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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118화 (118/155)

118화. 되돌아가는 길 (3)

-네에에엑? 주, 주군!

살벌한 가브리엘의 목소리에 디안은 그야말로 졸도할 것 같은 얼굴을 했다.

-그, 그거 그냥 살벌한 농담이 아니신 거죠, 네?

가브리엘은 당연하다는 듯 차갑게 비웃었다.

“우습군. 내가 이런 것으로 농담을 하던가? 당연히 진담이다.”

-네에, 그렇죠…….

디안은 목이 졸린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것으로 농담하실 분이 아니시죠. 그래서 더 문제라는 것은 좀 알아주셨으면 하는데……. 잠깐. 아니면 주군, 설마.

통신구 안, 디안의 눈이 급격히 흔들렸다.

-주군께선 이미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계신 겁니까?

“글쎄.”

-아, 속시원히 말씀 좀 해주십쇼!

가브리엘은 무의식적으로 잠든 힐데아의 얼굴을 눈에 담았고, 살벌했던 기색이 살짝 누그러졌다.

통신구 안에서 그 변화를 모조리 목격하고 있던 디안이 ‘허어, 그렇게 좋으십니까?’라고 묻고 싶은 얼굴을 했다.

그것을 보지 못한 가브리엘은 입을 달싹였다.

“사건을 은폐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목격자를 처리하는 것이지.”

-그 목격자가 제국의 황태자이면 상황이 좀 달라지지요. 그런데 주군, 그 최고 신관은 정말 믿을 만한 자입니까?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아니.”

가브리엘의 입술이 차게 비틀렸다.

“믿을 수 없다.”

만약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면 크라이스가 황태자를 맞이하게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더욱 완벽하게 치료사 힐과 힐데아의 연관성을 잘라낼 수 있었을 텐데.

“황태자는 최고 신관이 힐데아를 숨기고 있다는 의심을 했던 것 같던데.”

-아……. 확실히 황궁 세작에게서 그런 이야기가 보고된 적이 있었더랬죠.

“그래서.”

-당시 저희 쪽에선 말도 안 되는 추측이라 생각하고 그쪽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만, 이제 보니 완전히 틀린 게 아니었던 모양이네요. 영애와 아는 사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래. 꽤나, 친분이 깊은.”

-……이런.

가브리엘의 입술이 불만으로 씰룩거렸다.

하필이면 왜 그 음흉하고 속을 알 수 없는 최고 신관이었을까?

지금도 힐데아에게 향하던 그 되바라진 눈을 생각하면 신경질이 치솟았다.

아니, 그냥 그 남자가 불길했다.

당장 그놈이 힐데아 그림자도 밟지 못하게 떼어버리고 싶을 만큼.

‘이건 단순한 질투인가. 아니면 그 새끼가 불길하다는 직감인가.’

대체 그자의 무엇이 힐데아로 하여금 굳건한 신뢰를 쌓도록 하였을까.

“최고 신관 크라이스를 샅샅이 조사해라. 최고 신관에 오르기 전에는 어땠는지, 어디에 있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낱낱이.”

-어, 예. 알겠습니다.

아마 이 사실을 힐링턴 공작이 알게 되면 펄쩍 뛸지도 모르겠다.

하필이면 신전, 그것도 최고 신관이라니. 악연도 이런 악연이 없는데.

“어쨌든 루다나 마을은 잡화상점을 앞세워 보호했으니, 당장은 내가 이곳에 있었다는 것을 알아내진 못하겠지.”

-원래 계획보다 허술하게 처리한 것은 어쩔 수 없었으니, 황태자의 의심의 싹을 자르기는 쉽지 않을 거예요, 주군.

“의심은 하겠지. 그러나 증거가 없다. 억측일 뿐이니 대놓고 문제 삼지 못해. 그렇게 하게 두지도 않을 것이고.”

-나중에라도 이용할 수 있겠지요. 축언 도둑 건이 정리되지 않았으니까.

축언 도둑.

축언과 이능을 지닌 자들에게서 그 축복을 빼앗아가는 것. 독인지, 사람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그것 때문에 여러모로 곤란해진 자들이 많았다.

그리하여 귀족들 중 누군가는 일련의 사태에도 흔들림 없이 누군가만 찾는 데 열중하고 있는 벨키우스와 힐링턴이 사실 이 사건에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음모론까지 내뱉고 있다는 것을 안다.

즉, 치졸한 제국의 귀족들은 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희생자를 찾고 있다.

팽팽하게 치솟은 불안과 두려움을 쏟아버릴 수 있는 누군가를.

‘그것이 힐데아가 된다면.’

그나마 다행인 것은 힐데아의 뒤에는 이 제국에서 가장 강한 가문인 벨키우스와 힐링턴이 버티고 서있다는 것이다.

설령 황제가 와 그녀를 내놓으라 하여도 쉽게 내놓지 않을 수 있을 만큼.

하지만 만약 신전과 황궁이 손을 잡고 압박하는 상황이 또다시 벌어진다면, 그렇다면.

제국을 뒤엎는 수밖에 없으리라.

가브리엘의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그러다 모닥불로 인해 여러 가지 빛으로 일렁거리는 힐데아의 머리카락에 시선이 닿았다.

“…….”

뾰족했던 눈이 크림처럼 누그러졌다.

피를 보는 것은 두렵지 않다.

얼마만큼의 피를 묻혀도 상관없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그가 가장 잘하는 것 중 하나였다.

그러나 문제는 힐데아.

분명 힐데아는 상처받을 것이다.

가뜩이나 마음의 상처가 많은 저 사람은 자신으로 인해 혼란이 벌어지는 것을 참지 못할지도 모른다.

가브리엘은 오로지 그것만이 두려웠다.

“황태자뿐 아니라 황제 쪽 기사들도 있으니, 혼란을 주어야겠지. 가짜 대역을 만들어 주변에 배치해라, 디안.”

-아, 이미 그쪽은 잡화상점과 함께 준비 중입니다.

“잘했다. 그리고.”

-……네?

“축언 도둑 피해자가 힐의 이능으로 살아났다면 확실한 것은 하나 있군.”

디안이 통신구 안에서도 도통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엇입니까, 주군?

“그 축언 도둑은 이능력자를 죽이는 독도, 전염병도 아니다.”

-네?

“사람이다.”

-네에?

디안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그건 이능이라는 소리다. 정확히는 축언을 없애는 이능력자의 능력이겠군.”

-아니…….

잠시 입을 헤 벌린 채 듣고 있던 디안이 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 그렇다면 이게 모두 어떤 사람의 짓이라는 건가요? 그럼 그 범인만 잡으면 모두 정리되는 일이겠군요!

하지만 그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상대의 이능을 축소시키거나, 무효화시키는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황궁의 온갖 것들이 죄다 실험을 해보았는데도 여태 그것이 이능인지 알아내지 못했었다는 것은.

‘그 축언 도둑이라 불리는 이능이 제국의 현존하는 이능을 가뿐히 뛰어넘는 것이라는 뜻.’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빼앗긴 축언과 이능을 돌아오게 만들진 못했으나, 그 대단한 이능을 힐의 이능이 치료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본인이 직접 능력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식물에 담아놓은 능력만으로 죽어 가는 사람을 멀쩡히 살렸다.

그 뜻은 곧.

‘힐의 능력이 축언 도둑보다 상위의 이능이라는 것이겠지.’

다른 모두가 그것을 모르더라도, 범인만큼은 그 뜻을 알아냈으리라.

그렇다면 범인이 취할 행동은?

까득, 가브리엘의 잇새에서 살벌한 소리가 들렸다.

‘주군?’ 하고 아연하게 묻는 디안을 보지도 않은 채, 그는 힐데아만을 눈에 담았다.

이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달려드는 피라미 새끼들 외에도 범인은 어떤 방식으로든 힐데아를 노리게 될 것이다.

빌어먹을.

가브리엘은 거칠게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안전하게, 행복하게, 지금의 힐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도록 편안하게 해주고 싶었는데 왜 자꾸 이렇게 귀찮게들 구는 것인가.

다 죽여버리고 싶어지게.

“힐을 데리고 단둘이 도망칠까.”

-주, 주군. 안 됩니다아……. 지금 소식을 들은 힐링턴 사람들이 눈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다고요!

“100년은 더 기다리라고 해.”

-주, 주군!

절절한 디안의 말을 무참히 씹어 삼키며, 가브리엘은 힐데아의 창백한 손끝을 조심스럽게 맞잡았다.

“……괜찮습니다, 힐.”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개미 새끼 한 마리 당신께 닿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제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

“완전히 놓친 것 같군요.”

황태자 벤자민의 어둑한 시선이 고요한 마을에 닿았다.

평범해 보이지만 저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대기하고 있던 잡화상점의 인간들과 척지게 될 것이다.

무시하고 짓밟으려면 짓밟을 수 있다. 하지만.

“어머니께 보고해야겠습니다.”

“예, 전하. 저희들은 뒤로 물러나겠습니다.”

“그래요.”

벤자민은 거기서 더 나아가지 않고 일단 통신구를 꺼내 들었다.

한숨을 한 번 쉰 뒤 작동시키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사나운 기색의 누군가가 바로 비췄다.

-어찌 되었지, 황태자?

“……어마마마.”

-설마 놓친 것이야?

날카로운 목소리에는 살기마저 담겨 있었다.

“……죄송합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끌고 오라 하였지 않았느냐, 그런데 평범한 평민 하나를 놓쳐? 기사들을 그렇게 많이 끌고 가놓고서 이 무슨 한심한 결과란 말이야!

아마 앞에 있었다면 물건을 집어던지고도 남았을 분노였다.

“잡화상점이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그 치료사가 머물고 있던 마을을 보호하고 있어, 진입하지 않았습니다.”

황후의 눈썹이 확 치솟았다.

-그것들이 여기서 왜 나온단 말이지? 그 치료사가 그렇게 대단한 자란 뜻이냐?

“그리고 또.”

-또 무엇이야. 대체 이 어미의 심기를 어디까지 거스를 셈…….

“최고 신관의 등장으로 혼선을 빚었습니다.”

-……뭐라?

방금까지 묵묵하고 유순하게 내리깔려 있던 벤자민의 눈이 그 순간, 제 어미의 기색을 기민하게 훑었다.

황후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다시 물었다.

-지금 최고 신관이라 하였어?

“예, 분명 그였습니다.”

당장이라도 벤자민을 할퀴기라도 할 것 같았던 황후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꼭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이.

잠시 뒤, 황후의 냉정한 목소리가 벤자민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힐데아 폰 힐링턴, 그 아이에 대해 이 어미가 준 기회는 잊어라.

“……어마마마.”

흔들리는 벤자민의 눈을 보며, 황후가 냉소했다.

-이 어미는 기회를 주었고, 그 소중한 기회를 놓친 것은 황태자, 너라는 것을 명심하여라. 일을 망쳤으니 신속히 돌아오라. 단, 황제의 기사들과 마주치지 않도록!

빠르게 할 말만 한 황후가 벤자민의 말을 듣지도 않고 통신구를 끊어버렸다.

서늘한 침묵 뒤, 벤자민은 아까와는 다른 표정으로 웃었다.

서늘하고 비틀린 미소였다.

그는 짓씹듯이 듣지 않는 어미를 향해 말했다.

“……하지만 치료사 힐이 누구인지는 알아낸 것 같습니다, 어마마마.”

당신께선 듣지 않으셨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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