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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122화 (122/155)

122화. 그들은 후회한다 (3)

“네가…….”

떨림을 담은 목소리.

하지만 너무나 오랫동안 익숙할 정도로 들어왔던 목소리였다.

내가 사랑했고, 사랑하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그러나 사랑했던 만큼 아팠고, 기대했고, 그래서 포기할 수 없었던 사람의 목소리.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질책과 분노가 쏟아질 것을 예상했다. 왜 이렇게 늦었느냐고, 왜 연락도 없이 사라진 것이냐고 화를 내실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호통이 떨어지진 않았다.

그러고 보면 아빠는 평소 화를 내는 적도 없던 분이셨지.

싸하게 가슴이 아파졌다. 실망조차 하지 않으시는 걸까.

“내가 얼마나…….”

하지만 그 목소리는 분명 떨림을 담고 있었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올리자 보이는 것은 평소와는 달리 잔뜩 헝클어진 머리카락.

급히 내려온 사람처럼 잘못 꿰어진 단추.

한쪽이 벗겨진 신발이었다.

“이 아비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앞에 서 있는 사람의 모든 것들이 차차 시야에 인지되었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떨리며 다가오는 커다란 손.

항상 내게는 냉정했고, 무거웠던 검은색의 눈동자.

“얼마나 미안했는지…….”

반짝이는 은색 머리카락.

두꺼운 손과 나이를 짐작하기 어렵게 단련된 단단한 어깨.

그리고.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

슬픔과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

“널 잃을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모든 것이 낯설었다.

하지만.

“내, 내 딸아…….”

아빠.

그건 상처받기 두려워 뒤로하고 도망쳤던 나의 아버지였다.

*

시어스 폰 힐링턴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은 사람처럼 다급히 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다행히도 어디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입은 옷이 허름해 보이긴 했지만, 오히려 저택에 있었을 때보다는 살이 더 오른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적어도 굶고 다니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안도의 한숨이 쉬어지려는 찰나, 그의 눈에 보지 못했던 딸의 표정이 보였다.

‘…….’

힐데아는 어리둥절해 보였다.

아니, 불안한 것으로 보였다.

주변의 반응이 기이하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어찌하여.’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그 어색해하는 표정에 시어스는 울음이 왈칵 치솟을 것 같아 이를 악물었다.

당장 달려가 내 딸, 내 딸아, 그리 부르며 끌어안고 싶었지만 움직이지 못했다.

그에게 힐데아는 언제나 깨지기 직전의 연약한 유리잔과 같아 보였다.

“아, 버지.”

끊기는 듯한 그 가냘픈 목소리를 들으며 가슴이 미어졌다.

“많이, 걱정하셨죠.”

아빠라고 부르고 싶었다는 그 문장이 떠올라 목이 따끔거렸다.

망설이는 듯한 힐데아의 눈을 오래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시어스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간절히 시선에 그리움을 담고 바라보았다.

‘내 딸아.’

너를 사랑한다.

너를 너무나 아낀단다.

하지만 힐데아는 그 시선을 읽지 못했다.

의지할 사람이 이 사람밖에 없다는 듯 가브리엘의 옷자락을 잡는 모습을 보면 부아가 치밀었으나, 동시에 슬프고 안타까웠다.

가족들이 눈앞에 있는데, 이곳이 힐데아의 집이고 고향인데도 그의 딸은 이중 누구도 믿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내가 몰랐을 뿐, 언제나 저런 모습이었겠지.’

수줍음이 많고 조심스러운 성격이라고 생각했던 딸이 어떤 생각들을 하고 있었는지 읽었던 날.

그는 맨정신을 유지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못난 아비였고, 모자란 부모였다.

주변 모두에게 사랑받는 동생 로제리엘을 보면서, 의젓한 저 아이가 속으로 어떤 생각을 했었을지를 왜 몰랐단 말인가.

떠났던 시간 동안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저 책임감 강했던 힐데아가 떠나기로 결심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지 생각하면 두 다리로 서 있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그때 가만히 보고 있던 힐데아가 차분하게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려 했다.

“아버지. 제가…….”

시어스는 알 것 같았다. 제 딸이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언제나 힐데아는 저렇게 차분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리고 숨을 한번 내쉰 뒤 말했었다.

죄송해요, 아버지.

제가 잘못했어요.

다음에는 더 잘할게요.

시어스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렇게 떠나서 죄송…….”

“아니!”

그는 다급히 말했다.

저 아이가 그 말을 하게 만들 순 없었다.

“네?”

“아니, 힐데아. 절, 절대.”

“아, 아버지? 왜 그러세요?”

깜짝 놀라 휘둥그레 떠진 눈을 보면서도 양손을 덜덜 떨며 손을 뻗었다.

그리 말하지 말아라, 힐데아.

누구도 너에게 사과를 들을 자격이 없는데.

누구도 너를 추궁할 자격이 없는데.

“제발. 그리, 말하지 말아라.”

“……아버지?”

“너는 아무것도 잘못한 적이 없지 않느냐. 모든 것은, 이 아비가……. 이 아비가 잘못한 것인데.”

사과할 사람이 있다면 그였다.

지금 힐데아의 뒤에서 다가오지 못하고 눈물만 훔치고 있는 다른 고용인들이 그러하듯이.

표정제거술이 풀려 오히려 아이처럼 슬픈 얼굴을 주체하지 못하는 리라와 시엔이 그러하듯이.

평소답지 않게 제 언니를 보고도 쪼르르 달려가 밝게 인사하지 못하고 가만히 가라앉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로제리엘이 그러하듯이.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한순간도 바로잡지 못하고 무능하게 몰랐던 힐데아의 아비인 자신이 그러하듯이.

“돌아와 주어서.”

“…….”

멍한 표정의 힐데아를 보며 시어스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의 손길이 닿으면 움찔거리거나, 한걸음 물러나던 어린 시절의 힐데아가 있었다.

“정말이지, 힐, 우리는…… 네가 이곳으로 돌아와 주어서.”

그때마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포기했었다.

첫째 딸은 여전히 저를 두려워하는 것 같다고, 지레짐작으로 결론 맺었던 그 순간들을 떠올리며.

“돌아와 주어서 너무…….”

한 번이라도.

단 한 번이라도 이렇게 제대로 쓰다듬어줄 것을.

단 한 번이라도 안아주고, 웃어주고, 손이라도 잡아줄 것을.

그것이 대체 뭐라고, 제멋대로 딸아이가 싫어하고 꺼린다고만 생각했단 말인가.

그가 부모이고, 딸들을 지켜야 하는 보호자인데.

“너무 고맙구나.”

덜덜 떨리는 볼품없는 손끝이 조심스럽게 첫째 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기어코 터져 나오는 눈물을 삼키지 못했지만, 이것이 시작이었다.

더 잘해주리라.

더 행복하게, 이곳을 낯설고 두려운 곳으로 느끼지 않도록.

다시는 힐데아의 마음을 죽이는 끔찍한 일들을 저지르지 않도록.

더욱 더 사랑하리라.

*

어떤 정신으로 내 방으로 돌아왔는지를 모르겠다.

돌아와주어 고맙다고, 그렇게 말한 아빠가 아이처럼 엉엉 우셨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숨 쉬는 것마저 잊었을 정도였다.

더 경악스러운 것은 아빠를 시작으로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줄줄이 울음을 터뜨리며 사과를 하는 사람들이었다.

‘허어엉, 어엉, 어어엉!’

‘아, 아가씨, 끄윽, 끄으윽, 흑, 저희가 나쁜, 흐으!’

‘무사히 돌아오셔서 너무 기뻐요…….’

나는 마른세수를 하며 끄응 앓는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다들 왜…… 나한테 미안하다고 말하는 거지? 꼭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저택을 떠났는지 다들 아는 것 같잖아.”

그렇게 눈물바다를 지나 우여곡절 끝에 저택으로 들어온 것까지는 좋았다.

내 뒤를 졸졸 따라오던 모두는 내게 많은 것들을 묻고 싶다는 얼굴들을 한 주제에 누구 하나 제대로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다들 내게 할 말이 있어요?’

‘저, 저희는.’

‘아가씨, 저희는…….’

눈가는 빨갛게 짓물러서 눈물을 끝에 달고서도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고, 그들은 내 반응에 어깨를 흠칫 놀라 떨었다.

사실 내겐 익숙한 풍경이었다.

로제를 제외하곤 내게 친근하게 다가와 무언가를 조잘조잘 묻지 않았으니까.

다만, 이전과 같은 침묵이어도 이전과 다르긴 했다.

이전에는 내게 다가오지 않는 침묵이었다면, 이번에는 나를 조심스럽게 대하는 것이 역력히 느껴지는 침묵이었다.

리라도, 시엔도, 스치듯 보았던 시녀들은 화들짝 놀라는 것은 예전과 같았지만 더는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도리어 무언가 알아달라는 듯한 눈으로 나를 끈질기게 바라보는데,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제일 이상한 것은, 로제의 반응이었어.’

내 동생이 누구인가.

그 활발한 아이는 미친 사람 같은 황후 앞에 데려다 놓아도 깔깔 웃으며 호감을 살 것이 분명한 애였다.

그런데 로제는 입만 꾹 다물었다.

나는 그 반응에 적잖이 당황하고 말았다.

‘로제?’

저택에 돌아오면 사람들이 어찌할지.

나는 모두의 반응을 걱정했으나, 로제만큼은 예외였다. 로제만큼은 걱정하지 않았다.

그 아이만큼은 거리낌 없이 다가와 와앙 하고 울음을 터뜨리거나, 아니면 버럭 화를 내리라 생각했다.

내가 가정한 반응 중에 침묵은 없었는데.

외면은 없었는데.

‘로제?’

‘……언니. 언니, 나는.’

그 아이는 그렇게 대꾸한 뒤 흔들리는 시선을 보낼 뿐 입술만 잘근거리며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화가 났는지 묻고 싶었다.

물론 갑자기 사라진 언니 때문에 화가 났을 테니, 가장 먼저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동시에 그럴 수밖에 없던 내 마음을 조심스럽게 이야기해볼 생각이었다.

‘가브리엘과 관련된 여태까지의 오해들도…… 말이야.’

그 외에도 묻고 싶은 것들은 많았다. 말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축언 도둑이라는 것에 아무도 당하지 않은 것이 확실한지, 그런 것들.

하지만 로제뿐 아니라 시녀들도, 마주쳤던 다른 고용인들도, 그리고 아빠까지.

모두 꼭……. 대역죄인이 된 것 같은 분위기로 우울해하고 있었다.

누구 하나 갑자기 집을 나가버렸던 내게 왜 그런 짓을 했느냐며 화를 내지 않았다.

추궁도 하지 않았다.

싸한 분위기가 내려앉자, 일단 방으로 들어가서 여독을 푸시는 것이 좋겠다는 리라의 말에 얼결에 방으로 돌아온 것이다.

“후우.”

나는 답답함에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바로 그때였다.

똑똑, 하고 테라스에 연결된 문에서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어?’

깜짝 놀라 바라보니, 나를 바라보며 눈을 접어 웃고 있는 화사한 백금발의 미남자가 보였다.

“가브리엘?”

그가 손잡이를 가리키며, 아이처럼 장난치듯 빠끔거렸다. ‘너무 보고 싶어 왔습니다.’라고.

“아, 정말…….”

그 장난스러운 말에 상황의 심각성도 잊어버리고, 살짝 웃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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