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평화는 깨지고 (2)
“……지금, 약혼녀라고 했습니까?”
내 몸이 흠칫 뛰었다.
으악, 하고 절로 얼굴이 타오를 듯이 뜨거워졌다.
우리는 청혼에 관해서 제대로 된 공식 대답을 주고받지 않았는데도, 그의 말을 부정하지 않는 내 태도가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벨키우스와 힐링턴의 혼담에 대해 모르는 자가 있었나?”
“하지만 그건 힐데아와의 일이 아니라…….”
“그것조차 그쪽에게 구구절절 설명할 이유는 없는 것 같군.”
나는 황급히 그의 품을 두드렸지만, 가브리엘은 당장 날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크라이스와 날카로운 말을 주고받던 그가 내게 고개를 숙이고 나직하게 속삭였으니까.
“싫으십니까, 힐?”
그건 아닌데.
그렇다고 당신 품에 안긴 게 좋다고 할 순 없는 상황이잖아…….
“놓을까요? 저자에게 설명하고 싶으십니까?”
나는 난감해졌다.
하지만 냉정히 내뱉어지는 크라이스의 다음 말에, 나는 머리가 하얗게 변해버리고 말았다.
“묻고 싶은 것은 많지만, 안타깝군요. 지금은 대화할 시간이 없을 것 같습니다, 힐데아. 당장 제국으로 돌아가셔야 하니까요.”
뭐라고?
나처럼 놀란 가브리엘의 팔에 힘이 풀려, 황급히 몸을 돌렸다.
어쩐지 처음 봤을 때처럼 한걸음 멀어진 것 같은 크라이스가 보여 흠칫 놀랐지만.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그가 오기 전에 먼저.”
“그요?”
“황태자 벤자민 말입니다.”
황태자? 그가 왜?
“……그게 무슨.”
한 걸음, 두 걸음, 크라이스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시선이 바로 코앞에서 닿을 때까지.
‘어, 너무 가까운 것 같은데.’
크라이스는 어쩐지 내 뒤에 있는 가브리엘을 신경도 쓰지 않고, 나만 보인다는 듯이 속삭였다.
눈이 가늘어지는 것을 보며 크라이스가 웃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평소처럼 온화한 기분은 아니어서 어쩐지 심장이 차가워졌다.
꼭, 눈앞의 신관이 무척이나 화가 난 것 같았다.
그런데 도통 이유를 모르겠…….
“황태자가 치료사 힐을 찾아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치료사 힐.
흠칫 떨리는 내 어깨를 가브리엘의 단단한 손이 붙잡았다.
가브리엘이 없었다면, 나는 그대로 무릎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지금 당장 제국으로 떠나셔야 합니다.”
그래. 돌아가려고 했지만.
원래도 가려고 했지만.
이건 너무 갑작스러운 이별이었다…….
*
얼굴이 빨갛게 변한 힐데아가 엉엉 울며 달려드는 루아라는 꼬마를 안고 달래는 것이 보였다.
“걱정 마, 루아. 돌아가도 자주 편지할게. 응?”
“으아아앙! 언니야아! 가지마아!”
“챙겨준 약초 꼭 복용하고. 일 년만 꾸준히 복용하면 이제 일상생활을 하는 데 큰 무리는 없을 거야. 아셨죠, 영주님?”
“네에, 힐…….”
“넌 지금 떠나는 와중에도 남은 사람 걱정이니? 어? 세상이 얼마나 혹독한데, 더 이기적이고 못되게 살아야 하는 거야. 알았어, 힐?”
“엘라.”
억척스럽게 그를 갈구던 엘라라는 여자도 훌쩍거리며 힐데아를 품에 꼭 안아주고 있었다.
얄미웠던 영주는 시무룩해진 안색으로 눈물을 훔쳤고, 모여든 다른 마을 사람들 역시 다르지 않은 상황이었다.
“왜 돌아가야 하는지는 묻지 않으마, 힐.”
“마사 부인…….”
“그래도 잊지 마렴. 다시 힘들어지면 언제든 이곳으로 돌아와도 괜찮단다. 우리는 모두 너의 가족이니까! 알고 있지?”
참고 있던 힐데아가 결국 눈물을 흘리자 모여 있던 마을 사람들 전원이 남녀노소 불문하고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흐, 흐어엉!”
“힐, 행복, 크흐, 행복해야 해!”
“누가 괴롭히면 당장 말하거라! 이 촌장님이 어디든 쫓아가서 그것들 아주 혼구멍을 내줄 터이니!”
“……정말, 정말 감사해요. 제가 이곳에서 받은 것은 감히 셀 수 없을 정도로 큰 것들뿐이었어요.”
빌어먹을.
가브리엘은 우울해진 힐데아의 옆모습을 보며 속으로 쌍욕을 내뱉었다.
두 눈을 반짝거리면서 같이 되돌아가자고 하는 힐데아를 보며 당장 품에 안고 제국으로 뛰어가고 싶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원래는 더 시일을 두고, 힐데아가 마음을 추스를 시간을 가지도록 할 생각이었다.
모든 과정을 그녀가 결정할 수 있도록.
‘그런데 이렇게 급하게.’
하여간 미친 황성의 늙은이부터 시작해서, 황족이란 것들은 그의 인생에 도움이 된 적이 없었다.
가브리엘은 치솟는 짜증을 삼키며, 옆을 돌아봤다.
냉정한 얼굴의 최고 신관, 크라이스가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절로 입술이 비웃음으로 비틀렸다.
“마을 사람들의 보호는 각하께서 알아서 하시겠다고 하셨으니, 저는 신전을 움직여 황태자의 추적에 혼란을 주는 정도까지는 도와드릴 예정입니다.”
그걸 물어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는 걸 알 텐데.
“최고 신관.”
“네, 각하.”
“당신이 황궁에 드나드는 것을 안다. 설마 모를 것이라 생각한 건 아닐 테고.”
크라이스의 눈썹이 씰룩거렸다.
가브리엘은 힐데아의 앞에서는 결코 내뱉지 않을 말들을 주억거렸다.
“축언 도둑.”
“…….”
“내가 아무것도 모르리라 생각하지 마라.”
아직은 의심이었으나, 그것이 곧 확실할 날도 머지않으리라는 것을 가브리엘은 잘 알고 있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내가 황궁을 오래전부터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정말 모르나?”
“……네, 모릅니다.”
“그럼 힐데아를 도운 것은 오로지 순수한 호의에서인가?”
“그걸, 제가, 왜 각하께 설명 드려야 하는지 모르겠군요.”
그간 힐데아의 흔적은 깔끔해도 너무 깔끔했다.
무려 황태자의 시선부터 제국의 두 공작가의 시선까지 가릴 정도로.
그건 아무리 훌륭한 준비를 했다고는 하나 홀로 움직이는 힐데아가 처리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가브리엘은 누군가가 힐데아의 도주를 돕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그게 저놈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힐데아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지만, 저자는 순수한 의도로 그녀를 도운 것이 아니었다.
신관의 깨끗해야 하는 눈에는 제 사심이 가득 차 있었다.
불쾌할 정도로 선명한 욕심. 누군가에 대한 선명한 소유욕.
‘하.’
가브리엘은 서서히 시선을 돌려, 힐데아의 옆모습을 집요하게 바라보는 신관이라는 자를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이제부터는.”
약혼녀라 대뜸 말해버린 것은 바로 그 눈 때문이었다.
감히 누굴, 그렇게 봐.
“그쪽이 신경 쓸 일은 없을 겁니다, 최고 신관 크라이스.”
경칭에 굳은 어깨는 퍽 자존심이 상한 것으로 보였다.
이곳에 있는 가브리엘을 봤을 때부터 크라이스는 아주 소중한 것을 망쳐버린 눈을 했다.
“힐데아의 옆에는.”
그리고 그 눈은.
“내가 있을 테니.”
정확히 여인을 바라보는 사내의 눈이었다.
“알겠습니까?”
그러니, 당장 달려들어 뺨을 후려갈기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는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
*
달그락거리며 멀어지는 마차 창문으로 아직도 손을 흔들고 있는 마을 사람들이 보였다.
어쩐지 다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루아, 엘라, 마사 부인, 영주님, 촌장님, 모두…….
“마을 사람들이 무사한 것은 확실한 건가요, 가브리엘?”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들이 점이 될 때까지 한참을 바라보다가 겨우 물은 것이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린 나는, 여태까지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던 가브리엘의 시선을 그제야 알았다.
그는 어쩐지 슬픈 표정이었다.
왜 그래요?
“슬프십니까.”
당신이 더 아픈 표정을 하고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확실히 보호될 것입니다. 설령 황태자가 작정하고 치료사 힐이라는 사람을 찾더라도 그는 치료사와 힐데아 영애 사이의 공통점은 아무것도 찾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힐이라는 이름은 몰라도, 내 머리카락이나 눈동자는 그렇게 흔한 것이 아닌데.”
“괜찮습니다.”
가브리엘의 손이 퉁퉁 부어 있을 것이 뻔한 내 눈가에 닿았다.
“으.”
“설령 황태자가 의심을 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화끈하게 달아오른 피부 위로 젖은 눈물의 흔적을 닦아내려는 듯이 그의 엄지가 간지럽히듯 문질러졌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걱정과 이렇게 갑자기 이별하게 된 것에 대한 슬픔이 설탕처럼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고작 그의 손길 하나로.
“가, 브리엘.”
“황태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제국에 도착해 있을 터이니.”
눈이 흔들렸다.
“황태자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을 겁니다.”
왜 몰랐을까.
제국에 도착한다는 것은 곧 가족들을 보러 간다는 것인데.
그래, 내가 결정한 사실이었다. 시기가 더 빨라진 것은 있었지만 어제 그에게 같이 되돌아가자고 했으니까.
그러니 겁낼 필요 없어.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아까.”
“네, 말씀하십시오.”
“아까…… 크라이스가 말하려다가 만 것이 있었어요.”
꿈틀하는 그의 눈을 보며, 아까부터 불안함으로 쿵쿵 치밀어 오르던 것을 결국에는 입 밖으로 내고야 말았다.
“축언, 도둑이 뭐죠?”
축언 도둑. 그게 뭐길래, 크라이스는 그걸 당신에게 물으라고 한 걸까요?
“힐.”
어쩐지 가브리엘이 잠시 숨을 멈춘 것 같았다.
내 심장 역시 쿵 하고 내려앉았다.
*
기사는 퍽 난감한 얼굴로 무언가를 내밀며 황태자 벤자민의 처분을 기다렸다.
벤자민은 보고서를 바라보며 미간을 확 구겼다.
어머니의 명령이 우선이다. 당연했다.
치료사 힐이라는 자를 무사히 데리고 와야 모든 거래는 성립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게 사실입니까.”
“네, 전하. 어찌하시겠습니까?”
은밀하게 기도 유람을 다니던 최고 신관 크라이스.
그의 정확한 행적은 오로지 신전의 고위층만 알 수 있는 사실이었고, 벤자민은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 기를 쓰고 있는 상황이었다.
왜냐하면 최고 신관 크라이스와 도망친 힐데아가 큰 관계가 있다고 의심하는 중이었으니까.
그 기도 유람의 도착지에 힐데아를 꼭꼭 숨겨놓았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이곳에서.
“최고 신관 크라이스.”
그의 흔적이 발견된 것이다.
한쪽은 치료사 힐이라는 자를 쫓을 수 있는.
다른 한쪽은 바로 자신이 애타게 찾고 있는 힐데아 폰 힐링턴을 찾을 수 있는 두 갈래의 길.
벤자민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