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되돌아가는 길 (2)
약속된 장소로 향하는 길은 제법 더뎠다.
마차로 이동하는 것도 한계가 있어 자연스럽게 그와 함께 말을 타고 이동했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움직여야 했기 때문에 흔적을 남기고 여관에 머물기보다는 숲속에서 야영할 수밖에 없었다.
찌르르 울리는 풀 숲 안.
모닥불을 가운데에 두고 그와 나만 있는 고요한 시간은 제법 나쁘지 않았다.
“나는, 사람이 어려워요.”
이를테면 속에 담아두었던 어려운 말들을 내뱉기에 아주 적절한 시간이었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었어요.”
어젯밤 처음 야영했고, 나는 악몽을 꿨다.
불침번으로 가브리엘만 밤을 새우는 것이 미안하여 눈을 뜨려고 했지만 도닥이는 손길에 정신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오늘은 이틀째 밤이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나를, 나를 애정을 담고 바라볼 수 있다는 것도.”
부드러운 가브리엘의 보라색 눈을 바라보며 대답하는 것을 그는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한결 짙어지는 입매를 보아하니.
“지금은 어떠십니까?”
자연스럽게 얼굴이 뜨뜻하게 달아올랐다.
“……믿을 수 있어요.”
“당신이 사랑스러운 사람이라는 것을?”
짓궂은 미소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사, 사랑.
“그, 그런 말은 좀.”
“부끄러우십니까?”
“가브리엘…….”
그러고 보면 나는 다시 그에게 대답을 돌려주지 않았구나.
우리는 직접적으로 서로에게 마음에 이름을 담아 고백한 적은 없었다.
이를테면, 사랑처럼.
만약 내가 먼저 당신에게 사랑한다고, 당신과 함께라면 꾹꾹 눌러 담고 못 본 척하려던 것들을 마주볼 용기가 난다고 한다면.
‘웃어줄까?’
유심히 바라보는 것을 보며 고민에 빠졌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는 조용히 제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가족들이 걱정되십니까?”
나는 그렇다, 아니면 그렇지 않다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용기가 났고 지금 제국 수도로 돌아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며칠만 지나면 곧 다시 가족들의 얼굴을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외면하고, 내가 도망쳐왔던, 나를 싸늘하고 괴롭게 만들었던 냉대의 속으로.
그러나 환히 웃는 로제가 있었고, 헛기침하며 특별한 신발을 선물해주었던 아빠가 있었고, 무뚝뚝하지만 세삼하게 신경을 쓰던 리라가 있었고, 내가 관심을 두고 살피던 힐링턴의 고용인들이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이 냉대의 일환이라고만 여긴다면 내 시간이 너무 아프다.
“아니면, 다시 반복될까 봐 두려우십니까?”
수도에서 도망치기 전의 일들이.
가브리엘은 그렇게 묻고 있었다.
나는 모닥불이 타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살풋 웃었다.
진지했던 그의 눈썹이 씰룩이는 것을 보면서,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
“솔직히 그렇다고 말하면 겁쟁이가 될까요?”
“왜요. 제가 보기에도 힐링턴의 사람들은 크게 반성해야 합니다.”
응?
그건 의외의 말이었다.
가브리엘은 어린아이가 투덜거리듯, 무척이나 큰 불만을 담고 툴툴거렸다.
“제가 땅을 파고 후회했듯 제 가슴을 치고 후회하라고 하지요.”
저런 식으로 말하는 가브리엘은 처음 봐서 깜짝 놀라 눈을 깜빡이는데, 그가 내 쪽을 휙 돌아봤다.
“그리고 힐데아.”
“네?”
“누군가 사과를 한다고 해서, 무조건 받아줄 필요도, 용서를 반드시 해야 할 필요도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혹시라도 당신께 사과를 하는 이들이 있고, 당신께서 그 사과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으시다면.”
않다면?
“제게 이르십시오.”
응?
“제가 그 상대들에게 백배로 갚아 당신이 괴로웠던 것보다도 더욱더 심하게 괴롭혀주겠습니다.”
그 진지한 얼굴이 얼마나 심오하던지, 가만히 바라보던 나는 결국 아까보다 더욱 크게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푸훗!”
“왜 웃으십니까. 진지하게 말씀드린 것인데. 누구에게든 지옥을 보여줄 각오가-”
“아, 제발, 가브리엘, 그만, 풋!”
내 반응을 보던 그가 시무룩하게 말을 했다.
의도적으로 축 처진 넓은 어깨는 일부러 그러는 것이 분명했다. 나 보라고.
‘아, 미치겠어.’
대체 가브리엘은 언제부터 저렇게 귀여웠을까?
왜 나는 그걸 몰랐을까?
“필사의 마음을 담아 내뱉은 말을 그렇게 웃음으로 받아들이시다니.”
“아, 죄, 푸흐, 하지만 당신의 얼굴이…… 이제 제발 그만해요.”
이제 배가 당길 지경이었다.
가브리엘이 설핏 웃는 모습을 보며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당신이 웃으시니 좋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덜컹, 솔직담백하게 마음을 고백해올 때면 숨을 멈추게 된다.
흔들리는 눈빛으로 가브리엘을 바라보면 시선이 닿고, 눈을 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꼭 그와 나, 단둘이 있는 시간이 동결되어버린 것처럼.
그때 그의 눈이 살풋 휘었다.
꼭 방금 전에 내게 장난을 쳤을 때처럼.
아, 그가 내 표정을 구분할 수 있겠다 했던 것처럼 나도 구분할 수 있는 것이 더 생겼다.
그가 귓불을 붉힐 때는 부끄러운 것이고, 지금처럼.
‘저렇게 아이처럼 웃을 때는.’
장난을 치는 것이구나.
“혹시 이것도 화분 때처럼 오해인가 싶어 여쭙니다.”
“네? 뭐가요?”
“힐데아, 넓은 어깨가 마음에 드십니까? 아니, 취향이십니까?”
“……네?”
어. 나는 잠깐 멍해졌다.
그리고 그가 내뱉은 말을 곱씹은 뒤에 얼굴이 뻥, 하고 터져버릴 지경이 되었다.
“무, 무, 무슨 말을 하는…….”
“당신께 잘 보이고 싶은 마음으로 어깨 단련을 열심히 했는데, 제 어깨도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군요. 예쁘게 봐주세요, 힐데아.”
그야 가브리엘의 어깨는 여태까지 봐온 누구보다도 예쁘고 넓…… 긴 한데, 지금 중요한 게 그게 아니잖아!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그가 했던 말들에 따르면 저런 말을 해줄 사람은 우리 로제밖에 없었다.
아, 로제. 로제야. 제발, 대체 무슨 말을 하고 다닌 거야?
그때 가브리엘이 빙긋 웃었다.
“이건 틀리지 않았나 봅니다.”
안 되겠다. 저 입을 막아야지. 또 무슨 소리를 하기 전에!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서 그의 곁으로 가 단정한 입술을 틀어막은 것은 그 순간이었다.
“…….”
“…….”
말랑한 감촉이 손바닥을 스치고 나서야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그리고 그가 얼마나 놀란 눈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그때, 가브리엘의 눈이 부드럽게 휘었고 손바닥에 닿은 입술이…….
“으, 가브리엘!”
촉, 하는 소리가 났다.
나는 기겁하며 손을 떼어냈지만 이번에는 가브리엘이 먼저 손을 뻗었다.
굳은살이 박인 엄지 끝이 어울리지 않게 살랑거리며 내 손바닥 안쪽의 피부를 간지럽혔다.
“저도 몰랐습니다, 힐데아. 제가 이렇게 누군가와 닿는 것을 좋아하는 줄.”
손이 불타는 것 같다.
아니, 불타는 건 그의 시선이 닿는 내 피부 곳곳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사람의 눈이 저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나는 홀린 듯이 가브리엘의 보라색 눈을 응시했다.
그 순간 알았다.
이제 무슨 일이 있어도 지금의 저 열기를 잊을 수 없다는 것을.
“질릴 정도로 당신의 손을 잡고 싶고, 이 손가락에 몇 번이나 입맞춤 하고 싶습니다.”
가브리엘은 꾹 막혔던 입의 봉인이라도 풀린 사람처럼 굴었다.
아무렇지 않게 툭툭 내뱉는 그 달콤한 말들에 나는 그대로 손과 발이 없어질 것처럼 부끄러웠다.
제일 수치스러운 사실은 그 말들이 닿을 때마다, 심장이 펄럭거리며 뛰었다는 것이다.
좋아서.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그, 그만해요.”
너무 좋아서 울 것 같은 건 참으로 이상한 기분이었다.
“신기하군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지금 확실히 알았는데.”
다시 한번 촉, 하고 이번에는 검지 끝에 그의 입술이 닿았다.
“으. 가, 가브리엘! 나 좀 그만 놀려요…….”
파드득 떨리는 손이 완전히 멀어지고 나서야 그는 아쉽다는 듯이 내 손을 응시했다.
아니요, 아무도 내 손에 설탕 안 발라놨어! 왜 그렇게 아쉽게 입을 다시는 건데요?
“당신의 감정에 따라 식물이 영향을 받는 것 같습니다.”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에, 밤이어서 조용히 잎을 접었어야 했을 풀잎이 활짝 펴진 것이 보였다.
꼭 기쁨의 춤을 추는 것처럼.
내 기분을, 반영하는 것처럼.
“그렇다면 지금 당신께서 기분이 좋으시다는 뜻이겠지요.”
그래. 내가 바보였다. 빨리 잠든 척을 하자. 그게 낫겠어!
“……저, 저는 졸린 것 같아요.”
부드럽게 웃고 있는 눈인데도 마주하면 등골이 오싹해지고, 심장이 터질 것 같으니 나는 잠으로 도피하기로 했다.
“아쉽군요.”
안 들려요, 안 들려.
더 대화를 나눴다간 얼굴이 없어질 거야.
나는 모포를 휙 덮은 채 눈을 꼭 감았고 나직하게 번지는 가브리엘의 웃음소리에 다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진짜. 진짜 못됐어.
아직도 손가락에 닿았던 그 뜨거운 감촉에 나는 괜스레 손을 꼬물거렸다.
간지럽고, 뜨거웠다.
꼭 그곳에 꽃이 피어난 것처럼.
*
쌕쌕 잠든 힐데아의 숨소리를 들으며, 가브리엘은 뻑뻑한 눈을 문질렀다.
아무리 철인 같은 체력을 지닌 그였다고 하더라도 앞으로의 일정은 꽤 무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래야했다.
그때였다.
품에 숨겨두었던 통신구에서 희미한 진동이 울렸다.
엎어가도 모를 듯 푹 잠든 힐데아를 힐끗 본 뒤에 그는 통신구를 작동시켰다.
-드디어 연락이 닿았군요.
피곤한 낯의 그의 부관, 디안이었다.
“어떻게 되었지?”
-축언을 도둑맞았는데도 살아난 자가 있었고, 그자가 암시장의 치료사 힐의 식물을 통해 살아났다고 증언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황후는 황태자를 이용해 먼저 찾으려 했고, 황제는 어떻게든 치료사 힐을 찾아내 축언 도둑과의 연관성을 만들어낼 속셈인 듯합니다, 주군.
그게 사실이라면 당장 받들어 모셔도 모자란 판에, 잡아 오라 했다?
‘이 얼마나 치졸한지.’
“지금은 둘이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확인하지 못하게, 최대한 일찍 도착하는 수밖에 없다. 결론은 같군. 힐은 스스로를 딱히 숨기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흔적이 많지만, 실제로 힐의 얼굴을 아는 것은 루다나 마을 사람들뿐이니.”
-네, 그렇습니다. 따로 언급주신 그 후작들 건에 대해서는 단단히 입막음을 해두었으니 문제가 없을 거예요. 입 잘못 놀렸다간 왕국부터 말아먹게 생겼으니.
“다 거슬려.”
이제 겨우 평온해진 사람인데.
벌써부터 이용하려고 손을 뻗는 꼴들이 아주 꼴 같지도 않았다.
“어처구니가 없군.”
힐데아의 잠든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가브리엘의 입술이 비틀린 것이 그때였다.
-주, 주군?
불안한 기분에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부관을 보며, 가브리엘은 어둑해진 눈으로 으르렁거렸다.
“차라리 황태자를 죽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