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노을 데이트 (1)
“둘만 있고 싶었습니다.”
응? 뭐라고?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언제나 당신이 궁금합니다.”
난 노을로 젖어 들어가는 그의 아름다운 백금발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었다.
“네?”
“알고 싶어졌습니다.”
노을을 등지고 선 남자가 나를 응시했다. 속눈썹이 어여뻤다.
그의 뺨이 붉은 것이 노을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것으로 인한 것인지 모르겠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알고 싶습니다.”
아.
그제야 그가 말하는 것이 나에 대한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진지한 눈빛을 보는데 손끝부터 피부를 타고 열기가 번져가는 느낌이 뜨거웠다.
나는 입술을 달싹였고, 그는 오로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속삭이듯 말했다.
“힐데아, 세상에서 당신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나는 그를 보면 가슴이 뛰고, 그가 옆에 있으면 모든 신경을 빼앗기는 것처럼 의식이 되었다.
그가 웃으면 행복해졌고, 불편한 표정을 지으면 땅이 무너지는 것 같기도 하였다.
그가 했던 말을 되뇌고, 그와 오갔던 편지의 문장들을 속으로 연신 굴리면서 마음에 담았다.
내 사랑은 어쩌면 무척이나 정적일 것이다.
나는 물끄러미 가브리엘이라는 사람을 보았다.
어쩌면 사랑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를 알거나, 다가가려 하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그는 말했다.
내가 궁금하다고.
그리고 나도, 나도 그가 궁금했다.
활자 속의 가브리엘이 아닌 현재의 그가.
“어떻게, 그런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어요?”
습윤했던 눈이 어리둥절함을 띄웠다.
그 변화가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지만, 모른 척 시선을 굴리며 귓바퀴를 더듬었다.
그렇잖아. 대체 어떻게 저런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해. 소설 주인공이라고 티내는 거야, 뭐야.
‘왜 부끄러움은 내 몫이야.’
나는 점점 빨라지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 순간, 행복감을 느끼는 내 심장이 가장 미친 것 같았기 때문에.
갑자기 엘라의 충고가 떠올랐다.
나는 그와 내가 하는 것이 연애의 시작인지, 아닌지 가늠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원시원한 성격의 엘라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연애를 해본 적이 없어, 엘라.’
무참하게도 전생부터 이어져 온 사실이었다.
‘그, 고백은 한 것 같은데 내가 대답을 못 했어. 연애도 아니고 청혼……이어서.’
그랬더니 엘라는 후,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냥 몸에 맡겨.’
‘응? 뭐라고?’
‘특별하고 어려운 거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냥 그 사람을 봐. 네가 좋으면 좋은 거고, 싫으면 싫은 거니까. 대화하고, 웃고, 좋아하면 손도 잡고, 싫으면 화도 내고!’
의식이 둥둥 떠다녔다. 좋아하면 손을 잡으라고.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가브리엘의 커다란 손을 응시했다.
저 손을 잡고 싶다.
그래, 잡고 싶어.
“왜 그러십니까?”
그도 어려웠다고, 서툴렀다고, 죄송하다고 그렇게 말했었다.
가족들과의 일은 아직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가브리엘과 나 사이에 있어서는…….
‘그만 잘못한 것 같진 않아.’
항상 도망쳤던 것 같다.
편지를 곡해하고, 모두가 다 알았다는 그의 부끄러운 표정을 오해하고, 하지만.
‘내가 충분히 오해할 만한 일들도 많았어.’
묻고 싶으면 묻자. 그렇게 생각했잖아.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가브리엘이 조용히 나를 기다려주고 있었다.
입을 열고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들으며 생각해왔던 것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왜, 로제에게만 그렇게 보석을 왕창 보냈어요?”
너무 골똘히 생각하는 바람에 말이 좀 격하게 튀어나간 것 같았지만.
나는 낭패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고, 가브리엘의 표정은 한층 어리둥절해졌다.
아, 1초만 되돌릴 수 있으면 좋겠다. 목을 타고 열이 올랐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은 내 특기였다.
무표정하게 다시 물었다.
“편지 보낼 때, 당신이 내게는 화분을 보내고 로제에게는 값비싼 보석과 두꺼운 편지를 보냈잖아요.”
“아.”
“그게 내 오해의 시발점이었을 거예요. ……아마도.”
생각하니 점점 그때의 느낌이 발을 타고 올라왔다. 주먹도 와락 쥐었다.
나를 좋아한다고, 눈에 담았다고 하는 남자의 행동도 모호하기 이를 데 없었잖아.
이건 따져야겠어. 아니, 답을 들어야겠어.
눈에 힘을 주자 가브리엘이 어색하게 웃는 모습이 보였다.
“그건.”
“그건?”
그는 언제 당당했었냐는 듯,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나빴습니다.”
“그래요. 섭섭, 했어요.”
나는 내뱉고 나서 아, 했다.
누군가에게 이런 부정적인 말을 내뱉는 것이 처음이다 싶어서.
아니, 투정이라고 해야 할까?
“네, 제가 나빴습니다.”
“모두가…… 그래서, 가브리엘 당신과 로제가 약혼할 거라고 했어요.”
물론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증거가 눈앞에 들이밀어진 느낌이었다.
로제에게 잘해주는 가브리엘. 원래의 내게는 당연한 사실이었다.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내가 편지를 보내는 그 오랜 세월, 천천히 그를 마음에 담기 전까지는.
어쩌면, 그 파릇파릇한 약초들과 화분들이 마음에 스민 것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따질 건 따져야지.
“당신을 추궁하는 것이 아니라, 이유를 듣고 싶은 거예요.”
“그…….”
응? 나는 그가 지레 찔려 어쩔 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자세히 보니 그게 아니었다.
예전이었다면 그가 저런 반응을 보였을 때 바로 상처받지 않기 위해 시선을 돌리거나 물러났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기 싫었다.
그런 순간 순간들이 쌓여 그가 나를, 내가 그를 오해했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손바닥에는 식은땀이 찼지만 가만히 보고 있으니 보였다.
그는 당황하고, 부끄럽고, 어쩐지 수치스러워하는 것도 같았다.
가브리엘이 고개를 들었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뺨이 빨갰다.
무척, 귀엽게.
“변, 명처럼 들리시겠지만.”
손가락이 열심히 꼬무락거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진지하게 생각했다.
객관적으로 무시무시하게 잘생긴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저렇게 다 큰 남자를 귀엽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 사랑의 콩깍지가 심각한 탓일까?
“그런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한번 생각에 빠지면, 그것에만 몰두하는 경향이 있어서…….”
말을 이어가던 그는 갑자기 모든 것을 멈췄다.
그리곤 다시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아니. 아닙니다. 다 핑계예요.”
그가 다가왔고, 손을 내밀었다.
나는 천천히 그 위에 내 손을 얹었다.
아주 오래 전에 우리가 이렇게 손을 잡고 테라스에서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지.
너무 다정하고 따뜻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때에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 심장을 두드렸다.
행복해.
그와 닿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일일 줄 몰랐다.
따뜻한 물속에 몸을 담그고 있는 기분이었다.
“저는 당신이 좋아하는 것을 보내고자 했고 다른 것들은 아무 필요가 없을 거로 생각했습니다. 바보 같았어요.”
“제가 이미 보석도 값비싼 것들도 많은 귀족 영애이니까?”
“하지만 그건 로제 영애도 마찬가지인 것이죠. 충분히,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저만 몰랐습니다.”
그의 얼굴은 살풋 일그러졌고, 눈은 흔들렸다. 꼭 아파하는 것처럼. 절절히 후회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신기하게 그 얼굴을 눈에 담고, 나를 위해 내뱉는 그 모든 말들을 삼키며 갈증을 없애는 것처럼 굴었다.
더. 더 말해 줘요.
저 말 한마디 한마디가 닿을 때마다 아팠던 기억들이 추억이 되는 기분이었다.
신기하게도 그랬다.
“그리고 당신께서 모르시는 것이 있는데 당신 동생은 수전노…….”
응? 지금 뭐라고 한 것 같은데?
그의 얼굴에 정신이 팔려 깜빡 말을 놓치고 말았다.
파르르 떨리는 백금색 속눈썹이 노을을 받아 무척 예뻤기 때문에.
“지금 못 들었어요, 가브리엘.”
묻고 싶으니 물어야지.
가브리엘은 눈을 깜빡이다가, 천천히 말했다.
“보석은 로제 영애가 요구한 것입니다.”
어쩐지 속이 시원해 보이는 건 착각……이 아닌 것 같은데.
잠깐만.
보석을 로제가 요구했다고?
“네?”
그 애가 왜?
널린 것이 보석이고, 금전이다. 힐링턴은 무척이나 부유한 가문에 속했으니까.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가 푸스스 웃었다.
어느새 그가 내 손을 잡아당겼고 우리 사이의 거리는 세 걸음 정도가 되었다.
꼭 춤을 출 때 댄스 파트너와의 거리를 재듯이.
“지금 말해달라 하시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지만…….”
“왜요?”
“당신께선 동생을 끔찍하게 생각하시니, 괜히 미운 말을 했다가 제가 미운털이 박히면 곤란합니다. 그러니 그건 나중에, 나중에 그 곤란한 영애에게 직접 물어주세요.”
설마 둘 사이에 뭐가 오간 건 아니겠지.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유독 로제가 뭐라 해서 나가면 가브리엘이 있었던 기억을 다시금 떠올렸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말하고, 보석을 받은 건 아니겠지, 로제?
그건, 그건 너무 양아치 같잖아. 설마 아닐 거야. 내 동생이……?
“또.”
“네?”
“또 섭섭하고 속상했던 것은 없으십니까?”
다시 한걸음, 가까워졌다.
그의 눈이 반짝였다.
목소리는 다정했다.
나는 떨리는 숨을 내쉬면서 뭐라 말하는지도 모르고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래. 가브리엘은 정확했다.
“가브리엘, 당신이.”
“네.”
“그때, 그랬잖아요.”
“무슨 말을?”
나도 몰랐던 내 마음을 정확히 짚었잖아.
내 마음은 오로지 첫사랑이라는 이름의 형태로 두루뭉술했는데, 이제는 그의 말을, 목소리를 따라 명확해졌다.
내가 당신을 갖고 싶은 눈으로 봤다고 했지. 맞아. 그런가 봐요, 가브리엘. 나는.
‘당신이 갖고 싶어.’
몰랐던 욕심이 명확한 형태를 갖고 가슴 속에서 피어났다.
나는 그를 바라보고, 눈에 담았다.
나를 바라보는 저 다정한 시선을, 내가 듣고 싶어 해주는 예쁜 입술을, 모든 것을 해칠 수 있으면서도 다정다감하게 잡고 있는 그의 커다란 손을.
‘당신이.’
심지어 바람에 휘날리는 저 머리카락 한올마저도 소중했다.
‘당신이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