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이제 가게 문을 닫으신 겁니까?”
당신이 이렇게, 계속 이렇게 아무것도 몰랐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당신이 어떤 상처도 없이 정말 행복하게 웃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를테면 당신 가족들이 얼마나 당신을 아끼는지, 그러면서도 그들이 얼마나 후회를 하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지.
“힐. 그럼 이후의 시간은?”
“딱히 정해진 것은 없는데…….”
힐데아 폰 힐링턴이 얼마나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인지.
하지만 당장은 그런 것들을 모두 미뤄 두었다.
저 평화를 깨고 싶지 않았다. 가브리엘은 불쑥 생각이 난 듯 물었다.
“제가 봐 둔 곳이 있는데, 함께 가시겠습니까?”
데이트합시다, 우리.
동그랗게 떠지는 눈치 참으로 예쁘다고, 가브리엘은 멍하니 생각했다.
*
“마음에 드십니까?”
붉게 물드는 하늘, 끝없이 펼쳐진 평원, 그리고 그 아래로 보이는 절벽과 바다에 가까운 긴 강.
마을의 마구간에서 빌린 말을 타고 함께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감탄사를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루다나 마을에서 이런 풍경을 볼 수 있는지는 또 처음 알았다. 정말 너무 예쁘잖아.
“네, 너무 예뻐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 같아 보이는 공간을 가브리엘은 어떻게 찾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풍경에 대한 감탄도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증발하듯 사라졌다.
‘어떡하지, 가브리엘?’
눈이 마주치면.
‘당신만 보여.’
놓아버리고 지워버렸다고 생각했던 상대에 대한 마음이 빗장이 풀린 것처럼 크게 부풀고 있었다.
바로 그때, 가브리엘이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