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그들은 후회한다 (2)
한때는 리라를 나만의 사람이라 여겼던 적이 있었다.
언제나 내 곁에 있으니 나만을 위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이 사람이 정말 좋다고.
알의 껍데기를 깨고 나온 아기새가 한 사람만을 졸졸 따르듯 리라에게 그렇게 마음을 주었었다.
그러나 리라의 웃음이 내가 아닌 사랑스러운 로제에게 피어나는 것을 보며 체념을 익혔던 것 같다.
아니었구나.
내 착각이었구나.
리라도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구나. 나를 싫어하는구나.
루다나 마을 사람들과 교류를 통해 자신감을 얻게 되고, 가브리엘의 마음을 확인하며 마음이 따뜻해진 지금도 확신할 수 없었다.
리라는 과연 나를 같은 마음으로 사랑했을까?
나를 반겨주긴 할까?
때문에 무섭기도 했다.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하지 싶기도 했고, 싸늘했던 가족들과 가문의 고용인들이 나를 더욱 냉대하는 것은 아닐까 우려스럽기도 했다.
그리고 현재.
난 마주친 리라를 보며 어설프게 웃었다.
‘음, 무슨 말이라도 해야…….’
그런데 오랜만에 만난 리라는 어딘가 달랐다.
아니, 확연히 달랐다.
“아가씨?”
가장 먼저 리라의 눈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내가 뭔가를 잘못 봤나 싶었을 때였다.
커다란 목소리가 울렸다.
“아, 아가씨! 우리 아가씨!”
다급한 표정의 리라가 내게 두 팔을 벌리며 다가온 것은 순식간이었다.
‘어?’
뒤에서 가브리엘이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어느새 나는 와락 안겨 있었으니까.
누구에게? 눈물을 흘리며 다가온 리라에게!
“흐윽, 흑!”
나는 머리가 멍해졌다.
리라가 울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우리 리라는 웃지 않고, 울지 않는 사람인데.
특히 나에게는.
“리, 리라?”
얼떨떨하게 밀어내려고 했는데도 힘이 좋은 그녀는 절대 밀리지 않았다.
“안 돼요, 안 돼요. 조금만, 조금만 더 있어요. 우리 아가씨…… 꿈이면 어떡해요. 이게 다, 꿈이면.”
이게 무슨 일이야.
“제가 못났어요. 잘못했어요. 이게 뭐라고, 얼른 내려놓고, 다, 아가씨께 보여드렸어야 했는데…….제가, 저희가 정말 나빴어요…….”
도리어 꿈인지 아닌지 확인하겠다는 듯 나를 더 꽉 안아오기까지 해 호흡이 거칠어질 정도였다.
나는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었고, 리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흐윽, 흑, 우리 아가씨가 드디어 집에…….”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싶었다. 리라가 이럴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어깨에 뚝뚝 떨어지는 리라의 눈물이 뜨거웠다.
감각도 선명했다.
보통의 시녀들과는 달리 근육이 느껴지는 단단한 팔, 눈 깜짝할 사이에 내가 있는 곳까지 이동하는 빠르기, 그리고 이 목소리까지.
모든 것이 말하는 건 일치했다.
‘리라가 맞는데?’
그 순간, 이럴 때가 아니라는 듯이 리라가 나를 품에서 확 떼어내고 이곳저곳을 살폈다.
리라의 눈은 제법 살벌하기까지 했다.
“봐요.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신 거지요? 누가 해코지를 하거나, 아니지. 왜 이렇게 마르셨어요, 아가씨…….”
나야말로 묻고 싶었다.
리라, 왜 이렇게 변했어?
대체 내가 없는 동안 집안에 무슨 일이 생겼길래.
정말…… 내가 그리웠어?
하지만 일단 리라는 진정할 필요가 있어 보였고, 나도 너무 놀라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상태였다.
“저, 리라. 음, 일단 정신이 없긴 한데.”
어쩐지 눈물이 흐르는 그 당황스러워하는 얼굴에 긴장이 풀렸다.
입꼬리에 절로 힘이 풀리고 피식 웃음이 피어 나왔다.
“아, 아가씨, 지금……?”
어쩐지 굉장히 놀라운 것을 본 듯 깜짝 놀라는 리라의 표정이 신기했으나, 나는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
“무슨 일인지 전혀 모르겠지만, 그래. 진정하고 들어가서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어.”
아마 저 안에 아빠와 로제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흐느끼던 리라는 마구 눈물을 닦으며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
‘여전하구나.’
내가 몇 년 저택을 떠나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크게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울창하고 깔끔하게 관리된 정원, 제국에서 으뜸가는 공작 가문인 힐링턴의 명성답게 아름다운 저택.
“후우…….”
난 긴장된 시선으로 저택을 바라봤다.
예전에는 저택의 입구로 향하는 이 길이 항상 버거웠었다.
힐링턴에는 일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걸어가는 내내 시선이 따라붙었었기 때문이다.
그 시선은 나를 관찰하고, 주시하며, 냉대하는 것이라 생각했었다.
언제나 공작 가문의 영애로서 흠을 보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나는 등이 축축하게 젖는 일이 허다했었다.
아마 다르진 않을 것이다.
내가 가출했다가 돌아왔다고 해서 집안의 분위기나 나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기적적으로 바뀔 리는 없으니까.
그래도 노력해야지.
‘더는 같지 않을 거야.’
나는 도망치거나 움츠러들지 않고, 웃으려 노력할 생각이었다.
또한 나만 노력한다고 바뀌는 것은 아니었으니 사람들의 행동 중에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솔직히 말하면서 부딪힐 요량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마음을 다잡을 새도 없이 누군가와 시선이 마주쳤다.
‘아, 정원사 아저씨네.’
가위질하던 정원사가 동상이라도 된 것처럼 굳은 것이 보였다.
떠나기 전, 나 때문에 깜짝 놀라 장미를 망쳐 우울해 보이던 그를 위해 장미에 이능을 발휘했었던 것을 생각하자 설핏 웃음이 나왔다.
오래 쳐다보고 있으면 평소처럼 고용인들이 불편해할 것이 분명했으니, 오늘은 이 정도로 하는 게 좋겠지.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다급히 정원사가 가위를 던졌…….
응?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야. 지금 저 애지중지하는 가위를 집어던진 거야?’
뒤로 가위를 휙 집어던진 정원사가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내게 불도저처럼 달려왔다.
그 기세가 얼마나 불을 뿜을 듯한지, 내가 화들짝 놀라 옆을 따르던 가브리엘의 옷자락을 잡았을 정도였다.
“가, 가브리엘!”
“힐, 왜 그러십니까?”
“그게…….”
정원사 아저씨의 시선이 날 뚫어버릴 것 같아서요.
그게 다가 아니었다.
마침내 이곳까지 달려온 정원사 아저씨가 내 앞에 털썩 무릎을 꿇는 게 아닌가.
“아, 아가씨이!”
이게 대체 무슨…….
당황할 새도 없었다.
그는 마치 리라처럼 날 보며 눈물을 후드득 떨어뜨리기 시작했으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흐으윽, 흐엉, 아가씨……께선 그리 잘해주셨는데…….”
“이, 일어나세요. 대체 왜.”
“죄송, 죄송합니다. 아가씨. 크흑, 흐윽, 흑!”
이게 뭐야.
대체 무슨 사과인지 모르겠다.
그가 내게 잘못한 것이 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없었다.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눈을 굴리다가 나는 이곳에 있는 것이 우리가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다, 다들 모여 있잖아.’
언제 본 것일까.
어느새 저택의 다른 고용인들이 이곳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하나.
모두 나를 보며 하늘이 무너진 사람들처럼 대성통곡하고 있었다.
“아가씨, 아가씨!”
“힐데아 아가씨…….”
“저희가, 저희가 정말…….”
뭐, 뭐야. 나는 알 수 없는 상황에 겁이 덜컥 들어 더욱 가브리엘의 옷자락에 매달렸다.
가브리엘, 사람들이 미쳤나 봐요. 다들 나를 보고 운다고요! 내가 뭘 어쨌다고?
“괜찮습니다, 힐.”
그런데 가브리엘은 전혀 당황하지 않은 듯했다.
기겁하는 날 보며 그는 오히려 웃었다.
게다가 내 어깨를 도닥인 뒤, 부드럽게 몸을 돌리게 해 그들을 향해 시선을 돌리게 했다.
더 보라는 듯이.
“가, 가브리엘?”
“정말 괜찮습니다, 힐데아. 응당 받으셔야 할 인사일 뿐이니까.”
나는 그의 말에 홀린 듯이 차분히 그들을 눈에 담았다.
모두가 울고 있었고, 모두 괴로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꼭 이상한 세상 속에라도 들어온 것 같았다.
항상 나만 보면 화들짝 놀라며 뒤로 돌거나, 주춤하거나, 물건을 떨어뜨리던 고용인들은 모두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보고 싶었어요…….”
“저희가 잘못했어요…….”
누군가는 눈물을 닦아내느라 가끔 고개를 숙이기도 했지만 그 외엔 모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이, 상해요. 가브리엘.”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아니야. 다들 시선을 피하지 않아요, 이게 꿈이면 어떡하죠…….”
“당신의 시선을 받을 수 있는 건 가문의 영광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꿈이라고 생각되시면 제 뺨을 꼬집으셔도 됩니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드리겠습니다.”
“그게 뭐야, 내 뺨을 꼬집어야 하잖아요.”
“당신이 아픈 건 싫습니다.”
짓궂은 농담을 담은 말에도 웃음도 나지 않았다.
곧 다시 앞장서는 리라를 따라 그들을 하나둘씩 지나치면서도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다들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들을 지나칠 때마다 그 자그마한 목소리들이 귓가에 똑바로 스며들었다.
“힐데아 아가씨…….”
“아가씨.”
“죄송해요. 정말, 정말 죄송해요. 저희가 바보 같았어요.”
“돌아오셔서 너무 좋아요.”
“저희는 아가씨를 기다렸어요!”
“너무, 너무 그리웠어요.”
꿈인가.
정말 꿈이어서 이런 건가?
아니면 저들이 단체로 낮술을 한 건가?
왜 내가 듣고 싶었던 말들만 해주는 거지? 이럴 수가 있어?
그러다 덜컥 겁이 들었다.
고용인들이 이 상태인데, 우리 로제와 아빠는 또 어떻게 되어 있는 것인가 싶었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던 모양이었다.
“잠깐만. 그, 너무 이상해. 이상해요.”
리라가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얼굴이 보였고, 가브리엘이 내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가 시선을 마주치며 내 손을 잡아왔다. 따뜻했다.
“힐, 다 잘 될 겁니다.”
난 도리질을 쳤다.
뭔가 잘못된 것이 분명했다.
고작 집을 비웠다가 돌아왔다고 날 기겁하며 피하던 사람들이 저렇게 울면서 사과를 한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그러니까 이건, 꿈…….
“……힐.”
바로 그때였다.
묵직한 목소리가 저택에서 들렸다.
아니, 황급히 뛰어오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숨소리가 바로 앞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