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노을 데이트 (2)
내가 어떻게 이 마음을 버리려 했을까.
버리면 분명 가슴 속엔 커다란 구멍이 생겼을 터인데.
대체 그것을 무엇으로 채우려고.
입술이 떨렸다. 말이 점점 빨라졌다.
“그랬잖아요. 확신했다고. 내 눈을 보면서 확신했다고.”
심장이 터질 듯했다.
“내가 당신을 좋아한다는 걸 어떻게 알았어요?”
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당신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우리 사이는 그렇게 시작도 해보지 못하고 끝났을 텐데.
“꽃을.”
나만의 착각일까?
그의 목소리도, 손도 무척 떨리고 있는 듯했다.
“당신께서 화분을 두고 가셨을 때. 처음에는 몰랐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서, 한동안 정말 엉망진창이었으니까.”
“그랬어요……?”
나는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무너지던 가브리엘을 떠올렸다.
푸석했던 얼굴, 뜨겁게 흔들리던 눈빛, 아슬아슬했던 모습.
괜히 걱정이 올라왔다.
“다른 건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결국 절 끊어내려 하셨다는 것에 하루에도 몇 번씩 돌 것 같다가도.”
착각이 아니었다.
그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 손끝이 내 뺨으로 다가와 부드럽게 문질렀다.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떼어내는 것에 가까웠지만, 아찔했다.
“그 화분을 당신이 남기셨다고 믿고 매달렸습니다. 끼고 살았죠. 제 부관은 절 미친놈 보듯이 했습니다.”
그랬구나.
내 마지막 미련이, 그의 손에 있었던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까.
그것이 아픔이었다는 것에 슬퍼해야 할까.
“알았으니까요.”
“네?”
“제가 당신께 잘 보이고 싶어 식물 대사전을 줄줄 외우고 다니는 미친놈이라는 걸, 당신께선 알고 계셨으니.”
아니. 아니요. 난 몰랐는데?
헉, 하고 선명한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그때 연회장에서 그가 내뱉었던 해박한 지식을 들으며 무슨 생각을 했더라.
그냥 똑똑하구나, 식물에 관심이 많구나 이따위 생각이나 한 것 같았는데.
그게 나한테 잘 보이려고 외운 거였다고? 그, 그 두꺼운 책을?
으으,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가 뺨을 어루만지고 있지 않았다면 당장 도망갔을 것이다.
“꽃말조차 고려해서 남기신 것이라 믿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확신합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떠날 때 그 생각을 하긴 했었다.
꽃말에 대해 잘 아는 그였으니, 내 마음 한 조각이라도 알아주지 않을까 하는 비겁한, 아주 비겁한 희망.
그게 닿았다고 생각하니 좋으면서도 어쩔 줄 모르는 기분이 되었다.
미안하고, 아프고, 좋았다가, 다시 슬프고.
“그런 식으로 남겨서, 너무 비겁했죠. 미안해요.”
“아뇨.”
“네?”
“저는 좋았는데.”
나는 눈을 끔뻑거렸다.
어느새 떨리고 있던 가브리엘의 손이 안정되고, 그가 웃고 있었으니까.
“저는 좋았습니다.”
어떻게 그래?
그게 어떻게, 좋아.
“다 버리고 떠나려는 그때에도 저를 생각해주셨다는 것에. 그 순간, 포기하지 않으려 하셨다는 것에. 당신에게 닿을 수 있는 마음의 끈을 하나라도 남겨두셨다는 것에.”
그러니까 저런 말.
저런 말들을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그게 당신을 욕심내는 것을 멈추지 않게 했고.”
어떻게 저런 말들을 내뱉는데도 느끼하기는커녕, 멋지게만 보이는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주인공이라서.
정말 주인공이라서 그런 거야?
아니면 내 눈에 씐 콩깍지 때문에 다 좋아 보이는 걸까?
“저를 버티게 했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그가 내 뒤통수를 망치로 후려치는 말을 했다.
“그곳의 편지를 보았습니다.”
응?
잠깐 생각이 표백되었다.
숨을 쉬고는 있는데 그것조차 의식해야 하는 것처럼.
뭐라고요? 뭘 봐?
얼어버린 나를 알아채지 못한 것인지 그는 여유로운 말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침대의 서랍 속에 버리지 않고 모아둔 편지들을 보았습니다.”
아니, 아니, 아니! 으악!
“제가 쓴 편지들이더군요.”
“그, 게.”
다정하게 속삭이면서 말하는 그의 눈웃음이 참으로 어여뻤지만, 내 마음은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폭주 기관차가 되었다.
뭐라고? 뭐라고요? 그걸 봤다고! 아니, 누가 보여준 거야!
‘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발끝에서부터 번져가는 것은 분명 지독한 수치심이었다.
아, 내가 지금 죽으면 병명은 분명 수치사일 거야.
으으, 놔. 당장 도망가야겠어.
뒷걸음질치며 손가락을 꿈틀거리는데 가브리엘이 살짝 잡아당겼다.
동시에 그의 웃음과 섞인 말이 들려왔다.
“가지 마세요. 들어주세요.”
“……가, 브리엘.”
“그건 당신의 마음이었습니다.”
“…….”
“그때, 완전히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
“안도했어요. 보자마자 알았습니다.”
“…….”
“버리지 않고 모아둔, 그리고 빛바랜. 익숙한 모습이었으니. 수없이 읽어 해져버린 저의 것과 같았으니까요.”
나는 멈칫 굳었다.
그리고 그를 올려다봤다.
입술을 뻐끔거리다가 물었다.
“당신의, 것?”
“네. 당신께서 주신 편지. 모두 모아놓았습니다. 하나도 버리지 않고, 너무 소중하게.”
“당신도, 그랬어요?”
“네.”
“나처럼?”
“네. 같았습니다.”
나는요. 나는, 너무 읽다가 나중에는 찢어질까 두려워 아껴 읽었어.
너무 만져서 모퉁이가 해져버려서 그것도 아팠어.
당신도 그랬어? 정말?
“네, 그랬습니다.”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무 말도…….”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지?
그가 돌연 고개를 살짝 돌리고 큭큭 웃은 것은 그때였다.
뭐야. 지금 왜 웃어?
“몰랐습니다. 이렇게, 표정이 잘 드러나는 분이신지를.”
그가 휘어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을 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심정이 되었다.
“정말 왜 몰랐을까…….”
이상하게 울컥했다.
눈물과도 비슷하고, 서러움과도 비슷한 것이 솟구쳤다.
“이렇게 눈으로, 얼굴로, 표정으로 모든 것으로 말하고 계셨는데.”
“…….”
“왜 전 제가 보고 싶은 것만 봤을까요. 멍청하게. 정말, 멍청하게. 그래서 당신을 아프게 하고, 당신을 상처주고…….”
당신은 알까. 그렇게 말해 준 것이 당신이 처음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알아듣고 내뱉어주는 사람은 전생에도 없었다는 것을.
“내가, 표정을 읽기 쉬워요?”
“네. 지금은 확실히 알겠습니다. 당신께서는 이렇게-”
그의 손가락이 내 눈썹에 닿았다.
“기분이 나쁘면 눈썹을 들어 올리시고. 당신께서는 이렇게.”
손가락이 내 콧등을 타고 내려와, 뺨을 덧그렸다.
“기분이 좋으면 뺨을 붉게 물들이시고.”
다시금 그 손가락은 천천히 타고 내려와 잘근거리던 입술을 빼내었다. 아주 부드럽게.
“초조하면 입술을 깨무시죠.”
아. 자연스럽게 입술을 덧그리며 떨어진 손의 감촉이 선명했다.
불타는 것 같아.
아니, 불씨가 옮겨 붙은 것 같아.
또륵 어느새 맺혀 떨어지는 눈물을 그의 엄지가 훔쳤다.
“울지 마세요. 당신께서 우시면.”
“…….”
축축해진 손끝을 그가 조용히 입술에 머금어 입맞춤했다.
“이렇게 모두 삼켜버리고 싶으니까.”
아. 정말.
나는 타오르는 촛불 하나가 되었고.
그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 꽃은 잘 말려 지금도 제 품에 있습니다. 책갈피로 만들었고 평생 갖고 있을 겁니다.”
다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지만, 이번에는 내가 닦았다.
“가브리엘, 있잖아요.”
“네.”
나는 푸스스 웃었다.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아주 자연스럽게.
“…….”
“말하지 못했던 것이 있는데요.”
“…….”
그 웃음을 마주하고 돌처럼 굳어버리는 그를 보지 못한 채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나요, 꽃 별로 안 좋아했거든요.”
“……네?”
잠시 정신이 나갔던 듯한 그는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네? 정말, 이십니까?”
“응. 그랬어요.”
충격받은 듯한 얼굴을 보며 나는 멋쩍은 표정으로 뺨을 긁었다.
“그럼 제가 계속 보내드린 것은…….”
진짜였다. 나는 꽃도 화분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온갖 값비싸고 진귀한 약초들을 보내왔지만 처음엔 왜 이런 것을 계속 보내나 싶었다.
“하지만 분명 로제 영애는 당신께서 식물 키우는 걸 좋아하신다고…….”
그것도 로제가 알려줬단 말이야?
“그, 처음에는 그랬어요.”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도 웃음을 삼켰다. 우린 이런 식으로 어긋났구나 싶어서.
“그런데 지금은…….”
그도 내게 묻지 않았고, 나도 받는 내내 그렇게 말하지 않았으니까.
‘소통의 부재였어.’
난 헛기침을 했다.
“어느 분께서 한결같이 보내오는 바람에 키우고 또 키우다 보니 애정을 갖게 되었지만요.”
“…….”
“이제는, 좋아요.”
이번에 빨개지는 것은 내 얼굴이 아니라 그의 얼굴이었다.
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머리카락을 꼬았다.
내가 처음 식물을 기르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치유의 이능을 시험해보기 위해.
그의 심장을 되살렸던 힘, 바로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서였지.
그게 내가 식물을 광적으로 좋아한다 소문이 났었나 보다. 그리고 로제는 가브리엘에게 말을 옮겼고.
그러면 정말 우리 로제는…….
‘나랑 가브리엘을 이어주려고 노력했던 거란 말이야?’
어릴 때, 자기는 가브리엘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농담 식으로 말했던 것이 정말 진실이었을 줄은.
“저, 가브리엘?”
“네. 힐데아.”
으음, 어쩌면 그는 이곳까지 나를 찾아오면서 알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내 꽃집이 인기 있는 이유를 알아요?”
“네. 짐작하고 있습니다.”
“어, 음. 그랬군요.”
너무 확답에 찬 말이었다.
나는 숨을 좀 가쁘게 내쉬었다. 이능에 관한 것은 크라이스 외에는 처음 고백하고 말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럼 편하게 말할게요. 제가 치유의 이능을 지니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는 거죠?”
어쩌면 감쪽같이 속이고 있던 내게 배신감이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손을 뻗어 내 입가를 스치듯 만졌을 뿐이었다. 다시 무언가를 덧그리듯.
“……제가 힐링턴의 정원을 보며 항상 생각했던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는데.
“너무 울창하다는 것.”
응?
“꼭 식물계 이능을 먹고 자란 것들처럼 지나치게 싱그럽고, 울창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입을 헤벌렸다.
“당신이 오르다 떨어졌던 그 높다란 나무도 이상하리만치 커다랬습니다. 그런데 그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보다 왜 그때의 일을 말하고 그래. 나무 오르다 두 번이나 떨어진 것을 목격한 남자 앞에서 나는 이 화제가 얼른 지나가길 빌었다.
“그게 모두 당신의 자취였군요.”
입을 꾹 다물었다.
내 자취. 내 자취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