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그들은 후회한다 (1)
설마 들켰다고?
말도 안 돼. 대체 어딜 보고?
난 황망한 시선으로 공포의 수배 전단을 바라봤다.
저 엉망진창 그림을 보고 나인 줄 알았다면 설마 저 그림과 내가 닮았다는 소리……?
그때, 내 쪽으로 고개를 숙인 가브리엘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괜찮습니다, 힐데아.”
“네, 네?”
“잡힌 것은 우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다른 사람이라고요?”
“예. 저길 보세요.”
가브리엘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린 나는 다시 한번 어이없는 모습에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어, 그러니까…….
“누가 봐도 똑같이 생겼군! 이봐, 같이 가줘야겠어!”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소리치는 자는 아무래도 황제 쪽에서 보낸 사람인 것 같았다.
기사인 것은 감추려고 했는지 평범한 복장을 하고 있긴 했지만, 허리춤에 있는 장식이 황궁인장이 찍혀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고, 사람 잡네! 사람 잡어! 난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니까! 놓지 못하냐!”
“흥, 뻔뻔하기 그지없군! 네가 바로 그 사기꾼 힐이라는 자가 아니냐!”
와. 나는 그들의 대화를 보며 감탄했다.
어쩜 저렇지. 저 사람, 전단 속에서 뛰어나온 것처럼 생겼잖아…….
일련의 그 사태를 보며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이상해요. 대체 저런 수배 전단은 누가 돌린 거고, 어떻게 저 전단과 저리 닮은 사람이 떡하니…….”
나는 멈칫했다.
“나타나 이득을 본 사람은.”
“흠.”
태연한 기색의 가브리엘을 바라보고, 그가 내 눈을 마주치며 뜨끔 하는 것까지 확인했다.
“우리네요.”
“…….”
“설마 가브리엘이 한 거예요?”
“…….”
“어떻게요?”
그래, 그렇지 않고서야 말이 되지 않는다.
치료사 힐을 찾고 있는데 저런 말도 안 되는 외양이 갑자기 튀어나왔을 리는 없으니, 아마 루다나 마을 사람들이 협조해서 만든 것이 저것일 것이다.
그리고 발 빠른 누군가가 저 엉망진창의 전단과 비슷한 용모의 사람들을 꾸며서 주변에 두었다면.
하지만 대체 언제?
나는 가브리엘의 능력에 혀를 내둘렀다.
역시 내가 걱정하지 않아도 그는 자신의 세력을 착실히 불리고, 힘을 단단히 해왔구나.
“가브리엘,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저런 사람들이 주변에 열댓 명은 있겠구나, 하는. 그런가요?”
가브리엘은 잠시 표정이 굳긴 했지만, 내 말에 부정하진 않았다.
“……네, 맞습니다.”
역시.
“아마 저런 자들을 셀 수 없이 잡아갔을 겁니다.”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음, 너무 순순히 고백하네요.”
무엇 하나 속이지 않겠다는 듯.
이제부터 솔직하게 모두 말하겠다는 그의 의지가 보이는 것 같아 괜히 가슴 속이 간질간질해졌다.
흘러나온 대답은 역시나 그랬다.
“당신에게 숨길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물어보세요. 언제든 답하겠습니다.”
난 괜스레 또 열이 오르는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기사들은 혼란에 빠졌겠군요. 비슷한 용모의 사람이 너무 많아서. 대체 누가 치료사 힐이 누군지 찾느라 시간을 또 허비할 거고요.”
가브리엘이 피식 웃었다.
그건 내게 향할 때와는 다른 제법 찬 미소였다.
크라이스한테도 저렇게 웃었었지.
성질 나빠 보이는 미소도 저렇게 잘 어울리다니…….
“그렇습니다. 결국 황제에게는 그런 식으로 보고가 올라갈 겁니다. 그중 누구도 치료사 힐이 아니었다는 것으로 종결할 테고.”
“아…….”
“황제는 당신과 치료사의 공통점을 찾지 못하게 될 겁니다. 적어도 당장은.”
음, 완벽하네.
이게 급히 이동하며 처리된 일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아무리 그래도 상대는 황제가 부리는 기사들이었다.
나는 이동하는 동안 가브리엘로부터 황태자부터 황제까지 나를 찾고 있는 이유가, 축언 도둑에 당했던 사람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그것도 하필 내가 암시장에 판매했던 식물을 사용해서.
그래서 날 찾고 있다고.
나는 어쩐지 저릿한 손을 쥐락펴락 반복했다.
돌아가면 아주 복잡해지겠어.
치료사 힐인 것을 들키든, 들키지 않든…….
‘내 이능이 그렇게 대단할 리는 없지만.’
혹시 내가 그 축언 도둑을 막을 수 있을까?
생각에 빠져 조용히 한 것인데, 그는 내가 저 사람들을 걱정한 것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저들의 안위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평범한 자들이 아니어서 자기 한 몸은 지킬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궁금증이 솟았지만, 지금은 일단 몸을 숨기고 움직이는 것이 중요했다.
괜히 관심 두고 시선을 두다가 이목을 끌면 곤란했으니까.
“그럼 이제 우린 어떡하죠?”
나는 가브리엘을 바라보며 물었으나, 대꾸한 것은 그가 아니었다.
“부부행세! 이럴 때 등장하는 건 그런 거 아닌가요?”
그래, 부부……가 아니라.
뭐, 뭐야.
갑자기 끼어든 그 명랑한 목소리에 나와 가브리엘이 동시에 굳었다.
지금 들었어요?
예, 들었습니다.
시선으로 대화한 우리는 동시에 옆을 바라봤고, 한 사람을 마주했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손, 여유 만만한 웃음, 그리고 저 익숙한.
‘익숙한 목소리?’
설마.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당신은…… 잡화점의 안내인?”
안내인이 호탕하게 웃었다.
“오랜만이네요, 고객님!”
……당신이 왜 여기서 나와요?
*
띠링.
-은발이 최고야님이 입장하셨습니다.
-발닦개가되겠어요님이 대화에 초대되셨습니다.
.
.
.
띠링.
띠링.
그 뒤로도 연신 울리는 알림음과 함께 많은 자들이 대화에 참여했다.
침묵이 흘렀지만, 평소와는 달리 차분한 말투의 대화가 올라왔다.
-돌아오신대요.
아무도 대꾸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 공통된 생각에 설렜을 것이다.
떨리고, 두렵고, 보고 싶고, 그러면서도 무섭고.
주저하면서도 누군가 말을 먼저 걸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누군가가 음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이제 이런 거 그만 해요.”
그 목소리는 현실의 목소리였다.
고용인들이 쉬는 공간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한 번 더 크게 울리는 그 목소리는 각기 다른 곳에서 종이에 적을 준비를 하던 이들에게 닿았다.
“우리 이제 이런 거 그만 해요! 이게 다 무슨 소용이에요!”
그 울분에 찬 목소리는 바로 시엔이었다.
항상 차분하고 고요했던 시엔의 목소리라고 생각할 수 없이 사정없이 떨리는 음성.
“나와요. 나와서 대화해요!”
벌컥 문이 열렸고, 그 소리를 따라 다른 고용인들이 쉬는 공간의 문도 하나씩 열렸다.
“…….”
“…….”
“다들.”
모두가 휴식 공간에 모였다. 손에는 노트나, 종이가 들려 있는 채였다.
시선이 마주쳤다.
이번에는 리라가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뒤에 숨지 말고.”
리라의 차분한 목소리에 모두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또 후회하면 안 되잖아요. 또 그분을 상처 입히면 안 되잖아요.”
아가씨. 힐데아 아가씨.
“아가씨가 오신다는데. 정작 우리가 달라진 게 없으면 어떡해?”
이름만 들어도 눈물이 울컥 차오르는 고귀한 아가씨가 돌아온다.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이 저택의 가주는 물론이요, 언니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동생, 그리고 힐데아 아가씨의 그림자만 밟아도 좋은 고용인들 모두가 밤잠을 설쳤다.
뭐라고.
대체 뭐라고 해야 할까.
우리가 감히.
어떻게 대해야 아가씨가 상처받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아가씨가 좋아 죽겠으면, 우리끼리 이렇게 대화 나누지 말고.”
평소처럼 차가운 듯도 했지만, 리라의 목소리에는 아주 살짝 떨림이 들어있었다.
그건 몇 주 전부터 시엔과 리라 사이에 일어난 변화였다.
리라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제대로 표현하도록 하죠.”
고귀한 아가씨.
“우리는 당신을 너무 사랑한다고. 너무 아낀다고. 고용인에 불과하지만 우리들이 감히 힐데아 아가씨 당신을.”
“…….”
“당신을 딸처럼, 동생처럼, 가족처럼 여기고 있다고.”
대체 어떤 마음으로 저택을 떠났을까.
어떤 마음으로 그 노트들에 흔적을 남겼을까.
누구에게도 전하지 않는 말들을 꼭꼭 삼키며 얼마나 그 속에 피멍이 들었을까.
자신들은 멍청하게도 왜 그걸 몰랐을까?
“우리, 더 잘해요.”
시엔의 목소리였다.
“정말, 정말 정말 잘해요. 못한 만큼 더 잘해요. 아가씨가 화를 내시면 모두 기꺼이 받아들여요. 고치고 표현해요.”
모두 힐데아의 도움을 받았고, 마지막에 자신들을 모두 찾아와 힐데아가 주고 갔던 것들이 이별 선물이라는 것을 알았을 땐 가슴이 찢어지는 줄 알았다.
“우리 이제 알잖아요. 용서를 빌고 싶어도, 화를 내시라 말하고 싶어도, 죄송하다고 하고 싶어도, 그 상대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
그러니까 가장 먼저 해야 할 말은.
“우리 모두 아가씨가 너무 너무 보고 싶잖아요…….”
바로 그것일 것이다.
*
“그러니까 당신이 공간 이능의 능력자라고요?”
나는 뻔뻔한 화술로 내게 커프스 링크를 사게 했던 상점의 안내인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네, 그렇답니다, 고객님! 제가 좀 유능한 인재라서요.”
그는 무척이나 뻔뻔했고.
“그나저나 멀리도 외유를 나오셨네요! 그래도 표정이 훨씬 밝아지셔서 보기 좋아보이세요. 오, 두 분 사이도 훨씬 더 끈끈…….”
“거, 거기까지 해요!”
말도 무척이나 많았다.
당황한 날 보며 성질 나빠 보이게 킬킬 웃은 그는 가브리엘과 나를 골목 안쪽으로 이끌었다.
복잡한 길을 얼마나 걸었을까.
허름한 건물이 나왔는데, 그 안에서는.
‘이능의 기운?’
내가 멈칫하는 것을 본 가브리엘이 손을 맞잡았다.
그 광경을 본 안내인의 눈이 쌜쭉하게 휘어지는 것이 보여 멋쩍기는 했지만…….
그의 손을 놓고 싶지는 않았다.
마주잡은 손에 힘을 주자, 가브리엘의 웃음소리가 부드럽게 스쳐 귓가가 뜨거워졌다.
“자, 그럼 이곳은 보는 눈도 없으니.”
그때, 대리인이 확 몸을 돌렸다.
그리고 우리 쪽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두 분, 집으로 돌아가실 시간입니다!”
아. 그렇구나.
드디어 가족들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나는 떨리는 손을 내밀어 대리인과 맞잡았다. 물론 다른 손은 여전히 가브리엘의 손을 단단히 잡고 있었다.
곧 환한 빛이 눈앞을 시리게 물들였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광경은…….
‘아.’
힐링턴의 저택이었다.
우리 집.
아빠와 로제가 기다리고 있는 곳.
그리고 바스락, 낙엽이 밟히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와 시선이 마주쳤다.
꼭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서 있던 사람.
“……아가씨?”
그건 리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