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돌아가요, 우리
그렇게 얼마나 많은 대화를 나누었는지 모르겠다.
서로 묻지 못하던 것을 묻고, 이후로 몇 번을 그와 마주 보며 웃었던 것 같았다.
제일 어이가 없었던 것은 후작을 처리한 것이 정말 가브리엘이었다는 이야기였을까.
‘정말, 정말이에요?’
‘네. 감히 그 새…… 무례한 인간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용병을 고용했는걸요.’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습니다. 끈질기게 따라붙느니 처음부터 본때를 보여주는 게 낫습니다.’
‘근데 나 이 상황, 제국에서도 겪어본 것 같은데…….’
‘…….’
‘설마 그때도 가브리엘, 당신이었던 건 아니죠?’
‘…….’
‘가브리엘?’
팔다리를 분질러 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잠시 질렸던 것도 같았다.
신분을 증명하는 것을 같이 보내 찍소리도 못하게 해놓았다는 것도.
그리고 동시에 그가 유년시절 내내 전쟁터에서 험하게 살아온 사람이라는 것을 되새겼다.
그걸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것은 그가 내 앞에서는 조심하고 또 조심하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것도.
그러던 어느 순간.
‘힐데아.’
‘네?’
노을이 거의 검붉게 물들었을 때 그가 손을 내밀었다.
‘이제 돌아갈까요?’
아쉬웠다. 아쉬운 표정이 역력한 것을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우리 집으로 돌아갑시다.’
우리 집.
그는 내 옆집일 뿐이었지만, 괜히 의식하게 되는 말이었다.
‘그, 그럴까요?’
내 얼굴이 빨갛게 되는 것을 보며 그는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다며 미친 듯이 나를 재촉했고.
그렇게 지금 우리는 함께 말을 타고 돌아가는 중이었다.
말을 타고 돌아가는 길, 넓은 평원을 지나 우리의 작은 집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 가브리엘이 말했다.
“피곤하십니까?”
“아니에요. 괜찮아요.”
“내일도 업무가 그렇게 많으시다면 좀 미루는 것도 좋겠습니다.”
“음, 거래는 중요하잖아요. 그리고 제 체력은 제법 튼튼해요.”
“그건 그러신 것도 같지만, 어쩐지 급하게 서두르시는 것 같아서.”
“그건…….”
기적 같다.
이 자연스러운 대화라니.
이 짧은 몇 시간이 얼마나 많은 것을 바꾸어놓았는지, 그는 알까?
나는 이제 그의 표정을 더욱 확신하며 읽을 수 있게 되었고,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더라도 그것을 보며 상처를 받진 않게 되었다.
황홀하면 황홀했지.
“아, 추우십니까?”
아. 그는 고삐를 쥔 채 나를 앞에 태우고 말을 타고 있었고, 어쩐지 지금 머리에 그의 입술이 닿았던 것 같다.
아, 아니겠지?
슬그머니 돌아보고 싶어도 거리가 너무 가까워 숨 쉬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추운 거 아니에요.”
“그러면?”
당신이 바로 등 뒤에 있으니까!
“긴장 푸셔도 되는데. 기대셔도 됩니다.”
아니요, 힘 못 푸는데요.
기대면 내 심장은 터질 걸요.
말 때문이 아니라 당신 때문이니까.
“아. 이런.”
그때 무언가를 눈치챈 것인지, 그가 푸스스 웃었다.
“제가 둔했군요.”
“……?”
머리 위에 흩어지는 숨결에 다시 허리에 빳빳하게 힘이 들어갔다.
그때 그가 바로 내 귓가에 스치듯 속삭였다.
“혹시 저 때문에 긴장되시는 것이라면.”
으, 아찔하게 올라오는 소름을 느끼며 손가락으로 꽉 고삐를 움켜쥐는데, 그가 말을 이었다.
“얼마든지 긴장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뭐라고요?
“좋으니까.”
“…….”
역시, 성격 나빠.
영 친절하지 못한 말에 나도 모르게 깜짝 놀라 몸을 돌렸고, 바로 코앞에 있는 그와 마주쳤다.
“의식해주세요. 지금처럼.”
“…….”
“이렇게. 제가 가까이 다가가면.”
“……가, 브리엘.”
“숨을 멈춰주세요.”
숨결이 고스란히 입술에 닿았다.
아. 까닥하면 닿을 것 같…….
“이런, 다 왔군요.”
응?
그렇게 말한 그가 말의 고삐를 잡아당기며 몸을 물리지 않았다면 정말, 정말-
‘아, 진짜.’
얼굴이 확 붉어졌다.
먼저 말에서 내려간 그가 내게 손을 올렸다.
잡고 내리라는 그 다정한 얼굴 위로 분명한 장난기가 서려 있어서 부아가 치밀었다.
지금, 지금 내 반응 다 보면서 놀리는 거 맞지? 응?
“당신이 이렇게 짓궂은 줄 몰랐어요. 정말로…….”
“저도 당신께서 이렇게 귀여운 반응을 해주시는지 몰랐습니다.”
귀, 여운…….
“그런 단어 쓰지 마요.”
“사실인데.”
“아, 쓰지 마세요!”
내가 끔찍한 단어라는 듯이 바라보자 그가 어깨를 흔들며 웃었다.
“뺨이 잘 익은 자두의 빛깔 같습니다. 향기도 날 것 같아요.”
“하지, 마요.”
난 그런 농담 질색이야!
그의 손을 잡고 내려오다가 웃음이 터져버렸다. 내 웃음소리를 들은 가브리엘 역시 동시에 웃었다.
꼭 어린아이들이 된 기분이었다. 수도에서는 이렇게 장난치는 것은 상상조차 못 해봤었는데.
“힐데아.”
“풋, 네.”
“급하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뭐가요?”
“뭐든.”
나는 웃는 낯 그대로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의 표정이 천천히 변하는 것을 보았다.
“저는 이곳에 있을 것이고.”
다정한 웃음을 물고 있던 얼굴은 서서히 딱딱하게 경직된 것 같은 무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저 얼굴이 진지한 것이라는 것을 안다.
어떤 말을 내뱉기 전에 긴장한 모습이라는 것도.
아마 자신이 내뱉는 말에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고려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나를, 오로지 나를 신경 써서.
“그 어떤 순간에도, 어떤 방식으로도 당신을 억압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거짓말. 당신, 질투심으로 영주님 고백 못 보게 막았잖아.
그런 짓궂은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순간 눈앞의 남자가 너무 귀엽게 느껴져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저는 오늘 너무 좋았습니다.”
“뭐, 가요?”
“당신이 진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고,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으니까요.”
나도 그랬다.
“당신이 괴로울 땐 어떻게 행동하고, 기쁠 땐 어떻게 미소하는지를 목격했으니까요.”
나도 그래, 가브리엘.
당신의 표정을 알게 되었고, 확신할 수 있게 되었고, 그래서 나는.
“당신의 삶에서 내가 차지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겨난 것 같아서. 그러니 원하시면 제게 말하세요.”
무엇을? 응시하며 눈으로 묻자, 그가 잡은 손에 한차례 꾹 힘을 주었다.
“이곳에 있고 싶다고.”
그는 꼭 내가 계속 고민하던 것을 읽은 사람처럼 말한다.
꽁꽁 감춘 내 마음 하나 알아주는 이가 없어서 그렇게 외로운 시간을 보내왔었는데.
루다나 마을 사람들도, 지금의 당신도 모두 내게는 기적 같아.
“그렇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비장한 것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동시에 자각했다. 더는 내 고민을 미룰 수 없다는 것을.
“당신께서 원하기만 하신다면, 제 앞에서 그 누구도 당신을 데려갈 수 없을 겁니다. 그것이 설령 제국의 황제라 할지라도.”
“왜…….”
“저는 항상 당신의 편일 겁니다, 힐데아.”
“제가, 못된 짓을 해도요?”
“베어오고 싶은 사람의 머리가 있으시다면 당장 잘라 올 정도로.”
나는 당황했다.
뭐라고요, 이 사람아?
“악당이 되신다면 그 악당을 보좌하는 역할을 하지요.”
웃음이 나왔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가 저런 각오를 해야 할 만큼 결국은 내가 돌아가야 할 순간이 오리라는 것.
그렇게 되기 전에.
그런 순간이 오기 전에 내가 말하고 결정하는 것이 낫다.
끌려다니는 삶은 지긋지긋하니까.
“힐데아, 이 마을에 머무시게 되면, 그렇게 되면.”
가브리엘이 순간 수줍게 웃었다.
그래. 정말, 수줍게.
그 모습이 참 너무 고와서 잠시 입을 벌렸다.
“그럼 저도 이곳에서 살겠습니다. 당신과 함께, 계속.”
잠깐만.
나는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가 대충하는 말이 아닌 듯했기 때문이다.
“……공작의 작위를 내던지고요?”
“네. 마을 어르신들이 그러더군요. 제가 밭일을 아주 잘한다고.”
그야, 그렇겠지. 당신이 잘하지 못하는 일이 뭐가 있겠어.
그러나 저 평온하게 내뱉는 말이 보통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나는, 나는 말하지 않고 넘기고 있는 것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그가 얼마나 열심히 싸워 이곳까지 올라왔을까 하는 것.
단순히 전쟁터의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원작을 알고 있었고 그가…….
그가 복수를 준비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바치는 눈으로 내 앞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는 것도.
내가 돕지 않아도, 조언하지 않아도, 모든 것을 알아서 다 잘할 테니까.
해피엔딩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괜찮아. 그는 단단하고, 용감한 사람이야.
그렇게 넘겨왔던 시간이 사실은 얼마나 치열하고 절박할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 다 내려놓겠다고.
나 때문에?
복수도, 미래도, 작위도?
“내가, 뭐라고요.”
“제가 좋아하는 분입니다.”
그런 걸 말한 게 아니야.
난 당신 인생에 해준 것이 하나도 없는데.
“제 심장을 뛰게 해주신 분입니다.”
아. 어떡해.
눈물과 웃음이 동시에 터졌다.
이러다 정말 가브리엘은 내가 울보인 줄 알겠어.
“정말, 왜 그런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해요…….”
“긴장한 상태로 내뱉는 말인데. 모르셨다니 다행입니다.”
“자기가 지금 말해놓고, 흐.”
“울지 마세요.”
“가, 브리엘.”
“하아. 이렇게 잘 우는 분이셨다면, 제가 모르는 곳에서도 많이 우셨을 것 같아서.”
정말 당신은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들 수 있는 사람이구나. 그렇게 용기를 내왔구나.
“……그래서 마음이 아픕니다.”
그렇다면 나도.
그 중요한 순간에 도망쳐 당신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을 나도, 용기를 내야 하지 않을까.
당신이 내가 모르는 곳에서 희생하지 않도록, 노력하지 않도록.
어차피 결정했어야 할 일이었으니 용기를 내도록.
고민이 길었지만 결심한 순간, 너무나 산뜻해졌다. 가벼워졌다.
“가브리엘.”
긴장한 그를 보며 이번에는 내가 잡은 손에 힘을 꾹 주었다.
그가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당신이 귀여워서요. 자꾸 사랑스러워서 보여서요. 그래서야. 그래서 같이 있고 싶어요.
‘당신이 언제나 내 편 해주겠다고 했으니까.’
당신이 이렇게 손을 잡아줄 테니까.
내가 가족들과 또다시 실패하더라도 이번에는 부딪힐 용기가 났으니까.
“우리, 돌아가요.”
“……힐데아?”
“언제까지 피할 순 없었으니까.”
커다랗게 떠지는 눈을 보며 손에 힘을 주었다. 이제는 이 손을 먼저 놓지 않도록.
“우리 수도로 함께 돌아가요.”
이제 나도 당신 편이 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