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되돌아가는 길 (1)
고민은 짧았다. 벤자민의 눈에 의지가 단호하게 서렸다.
“일단 최고 신관을 쫓겠습니다.”
“하지만 전하. 황후 폐하께선…….”
“그대들이 따르고 있는 것이 누구인지 잊은 모양입니다. 또한, 어마마마는 내게 전권을 주셨다는 것을 잊으면 곤란해요.”
갑자기 나타난 최고 신관이라니, 하늘이 자신을 돕는 것이 분명하다고 벤자민은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더욱 초조해졌다. 얼른, 무슨 수를 써서라도 벨키우스보다 먼저 힐데아에게 닿아야 했다.
텅 비어 있던, 우울한, 그리고 조용했던 힐데아의 눈빛이 희망을 품고 변하는 것은 사양이었다.
그녀는 자신과 같아야 했다.
축복받지 못한 축언과 이능을 갖고, 벨키우스로 인해 상처받은.
맞잡고 되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이어야 했다.
그리하여 제 손을 잡고 함께 있어줄 완벽한 반려자…….
‘그러니 힐데아를 찾는 것이 먼저야.’
치료사 힐을 추적하는 것은 그 다음이다.
“당장 움직이세요.”
벤자민은 입술을 깨물며 결단을 내렸고, 마지못해 인원들은 그의 명령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벤자민은 알지 못했다.
그들이 움직인 뒤 잠시 뒤, 그 길을 지나간 마차 안에 누가 타고 있었는지를.
*
축언 도둑이라고.
“그것은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그 이야기를 꺼내는 가브리엘의 목소리는 무척 담담했지만, 내 속은 그렇지 못했다.
속이 울렁거렸고 식은땀으로 축축해졌다.
모든 설명을 듣고 난 뒤에 허망해진 눈으로 그를 보았다.
“그, 그런 게 정말…….”
“네.”
가브리엘은 꼭 자신이 칼에 찔리기라도 한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강력한 축언과 이능을 지닌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고요……?”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어?
“그러면, 우리, 우리 로제는.”
우리 로제는. 아빠는. 힐링턴의 사람들은?
이기적이라고 해도 좋았다. 애써 못 본 척, 못 들은 척 눈 감고 있던 가족들의 생각이 와르르 쏟아졌다.
그때, 따뜻한 체온이 손에 닿았다. 내려다보니 가브리엘의 손이었다.
“이러실까 봐.”
아.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구나.
“무서웠습니다.”
“가, 브리엘.”
이성은 알고 있었다.
가족들에게 정말 큰 문제가 생겼다면, 가브리엘은 처음 보는 순간 그 이야기부터 했을 것이다.
나에 대한 배려나 조심스러운 태도는 가족들이 안전하므로 나온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선명한 죄책감이 솟구쳤다.
로제.
아빠.
“괜찮습니다. 당신의 가족들 누구도 쉽게 당할 사람들이 아니니까.”
선명한 눈을 보니 술렁거리며 어지러웠던 마음이 천천히 진정되었다.
후끈하게 달아올랐던 눈가를 문지르며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다.
그래. 수도가 그런 상황이라면 귀족들은 난리가 났을 터였다.
특히, 황제. 축언과 이능을 중심으로 세력을 강화한 것은 황제였으니까.
‘반면 황후와 황태자 쪽은.’
기세등등해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가브리엘은 어떻게 된 것일까. 그리고 힐링턴의 입지는 어찌된 것이지?
그리고 제일 이해가 안 되는 것.
“당신이 내게 왔던 사이에 제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나요? 그렇지 않고서야…… 왜, 황태자가 이쪽을 쫓는지 전혀 모르겠어요.”
“저도 그것을 마법 통신을 통해 알아봤습니다만.”
한층 어두워진 가브리엘의 얼굴을 보니 덜컥 겁이 들었다.
“길게 이야기를 나눌 수 없는 제약이 있어, 일단 제 부관이 더 알아보고 연락을 주기로 했습니다.”
분명히 크라이스는 황태자가 쫓고 있는 것이 공작 영애인 힐데아가 아니라 치료사 힐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내 능력과 지금 제국을 괴롭히고 있다는 축언 도둑이 무슨 관련성이라도 있다는 뜻인가?
하지만 왜?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일단은, 힐데아. 저는 지금부터 전속력으로 당신을 힐링턴으로 모실 겁니다.”
긴장감에 등골이 찌릿했다.
이곳에서 제국 수도까지는 아무리 빨라도 3주 안으로는 가기 힘든 거리였다.
그렇다는 것은.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조력자가 있, 나요?”
“공간 이능력자. 그곳까지 이동하면 됩니다.”
가브리엘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 다부진 눈빛이 말해주는 것 같았다.
괜찮다고. 다 괜찮을 것이라고.
자신만 믿으라고…….
“그 후에 당신은 힐데아 폰 힐링턴으로 등장할 것이고, 황태자가 어떤 증거를 잡더라도 1주 만에 제국에 나타난 당신과 치료사 힐의 연관성을 증명하진 못할 겁니다. 그러니까.”
그의 고개가 숙여졌다.
곧, 내 손등에 따뜻한 숨결이 닿고, 말캉한 입술이 닿았다.
따뜻해서 눈물이 맴돌았다.
“겁내지 마세요, 힐데아. 당신의 곁에는 언제나 제가 있을 테니.”
그래. 이제 나는 혼자가 아니야.
가브리엘의 눈빛, 목소리, 손등의 입맞춤, 감싸는 분위기.
그런 온기를 지닌 것 중에서도 그의 목소리가 가장 따뜻했다.
*
마차가 무사히 마을의 위치를 빠져나갔을 시점, 벤자민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고고하게 서 있는 어떤 이를 응시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늦으셨군요.”
“하, 하하.”
언덕 위에서 사람들에게 축복의 기도를 읊어주던 남자는 아무렇지 않다는 태도로 벤자민을 응시했다.
그것이 꼭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았다.
크라이스가 빙긋 웃었다.
벤자민은 이를 악물었다. 놀아난 기분이었다.
“이렇게 뻔뻔한 줄은 몰랐습니다. 내 추적에 혼선을 준 것이었습니까?”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치료사 힐.
유명한 꽃집을 운영한다는 어떤 여자에 대해서는 이곳에 파다하게 유명하게 퍼진 소문이었다.
굳이 알아보려 하지 않아도 힐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나온 정보.
은발에 붉은 눈.
기시감이 단박에 드는 외모였다.
하지만 그 마을에 향하기 전, 벤자민은 갑자기 등장한 최고 신관의 뒤부터 쫓았고 도착한 이후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드디어 마주한 크라이스는 언제나처럼 웃고 있었으니까.
어쩐지 지금 당장 치료사 힐을 쫓더라도 그곳에 벤자민이 찾는 사람은 없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분통이 터졌다.
“내가 놓치기를 바라서?”
“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만, 전하.”
왜.
대체 왜 저자는 사사건건 자신을 방해한단 말인가. 대체 왜!
치료사 힐이, 저 최고 신관이 꽁꽁 숨기던 힐데아가 아닌 이상!
‘하지만 그럴 리 없지 않나.’
만약 공작가의 공녀가 그런 특별하고 훌륭한 이능을 지니고 있었다면 힐데아가 그것을 감출 이유가 없었다.
그렇지 않은가.
가뜩이나 로제리엘의 <화려하게 꽃피리라>라는 축언과 대비되던 그녀였는데.
‘치유의 이능이 있었다면.’
그것도 축언 도둑의 능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치유의 이능이었다면 그렇게 꼭꼭 숨겼을 리가 없지 않은가.
단박에 주변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을 터인데.
불길한 축언이라 붙어 있던 꼬리를 단숨에 떼어버릴 수 있었을 터인데.
그러니까 아니다. 아니어야 했다.
힐데아가 그렇게 빛나는 축언과 이능을 지닌 사람이면…….
저와는 다른 사람이라는 뜻이니까.
“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멋대로 추측하고 결론까지 내신 모양이군요, 전하.”
“……어디에 있습니까.”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지?”
“그 사람!”
치료사 힐인지, 아니면 그가 간절히 찾고 있던 여인인지 모를 그 사람!
“이런, 전하. 눈빛이 무척이나 흉흉하시군요.”
하지만 크라이스는 빙긋 웃기만 했다.
“노파심에 말씀드리면, 이곳 주변의 마을 대부분 제국의 마법 잡화상점의 거래 대상이랍니다.”
잡화상점.
그것은 제국의 상업 근간을 뒤흔들고 있는 주축이었다.
그들 상점이 뻗지 않은 곳이 없으니, 귀족들도 대부분 눈치를 보고 있는 강력한 상단.
그러나 상단주의 정체도 모르고, 그들이 얼마만큼의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지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 아주 기이한 집단이었다.
정확한 것은 하나.
그들이 강력한 축언과 이능을 지닌 자들로 추측된다는 것.
“그것을 얘기하는 이유는?”
당장 치료사 힐이 머물렀다는 마을에 가 쑥대밭으로 만들려고 했던 벤자민의 눈썹이 기이하게 일렁였다.
“그러니 전하께서 이곳 사람들에게 강압적인 행동을 하신다면, 잡화상점을 적으로 돌리실 수 있다는 조언을 해드리려는 겁니다. 그건 황후 폐하가 원하는 바가 아니라는 것까지 말입니다.”
“이젠 나를 협박까지 하겠다는 건가요?”
음울하게 가라앉아 있던 벤자민의 입술이 비틀린 것도 그 순간이었다.
“위선자.”
“…….”
“당신이 누구를 위해 일하고 있는지, 정말 내가 모를 거라 생각했나요?”
벤자민은 이를 갈며, 속삭였다.
오늘의 일을 후회하게 될 겁니다, 최고 신관.
*
멀어지는 벤자민의 뒷모습을 보며, 크라이스는 아득히 올라오는 짜증을 집어 삼켰다.
모든 것이 망가졌다. 모든 것이.
안온하고 평온했던 그만의 소중한 보물이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
이제 다시는 그렇게 친근했던 힐데아 폰 힐링턴을 볼 수 없으리라. 곁에 둘 수도 없으리라.
‘그 남자를.’
힐데아가 가브리엘을 바라보던 그 눈빛을 보았을 때, 크라이스는 심장을 칼로 꿰뚫린 기분이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것이 선명한 질투라는 것을.
힐데아의 손을 당겨 벨키우스 공작을 보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오로지 자신만. 자신만 보게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모든 감정들을 벨키우스 공작이 꿰뚫어 봤다는 것도 알았다.
짙게 올라오는 수치심과 패배감 속에서 크라이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스스로가 우스워서.
사랑을 깨달았고, 집착을 얻었고, 그런 주제에 그 여자를 다른 이에게 빼앗긴 상황 속에서도.
“난 오직 그 여자를 위해서 이러고 있는 건가?”
루다나 마을 사람들의 안위 따위 그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곳에서 황태자와 척을 지면서까지 상대한 것은 단 하나.
“모두, 당신 때문이야. 힐데아 폰 힐링턴.”
자신을 신뢰하고 있다는 듯한 그 해맑은 눈빛 때문에.
사실은. 사실은 자신은 지독히 나쁜 새끼였는데도 불구하고.
“당신 앞에서는 좋은 사람이고 싶어져서.”
크라이스는 허탈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도 힐데아의 그 눈빛을 다시 한번 볼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저지를 수 있는 기분이었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