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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114화 (114/155)

114화. 평화는 깨지고 (1)

희미한 기억이었다.

이것이 과거의 순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가슴이 저며지는 고통 속에서 나는 손을 뻗었다.

그러지 마세요. 화를 낸 것이 아니었어요. 잘못했어요. 미워하지 마세요.

하지만 이제는 희미해진 얼굴의 상대들은 나를 비웃었다.

차가운 조소와 함께 쏟아진 것은 냉정한 거절이었다.

‘……연. 항상 네 표정은 구역질 나. 넌 혼자 뭐가 그렇게 잘나서 그따위 얼굴을 하는 건데? 내가 그렇게 우스워 보여?’

‘흥, 도도한 척하는 계집애! 네가 가져갈 건 아무것도 없어. 모든 것은 내 아들이 갖게 될 테니까!’

‘난 알아. 넌 누구한테도 사랑받지 못할 거야.’

헉.

나는 질척하게 붙잡는 것 같은 꿈속에서 벗어나 눈을 번쩍 떴다.

찌르르, 울리는 풀벌레 소리와 함께 까맣게 펼쳐진 하늘이 보였다.

그리고 내 옆에 있는 누군가의 온기까지도.

여, 여기는.

“힐, 벌써 깨셨습니까?”

다정한 음성의 상대는 모닥불로 인해 주황색으로 물든 머리카락을 하고 있었다.

온유한 보라색의 눈동자가 다정히 내 상태를 살핀다.

“가, 브리엘…….”

“아직 깊은 새벽입니다. 이동하려면 시간이 더 남았으니 더 눈을 붙이세요.”

“아…….”

나는 그제야 이곳이 어디이고, 내가 힐데아 폰 힐링턴이며, 눈앞의 남자가 가브리엘이라는 것을 천천히 떠올렸다.

그리고 방금 꾼 악몽은 내 전생의 기억일 뿐이었다는 것도.

“제가, 잠꼬대를, 했나요?”

“아닙니다.”

가물가물한 눈으로 바라보니 살풋 휘어지는 눈매가 무척이나 다정했다.

그가 커다란 손을 뻗었다.

“더 자요.”

토닥거리는 손길이 자연스럽게 닿아 내 어깨에 내려왔다. 따뜻해.

“많이 노곤하십니까?”

아니요. 괜찮아요.

하지만 그의 손길에 자연스럽게 잠에 빠져들려 하는 내 의식은 무언가 말을 전달하지 못했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잔잔하게 닿았다.

“며칠만 더 이동하면 될 겁니다, 힐데아.”

그래. 그랬지.

나는 까무룩 잠들려는 의식 속에서 생각했다.

우리는 어제, 루다나 마을을 급히 떠나와야만 했다.

왜냐하면…….

검게 변하는 시야 속으로 나는 어제 있었던 일들을 회상했다.

이렇게 된 것은 모두 어제, 아침의 일이었다.

*

그에게 용기를 내어 같이 떠나고자 고백한 다음 날 아침.

나는 어떻게 마을 사람들에게 이별의 말을 전달해야 할지 골똘히 고민해야 했다.

꽃집을 정리하는 일도 차근차근 시일을 들여 해결할 생각이었다.

적어도, 급작스럽게 방문한 그 사람만 아니었더라면.

딸랑, 문이 열렸고.

“힐!”

“……크라이스?”

황급히 달려온 듯한 은발의 남자는 바로 언제나 다정하고 온유한 최고 신관, 크라이스였다.

나는 깜짝 놀라 눈을 커다랗게 떴다.

크라이스가 어떻게?

“크라이스, 여긴 어쩐,”

“큰일입니다, 힐.”

“네?”

“지금 당장…….”

그는 꽃집 안에 덩그러니 서 있던 날 보더니 황급히 걸어왔다.

그리고 다급히 손을 뻗어 내 어깨를 잡으려 했다.

“그만.”

“…….”

턱, 하고 누군가 중간에 가로막지 않았다면.

크라이스와 가브리엘의 눈이 팽팽히 마주쳤다.

“……당신은, 벨키우스 공작?”

“최고 신관, 당신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다행히 꽃집 안에는 나와 가브리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혹시나 해 주변을 살피며, 새로운 손님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우선 꽃집 문을 잠갔다.

하지만 그 잠깐 사이에 팔을 단단히 부여잡고 있는 가브리엘과 크라이스 사이에는 불꽃이라도 튀는 듯했다.

뭐지. 둘의 사이가 좋지 않았었나?

꼭 원수라도 바라보는 얼굴이다.

하지만 딱히 접점이 없었던 것 같았는데.

“저, 크라이스?”

어쩐지 냉정해 보이는 크라이스의 옆모습이 낯설어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그, 정신이 없어 연락하지 못했네요. 모르셨겠지만, 며칠 전에 가브리엘이 이곳에 도착했어요.”

죄책감이 스멀스멀 피어났다.

내 감정에 몰두하느라 크라이스에게 연락을 하지도 못했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에.

여태 나를 도와준 그의 입장에서는 미리 알아둘 필요가 있는 것이었다.

특히, 이제 제국으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결정한 상황에서는 더더욱.

나는 얼음처럼 굳은 듯한 크라이스를 유심히 바라봤다. 창백하게 질린 것이 평소와는 너무 달랐다.

“그런데…… 많이 놀라신 것 같아요. 혹시 무슨 일 있으세요? 소식도 없이 오셔서…….”

“힐.”

“어, 네?”

그는 홱 고개를 틀어 나를 바라봤고, 나는 어쩐지 그의 표정이 무척 냉정하고 날카로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뭐지. 저런 표정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나?

나도 모르게 움찔한 순간,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크라이스의 표정이 온화해졌다.

“그랬, 군요.”

평소처럼.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생각지 못한 분이 이곳에 있어 잠시 놀랐습니다.”

“그건 이쪽에서 할 말인 것 같은데. 그쪽을 이곳에서 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으니.”

“…….”

“내 말이 틀린가, 최고 신관?”

나는 이번에는 가브리엘을 바라봤다.

숫제 잡아먹을 듯이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에는 꼭 살기마저 담겨 있는 기분이라서.

“저어, 가브리엘?”

하지만 가브리엘은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오히려 크라이스 쪽을 더 사납게 노려보는 듯했다.

그리고 내게 손을 뻗었다.

“힐.”

꼭 내게 오세요, 그리 말하는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그의 곁으로 다가가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팽팽히 당기는 옷자락이 느껴졌다.

‘응?’

뒤를 바라보니 그것은 크라이스가 내 옷자락을 잡은 것이었다.

꼭 가브리엘에게 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처럼.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아니, 뭐야. 애들도 아니고 이 사람들이 왜 이러지?

그 모습을 바라보던 가브리엘이 불쾌한 듯이 목을 낮게 긁었다.

“놓지?”

“공작 각하께서 힐데아를 강제하려고 오신 게 아니라는 걸 확신할 수가 없군요.”

“하!”

냉정하게 비웃는 가브리엘의 목소리에 어깨가 흠칫 떨렸다.

“……힐. 이 자가 언제부터 이곳에 왕래했던 것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아. 그런 거였구나.

내 얼굴은 아마 낭패로 물들었을 것이다.

‘크라이스가 일부러 내 행방을 숨겼다고 생각한 거야.’

나는 얼른 달려가다시피 해서 가브리엘의 팔뚝에 손을 얹었다.

“가, 가브리엘.”

팽팽하게 솟았던 근육이 내 손길에 따라 천천히 힘이 풀리는 것은 무척이나 기묘한 느낌이었다.

살벌했던 주변의 공기도 조금 온화하게 풀어진 느낌이었다.

나는 용기를 얻었다.

그가 내 편이라는 것.

자신에게는 무슨 말을 해도 괜찮다고 했던 가브리엘의 말을 떠올리면서.

“그러니까……. 다 오해예요.”

그러니까.

“화, 내지 마세요.”

가브리엘과 시선이 마주쳤고, 나는 어설프게 웃었다. 그러자 그가 완전히 손을 놓았다.

나는 일단 크라이스의 손을 바라봐 그가 손을 놓게 한 다음, 옷자락이 풀리자마자 가브리엘에게 한걸음 다가갔다.

어쩐지 뒤에서 쏘아보는 시선이 닿는 것 같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뒤에 있는 것은 크라이스였으니까.

언제나 온화하고, 보기만 해도 이상하게 믿음과 신뢰가 갔던.

여태까지 나를 도와주었던 유일한 사람.

그러니…… 그가 나를 노려보고 있을 리는 없었다.

“무슨 오해를 하는 건지 짐작이 가요, 가브리엘. 하지만 아니에요.”

가브리엘의 눈썹이 씰룩였다.

“이 자가 누구인지 잘 아실 테지요.”

“네, 크라이스. 최고 신관이요. 제가 모를 리가 없잖아요. 하지만 이곳에 정착하는 것부터 지금까지 저를 많이 도와준 분이에요. 그러니 오해예요.”

“많이?”

“네.”

“언제부터입니까?”

“그, 처음부터.”

내 말이 끝나자마자 가브리엘의 시선은 내 뒤에 서 있는 크라이스에게 머무는 듯했다.

그의 눈이 무척이나 냉정하고 싸늘했다.

내게 향하는 것이 아니었는데도, 보기만 해도 어깨가 흠칫 떨릴 만큼.

그의 입술이 비틀렸다.

“처음이라. 그러면 최고 신관, 그쪽께선 이분의 행방을 안 지, 한 달은 훌쩍 넘었다는 소리시겠군.”

“……그렇습니다만. 문제가 있습니까, 벨키우스 공작 각하?”

“하. 내가 오늘 몰랐던 것을 많이 알아가는군.”

어쩐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가늘어지는 가브리엘의 눈을 보니 괜히 심장이 불안으로 일렁였다.

그가 이제는 어떤 마음인지, 그리고 나도 어떤 마음인지 알고 있으면서도 화가 난 사람의 얼굴은 여전히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내게 화가 난 걸까?’

심장이 쿵쿵 뛰었다.

‘혹시 신전과 벨키우스 사이에 내가 모르는 일이 있기라도 한 거야?’

돌연 가브리엘이 한숨을 내쉬며 물러난 것도 그때였다.

가브리엘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그는 퍽, 기이한 얼굴이었다.

난감한 듯도 하고 슬픈 듯도 한.

꼭 내가 움츠러들었던 것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 같은 시선이라 손가락이 움찔 튀었다.

하지만 난 그가 무서웠던 것은 아니었는데.

가브리엘이 내게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힐.”

“……네.”

“당신께 화를 내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감히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런……. 그런 얼굴 하지 마세요.”

“아.”

“그저 깨끗한 눈밭에 짐승 새끼가 흙발을 들이밀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기분이 좋지 않을 뿐입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이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못마땅한 듯 크라이스를 바라보긴 했지만, 이내 나를 바라보며 평소처럼 부드럽게 미소를 머금었다.

그 시선을 보니 절로 딱딱해졌던 어깨에 힘이 빠졌다.

심장이 쿵쿵 뛰고 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지만.

“놀라셨습니까? 저 때문에.”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그를 보면, 불안도 연기처럼 사그라들었다.

“아니에요.”

나는 고개를 저었고 그에게 손을 내밀려고 했다.

뒤에서 크라이스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더라면.

“저야말로 실례되지 않는다면, 그간 있었던 자세한 사정을 듣고 싶습니다만.”

“아, 그건.”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이었다.

“그걸 왜 당신에게 일일이 설명해야 하는지 모르겠군, 최고 신관. 어디까지나, 나와.”

갑자기 부드러운 향기와 따뜻한 체온이 얼굴에 닿았다.

‘헉.’

정신을 차렸을 땐, 잡은 가브리엘의 손에 이끌려 그의 단단한 품에 끌어안긴 채였다.

“내 약혼녀이신 분과의 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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