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당신을 더 좋아하게 될 거예요
어머니에게 전하지 않은 말을 짓씹으며 벤자민은 눈을 깜빡였다.
확실한 증거는 없다. 증인도 없다. 오로지 추측과 감일 뿐이다.
그러나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는가?
‘힐데아가 치료사 힐이다.’
그는 확신했다.
힐데아를 숨기던 최고 신관이 하필 치료사 힐을 쫓는 순간 나타나 방해를 했다.
사라진 치료사의 인상착의는 행방불명되었던 그녀와 똑같다.
하필 이름도 치료사 힐이다.
그러나 증언을 할 수도 없으니, 빈손으로 되돌아간 벤자민의 말을 증명할 수단은 하나도 없다.
그렇다고는 하나, 치료사 힐이 정말 힐데아라면 힐데아의 이능은 축언 도둑을 막을 수 있는 수단이라는 뜻이다.
그것이 벤자민의 심장을 쿡 쑤시게 했다.
그는 힐데아가 반짝거리며 빛나지 않길 바랐다.
밝고 화사한 동생 로제리엘과는 달리 그림자 같은 힐데아 영애.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당신을 보러 가겠습니다. 그리고 결정할 거예요. 당신이 나를 선택할지, 아니면 다른 자를 선택하는지에 따라.’
벤자민의 눈에 담긴 것은 선명한 질투였다.
불쾌했다. 힐데아와 같이 이동한 것이 벨키우스나, 힐링턴의 인간이라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거리를 단축해 자신보다 일찍 수도에 도착할 것이다.
바로 코앞에서 빼앗긴 기분이었다.
벤자민은 자신이 그런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지금 처음 깨달았다.
어떤 것에 대한 선명한 욕심, 탐욕, 소유욕, 그리고 지배욕.
“전하? 어디 불편하십니까?”
가까이 다가온 기사는 심상치 않은 기색의 황태자를 보며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벤자민의 입에서는 싸늘한 명령만 튀어나왔다.
“이번 여정에서 듣고, 알아낸 모든 것들은 경들의 머릿속에서 깔끔히 지워야 할 겁니다. 알겠습니까?”
기사들은 깜짝 놀랐다. 저도 모르게 고개까지 숙인 채였다.
그들이 알던 벤자민 같지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생각했다.
대체 그 치료사가 누구길래, 저리 집착 어린 시선을 보낸단 말인가.
보기만 해도 오싹한…… 시선을.
“하, 하지만 전하. 돌아가면 황후 폐하께 보고를 해야,”
“압니다. 다만 복귀한 후, 상황을 확인한 뒤에 내가 직접 어마마마께 전할 겁니다. 그러니 쓸데없는 것들은 함구하세요.”
그는 제국 방향 쪽을 응시했다.
어딘가에서 자신을 피해 도망치고 있을 힐데아를 상상하며.
이미 처음에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도 잊어버린 번들거리는 눈동자는 차가웠다.
‘당신이 나와 같길 바라요. 난 여전히, 우리가 서로의 고독을 이해할 수 있는 완벽한 한 쌍이 되리라고 믿어요, 힐데아.’
축복 받은 최고 신관도, 제국의 영웅인 가브리엘도 아닌 바로 자신과 함께.
‘그러니 변하지 말아요. 빛나지도 말아요. 당신은 그대로……. 그대로 힐데아 폰 힐링턴으로 있으면 돼.’
그 섬뜩한 눈은 그의 어미, 황후를 처절하게 닮아 있었다.
자신이 갖지 못한다면, 모두 부숴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그 끈적끈적한 집착을.
“모두, 최대한 빨리 돌아가죠.”
“예, 전하!”
*
정신없이 도착하여 목적지인 마을에 도착한 것은 좋았다.
“정말 괜찮을까요?”
“물론입니다.”
“하지만…….”
난 걱정 어린 목소리로 가브리엘에게 물었고, 그는 자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 분위기 너무 살벌하잖아.’
정말이었다.
아직 제국에서는 먼 곳이라 이런 분위기를 상상한 적 없었는데, 꼭 전쟁이 나기 직전처럼 병사들이 오가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곳곳에 붙어 있는 저 수배 전단.
난 보자마자 너무 어이가 없어 입이 떡 벌어졌다.
‘저게 정말 나라고?’
치료사 힐.
그리고 그 아래에 그려져 있는 얼굴.
어이가 없어 코웃음이 쳐졌다. 저 전단으로 백날 찾아봐라. 내가 잡히나.
“저건 좀 너무하잖아요.”
“……그래도 다행이지 않습니까. 전단을 보고 당신을 신고할 사람은 없을 것 같군요.”
“아니, 그건 그렇지만 기분이 이상해요. 지나가다 대뜸 욕먹은 것 같고, 음.”
물론 외, 외모에 대한 자신감이 넘치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저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난 눈을 찌푸리며 전단을 유심히 살폈다.
그런 내 모습을 이상하다는 듯이 지나치는 사람들이 바라보곤 했으나, 가브리엘이 옆을 가리자 언제 쳐다봤냐는 듯 시선이 흩어졌다.
“봐봐요, 가브리엘. 이거 정말 너무해요. 기념으로 한 장 떼어갈까 봐요…….”
난 심란한 눈으로 그림의 요소를 하나씩 집었다.
은발이 아닌 백발에 가까운 머리카락.
사람 머리카락이 아닌 빗자루같이 쭈뼛쭈뼛 묘사된 형태는 꼭 열흘은 머리를 감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게다가 피를 빨아먹는 뱀파이어처럼 창백한 피부와 얼굴.
눈 밑의 검은 그림자와 쫙 찢어진 입술.
‘저게 귀신이지 사람이야?’
멍한 내 기색을 알아챈 것인지, 옆에 바싹 붙어 있던 가브리엘에게서 웃는 기척이 났다.
나는 그를 제법 사납게 노려봤다.
“뭐야. 지금…… 웃었어요? 전 이렇게 심란한데 웃은 거예요?”
“흠, 아닙니다.”
정색해봤자 소용없다.
“발뺌하지 말아요. 다 들었어요. 지금 저 전단지 보고 웃은 거잖아요…….”
“전 그 그림을 보고 웃은 게 아니라 당신이 귀여워서.”
아.
“그래서 웃은 겁니다.”
안 돼.
“평소엔 당신의 시선을 항상 나누어 가져야 했는데, 단둘이 있으니 좋습니다. 배부른 기분과 비슷하군요.”
제발 그만!
‘어떡해.’
반사적으로 뜨겁게 열이 올라오는 얼굴을 얼른 후드 자락으로 가렸다.
“힐?”
“그, 그만……. 그만 봐요.”
내 얼굴, 지금 엉망일 거야.
‘이게 다 가브리엘 때문이야.’
방금 날 내려다보며 웃는 가브리엘의 모습이 너무, 정말 너무…… 달았다.
정말 설탕처럼 달았다고.
‘어떻게 저렇게 웃지?’
사르르 접히는 다정한 눈매와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는 입매.
“힐데아. 혹시 제가 자꾸 놀려서 화나셨습니까?”
놀렸다는 자각은 있었구나.
입술을 삐죽거리면서도 난 고개를 저었다.
그가 오해하는 것은 바라지 않았으니까.
“그러면?”
부끄러워서!
당신 때문에!
“당신이 그렇게 웃으면.”
“제 웃음 말입니까?”
뭐 하나 모자란 것 없이 아름다워서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이 저 미소를 보면 분명 가브리엘에게 반하는 사람이 더 늘어나고 말겠지.’
난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웃지, 웃지 말라고 할까……?’
하지만 그건 싫었다.
“힐데아?”
후드 속에서 눈만 살짝 빼서 빼꼼 올려다보니, 여전히 배부른 짐승처럼 웃고 있는 가브리엘과 눈이 마주쳤다.
아이씨. 심장이 아프다.
“우, 웃지 말…….”
“아. 웃는 것이 싫으셨다면, 웃지 말까요.”
“……아니요!”
저렇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몰랐던 시간이 아깝고,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었으니까.
웃음을 보기 싫은 게 아니야.
그 웃음을 나에게만.
‘나만 보고 싶어.’
헉, 하고 나는 헛숨을 들이켰다.
세상에. 너 지금 무슨 생각한 거야, 힐데아 폰 힐링턴.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 생각도 안 했어요.”
“음…….”
도망치고 있는 상황에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는 것이 놀랍고, 그만큼 내가 가브리엘을 믿고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 더 부끄러움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기 때문이다.
의지하고, 믿고, 신뢰하고, 기대고.
그런 것들은 내게 억만 광년은 떨어져 있는 것들이었는데.
대체 어느새.
‘당신, 날 어떻게 물들인 거예요.’
이제는 가브리엘이라는 남자가 무서워질 지경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당신을 당혹스럽게 만든 것이 저인 듯합니다. 그래도, 힐데아.”
후드자락을 부드럽게 잡아당겨 얼굴을 내밀게 만든 가브리엘이 날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절 봐주세요.”
“…….”
“시선을 피하는 건 싫습니다.”
“그,”
“언제, 어디서든 제가 당신을 살피게 해주세요.”
커다란 손이 이마를 덮은 것도 그 순간이다.
나는 돌덩이가 된 것처럼 숨만 내쉬고, 눈만 깜빡였다.
“아무래도 열이 있으신 것 같은데. 의원을 찾아가야겠습니다.”
적극적으로 달콤한 말만 쏟아내는 남자는 가끔 이런 식으로 무지한 척 굴었다.
“어제 야영할 때 추우셨습니까? 제가 세심하지 못했습니다.”
다정히도 접촉했다.
심장이 욱씬하고 쑤셨다.
당신이 부끄러운 말을 할 때마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뜨거워지는 건데 그걸 정말 몰라요?
왁 하고 소리치고 싶을 만큼 뜨거웠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이 세계가 <영애는 달콤하다>의 소설 속이라는 것에 얽매여 있었다.
내 여동생이 여자주인공이고, 그가 남자주인공이라는 생각에 매인 듯이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런 생각들은 내게 먼지만도 못한 것이 되었다.
그래서? 그게 어쨌단 말이야.
대신 지금의 이 감정에 집중하게 되었다.
내가 당신을 보면 좋아. 웃음이 나와. 얼굴이 빨갛게 변하고 심장이 뛰어.
오랜 시간을 돌아서 내 마음에만 집중하게 되었어요, 가브리엘.
나 힐데아가 가브리엘, 당신을 좋아한다고.
“힐?”
나를 부르는 당신 목소리가 좋아요. 쓰다듬는 커다란 손이 따뜻해요.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나는 시간이 갈수록 당신이 더 좋아질 거야.
그래, 벅찬 확신이 들었다.
용기가 샘솟았다.
지금이라면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브리엘!”
“예?”
“저는.”
그의 옷자락을 움켜잡으며 발돋움했다.
“저요, 제가.”
더 시선이 닿고 싶어서, 다급히 그를 잡아당겼다.
어쩐지 퍽 당혹스러운 얼굴을 하는 그를 똑똑히 눈에 새기며 우리 사이의 거리를 더 좁게 당겼다.
더.
더 가까이.
나 좀 봐요.
내가.
내가 당신을 좋아해.
지금 이걸 말해야겠어.
말해야 해.
“당신을 조…….”
바로 그때였다.
바로 뒤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여기다! 여기, 전단 용의자를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