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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125화 (125/155)

125화. 잘못했어요, 아가씨 (3)

미소를 되찾았다는 말은 이상했다.

리라와 시엔과는 달리 나는 표정제거술을 받았던 것도 아니니까.

그때였다. 시엔이 발작하듯 두 주먹을 쥐며 외쳤다.

“아가씨의 미소가 얼마나 예뻤는지 아시나요!”

단전에서 뽑아낸 듯한 우렁찬 시엔의 말에 반사적으로 어깨가 흠칫 떨렸으나, 의외의 말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로제 아가씨에게만 웃어주실 때마다 저는 정말 부러워서 미치는 줄- 읍!”

리라는 전직 용병의 실력을 발휘하여 시엔의 입을 틀어막았고, 나는 읍읍거리는 그녀를 보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시엔의 말은 들으실 필요가 없어요.”

리라가 산뜻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리라, 지금 시엔 숨 막히는 것 같은데.”

“괜찮아요, 이 정도로는 죽지 않는답니다.”

아닌 것 같아, 리라. 지금 네 동료 얼굴이 검게 변하고 있는 것 같거든…….

‘하아.’

이런 사람들이었구나. 리라와 시엔 둘 다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과는 너무나 달랐다.

그게 어이가 없기도 하고, 웃기기도 해서 풋 하고 웃음이 터졌을 때였다.

‘응?’

갑자기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문이 끼이익 하는 불길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헉.’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반쯤 부서진 문이 활짝 열리는 것과 동시에 사람들이 와르르 눈앞에 쏟아졌다.

“…….”

그러니까 정말, 정말 내 눈앞에 팝콘처럼 쏟아졌다.

그들은 리라와 시엔을 원수처럼 노려보았다.

보는 내가 흠칫 떨릴 만큼 살벌한 시선이었다.

“아, 아, 아가씨의 미소!”

“리라, 시엔, 당신들만 보다니 이건 배신이야!”

“저도, 저도 보고 싶어요……. 흐윽, 흐어어엉!”

어이가 없었으나, 그들은 모두 내게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나를 지켜봐왔었던, 나를 싫어한다고 생각했던 힐링턴의 사람들.

‘아니.’

대체 몇 명이나 밖에서 엿듣고 있었던 것인지는 몰라도, 채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 서 있는 이들까지 눈을 빨갛게 물들이고 날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이게 뭐야.’

기가 막힌 상황에서도 왜 이렇게 코가 찡한 건지, 대체 왜 이렇게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인지 모르겠다.

나는 내가 울고 있다는 것도, 그래서 들이닥쳤던 사람들의 얼굴이 비애에 가득 차는 것도 알지 못했다.

그냥 눈앞이 흐렸다.

“정말 당신들…….”

이렇게 웃긴 사람들이었다는 걸 일찍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이번 생은 전생과는 달리 일찍, 조금 더 일찍 웃을 수 있었을 텐데.

아니. 당신들과 나, 다 같이 웃을 수 있었을 텐데.

“아, 아가씨…….”

“저, 저, 저희가 지금 힐 아가씨를 울린…….”

“머리를, 머리를 박겠습니다! 제발 눈물을 그쳐주세요, 저희가 미친놈들이었습니다! 문짝, 문짝을 원래대로…….”

“사용인 주제에 멋대로 다가가면 안 된다고, 그러면 아가씨께 부담이 될 거라고, 그렇게 생, 생각했었, 흐, 흐윽!”

아, 제발.

울다가 웃으면 심각해진단 말이야.

나는 입을 틀어막고 어깨를 떨었다.

가까이 다가온 리라가 손을 뻗어 손수건으로 내 뺨을 훔쳤다.

눈물이 흐르는데 웃긴 것은 얼마나 기괴할까.

그런데도 방 안에는 어쩐지 이상한 침묵이 감돌았다.

슬며시 리라의 손수건에 눈을 문지르고 깜빡이자, 바보 같아 보이는 얼굴들이 보였다.

대체 왜 몰랐지. 대체 이 사람들은 왜 그렇게 해서 이런 상황을 만든 거야. 이렇게, 이렇게 우리는 서로를 좋아하고 있었는데.

“내가 좋아요?”

“…….”

“좋아한다면, 말해주지……. 그랬다면 정말 행복했을 거예요.”

사람들은 침이라도 흘릴 듯 입을 벌리다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광기에 찬 것 같은 눈을 희번덕 뜬 시엔이 앞장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희는!”

똑바른 눈이 나를 응시했다.

“특히 저는! 아가씨를! 미친 듯이 사랑해요!”

나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시엔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빨갛게 변한 얼굴이 너무 익은 토마토처럼 터지기 직전이었지만, 좋아한다고 말해달라고 했던 내 말에 응답하듯 최선을 다해 소리쳤다.

“너무 좋아서 미쳐 있어요! 지금도 좋아요! 너무너무 좋아요! 항상 지켜드리고 싶었어요! 너무 좋아서! 그래서, 그래서 더 죄송해요…….”

어쩌면 가브리엘에게 받았던 고백보다 더한 열정적인 고백을 받은 것은 그 순간이었다.

아, 더는 안 돼.

“아, 진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푸, 흐.”

크게 번지는 그 웃음소리가 내 것이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고, 이 순간이 모두 꿈처럼 느껴졌다.

‘난 아주 먼 길을 돌아서 드디어 이곳으로 되돌아왔구나. 사실 이미 다 갖고 있던 것이었는데.’

어긋났던 조각이 텅 빈 가슴의 구멍을 달칵 소리를 내며 메꾸는 것 같았다.

다가온 리라가 나를 꼭 안았다.

“저희가 이 말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화나고, 속상하고, 아프셨을 텐데도…… 너무 감사해요.”

이제 알겠다.

나는 사랑 받고 있었고, 앞으로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리라.”

“네, 아가씨. 말씀하셔요.”

어쩌면 힐데아로 살아오는 동안 가장 많이 어긋났던 사람.

할 말도, 듣고 싶은 말도 너무 많은 사람.

그 사람을 당장 보고 싶었다.

“나, 아빠를 보러 가야겠어.”

놀란 듯했던 리라가 눈을 접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네, 가주님께선 아까부터 애타게 기다리고 계세요.”

* * *

황녀, 라피이아는 초조해 보이는 부친의 얼굴을 응시했다.

축언 도둑으로 인해 피폐해진 제왕의 눈에는 더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보이지 않았다.

황녀는 조소하고 싶었지만, 착하고 믿음직스러운 딸이 그런 눈빛을 보일 순 없었다.

“황녀.”

“네, 아바마마.”

“네가 연회를 열어야겠구나.”

“지금 이 시기에 여는 사치스러운 연회는 좋지 않아 보이는걸요.”

“아니. 황녀, 네가 알아봐 주어야 할 것이 있다. 제국의 모든 귀족들을 초대하거라.”

“하지만 아바마마.”

“이 아비가 너 말고 또 누구를 믿겠느냐.”

신뢰 가득한 눈에는 황후와 황태자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라피이아는 속으로 조소했다.

‘저를 믿으신다고요?’

그렇게 믿으시면서 제게 후계자 자리를 약속하지는 않으시지요.

자식도 아닌 벨키우스 공작에게는 그 자리를 덥석 쥐어주려 하셨으면서.

‘내가 딸이기 때문에. 고작 그 이유 하나만으로.’

그녀가 처음부터 가브리엘을 무조건 싫어했던 것은 아니었다.

물론 제 또래의 아이가 갑자기 나타나 아빠의 사랑을 빼앗아 가는 것에 대한 시기와 질투는 있었다.

그래서 제법 괴롭히기도 했었지만, 그것이 본격적인 미움과 증오가 된 것은 한순간의 일 때문이었다.

제 아버지가 무슨 의도로 벨키우스의 아이를 데리고 왔는지를 엿듣게 되었을 때.

사랑한다 다정하게 속삭여주던 아버지가 사실은 비정한 황제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갈 곳 잃은 분노는 라피이아의 가슴을 태웠다.

애먼 곳에 화풀이했다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그녀는 가브리엘이 미웠다. 증오스러웠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다 가졌던 그가.

사실 그 남자도 모든 것을 잃어버린 피해자였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힐데아 폰 힐링턴이 돌아왔다고 한다.”

가라 앉아 있던 라피이아의 눈썹이 쓰윽 치켜 올라간 것은 그 순간이었다.

힐데아 폰 힐링턴.

한차례 사교계를 달구었던 이름이었다.

갑자기 사라져버린 공작가의 첫째 딸이란 여러 가지 은밀한 소문을 만들기 제격인 소재였으니까.

그런데 그 여자가 돌아왔다?

“그러면 아바마마, 제게 연회를 열어 알아보라고 하시는 것이 힐데아 폰 힐링턴인가요?”

“그러하다. 이 아비는 참으로 답답하구나.”

라피이아는 생각했다.

요즘 황제파의 권력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를 위해 벨키우스와 힐링턴을 이용할 생각인 것이다.

“대체 힐데아 폰 힐링턴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숨기고 있는 것이 있는지. 이대로 벨키우스와 힐링턴의 두 가문이 무엇을 꾸미고 있는지 알아야겠다. 해줄 수 있겠느냐, 황녀?”

라피이아는 아주 공손히 인사를 했다. 그리고 입꼬리를 당기며 우아하게 말했다.

“물론이지요, 아바마마. 저는 아바마마의 충직하고 믿음직스러운 딸이니까요.”

“네가 항상 고생이 많구나.”

아니요, 아바마마. 오히려 즐거운걸요?

간만에 심장이 뛰고, 웃음이 나왔다.

그 여자.

감히 황녀 무서운 줄 모르고 되바라지게 바라보던 그 눈빛.

애절하게 가브리엘을 바라보던 그 눈을 보며 제 사랑도 알아보지 못하는 꼴이 우스워 못된 심술을 부리고 싶었지만, 마음만 먹었을 뿐 더 실행하지는 못했다.

이상하게도 어쩐지 신경이 쓰였던 여자였다.

공작가의 여식이라는 틀에 갇혀 아무것도 못 하는 것처럼 보이는 주제에 제 앞에서 지지 않겠다는 듯 그 어떤 영애보다도 빛났던 여자.

궁금했다.

‘힐데아 폰 힐링턴. 넌 어떻게.’

라피이아는 치맛자락을 쥔 손에 힘을 꽉 쥐었다.

‘넌 어떻게 다 버리고 떠날 수 있었지?’

입을 꾹 깨물었다.

‘내가 못 한 것들을.’

줄곧 주시하고 있던 라피이아는 알고 있었다.

그 여자가 정말 그놈의 짝사랑 때문에 다 버리고 떠났었다는 것을.

하지만 믿을 수 없다.

귀족가의 영애가, 그것도 공작가의 영애가 제게 쏟아질 모든 영광과 부를 다 버리고 떠날 수 있다고?

어떻게 그런 결단력이, 용기가 날 수 있었지?

그리고 그 반항의 결과는?

‘알고 싶구나.’

기이한 호기심이 일었다.

사라졌던 두 달.

그 시간이 그 여자를 어떻게 바꾸어 놓았을지, 라피이아는 그것이 미치도록 궁금했다.

* * *

이전이었다면 저 무표정한 얼굴을 보며 나는 그대로 문을 닫고 나갔을 것이다.

아니면 가슴이 아파 속이 쓰린 것을 감추기 위해, 더욱 얼굴을 경직시켰을까?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내 아빠라는 사람은 어쩌면 나와 똑같았다는 것을.

무척이나 어수룩하고, 서투른 사람이었다는 것을.

나는 긴장한 채 이쪽을 바라보는 아빠를 보며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아버지.”

내 딸. 그렇게 불렀다.

떨리는 목소리로, 무척이나 그리웠다는 듯이.

“힐, 말하려무나. 이 아빠는 무슨 말이라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

경직된 아빠의 얼굴을 보며 심호흡을 했다. 음, 일단 내가 하고 싶었던 말부터 하자.

그래. 그러니까 편지, 호칭…….

내 시선은 무의식적으로 아빠의 퉁퉁 부은 눈으로 향했다.

‘엄청 부으셨네. 근데 어디서 봤더라……. 아!’

저 눈이 무척이나 익숙했다.

로제의 약혼인 줄 알았던 기간에 내내 아빠의 눈은 저렇게 부어 있었…….

부어 있었는데?

그 순간 모든 생각해왔던 말들이 백지가 되었다. 설마?

“그때, 제가 약혼하는 줄 알고 계속 우셨던 거예요……?”

“!”

앗. 이게 아닌데.

난 커다랗게 눈을 뜨는 아빠의 얼굴을 보며, 얼굴을 확 구겼다.

대화의 시작부터 망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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