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126화 (126/155)

126화. 아빠의 눈물, 전하지 못한 진실의 말들

시어스 폰 힐링턴.

힐링턴의 공작 가문의 가주이자 가장 강대했던 축언과 이능을 지니고 있었던 실력자.

그러나 아내를 지키지 못한 남편이었고, 딸들을 보듬지 못한 못난 아비였던 자.

그는 멍하니 툭 말을 내뱉고 제가 더 소스라치게 놀라는 딸을 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힐데아가 이런 성격이었던가?’

참으로 새삼스러웠다.

켜켜이 쌓아왔던 선입견과 편견을 버리려 노력하였는데도 저런 솔직한 표정의 힐데아를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리고 속이 저렸다.

“긴장해서 말이 실수로 헛나갔어요, 아버지. 그러니까 드리고 싶었던 말은 이게 아니라…….”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힐데아가 자신 못지않게 긴장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말끝이, 그리고 눈꺼풀이 한 번씩 떨리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주먹을 꽉 쥐었다.

이 순간에도 침묵하여 결국 저 아이가 먼저 말을 내뱉게 했구나.

보듬어 안고, 눈물을 흘리고, 무릎을 꿇어도 누군가에게 새긴 상처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저 착한 아이는 귀를 기울여 변명과 설명을 들을 기회를 주려하고 있는데.

‘나는 이 순간까지 못난 아비이군. 여보, 당신이 지금 날 보면 뺨을 칠지도 모르겠어.’

시어스는 손을 뻗어 힐데아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흠칫 놀라는 동그란 붉은 눈을 보며 웃으려 노력했다.

사실은 울고 싶었지만.

“그래. 울었단다.”

“……네?”

“엄청 울었지.”

“……네?”

힐데아가 떠나기 전, 팔불출에 가까운 자신이 딸의 약혼에 서글피 우느라 눈이 퉁퉁 부은 것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몰랐던 것이 헛웃음이 나고, 가슴이 찢어지기도 했다.

“네가 약혼하는 것이 너무 서글퍼서 이 아비는 펑펑 울었다. 두 눈이 제대로 떠지지 않았던 이유는 그래서가 맞다. 너무 울어서.”

“……그, 러셨어요?”

“그래.”

“……제 약혼이라고 생각하셔서?”

“그래. 당연하지 않으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소중한 딸을 소도둑 같은 놈이 데리고 가겠다는데.”

“……그래서, 우셨다고요.”

가브리엘도,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또 한 명의 딸 로제도 그가 우는 모습에 누구보다 놀리기 바빴는데…….

그런데 힐데아는.

나이 먹은 아비가 펑펑 울었다는 말에 힐데아는.

‘너는 울어주는구나.’

눈망울이 축축히 젖은 모습을 보는데, 심장이 철렁했다.

이렇게 섬세하고 다정한 아이를 대체 어떻게 보고, 어떻게 대한 것일까.

왜 지키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을까.

대체 왜 거리를 두는 것이 저를 어려워하는 아이에게 대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을까.

한 번 더 안아주고, 한 번 더 다정히 웃어주고, 한 번 더 이름을 부르면 되었던 것을.

그렇게 간단했던 것인데.

그는 계속 내뱉어야 했을 말을 울음처럼 토해냈다.

“아가, 내 딸아. 이 아비가…… 이 아비가 잘못했다. 미안하구나.”

* * *

아빠는 솔직했다.

“무슨 말을 해도 저질렀던 일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이 아비는 못나서 네가 모든 것을 잘할 것이라, 내 죄책감에서 뒤돌아 도망치느라 너를 홀로 두었다.”

외로웠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주변에 닿는 자들까지 모두 극심한 경계를 통해 다가섰으니, 더욱 외롭게 느꼈을 것이다. 그것이 1년이 되고, 2년이 되고……. 어느 순간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지.”

정말 순수한 어린아이가 아니라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이어진 외면과 거절이 상처가 되었던 순간들.

그러면서도 따라붙는 끈질긴 시선들을 보면서 나는 거리감과 소외감만을 느꼈었다.

“사실은 너를 좋아하고 아꼈다는 말이 지금 다 무슨 소용일까.”

그래,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좋았다.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말이 더는 상처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말을 할 기회를 다오.”

그랬구나 싶었다.

내가 보지 못했었던 것들이 싸하게 갈라졌던 상처를 보듬는 순간들이 따뜻했고 간절했다.

“다 같이 모여 그간 있었던 일들을 되짚어 봤단다. 지금 이 상황이 모두 어이가 없겠지. 이해되지도 않을 것이다.”

욱신거리는 감정이 되살아났다.

내가 얼마나 벼랑 끝에 몰려 있었는지 떠오르니 웃음도 나왔다.

힐링턴 공작가가 어떤 가문인가.

여기서 도망가봤자 언젠간 붙잡히고 말 텐데 나는 그저 도망가야겠다는 생각밖에 하지 못했다.

당시엔 그래야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나도 참 무모하게 일을 벌였구나 싶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마. 네가 남긴 말들을, 보았단다.”

손에 잠깐 힘이 들어갔다.

그래도 일기를 본 건 너무했어요…….

“네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심중에 담았던 말들이 무엇이었는지 모두 확인하고야 말았다.”

저 눈이 사실은 다정했다는 것을, 나만 알지 못했다는 것이 화가 날 정도로.

“어리석게도 그때야 알았다. 네가 어떤 생각을 꾹꾹 참다가 이곳을 떠나게 된 것인지를. 허허, 네가 사라진 이유가 가브리엘 그 얄미운 놈 때문만이라 여긴 것이 어찌나 한심하던지…….”

내 눈물이 흐르는 뺨을 아주 소중하다는 듯, 그리고 미안하다는 듯 떨리는 손으로 닦아내는 행동 그 모든 것이 아주 조심스러웠다.

“내 딸아.”

이전에도 그랬을까.

“힐데아.”

“……네.”

내가 슬픔 속에 알아채지 못했던 순간에도 이러했을까?

사실은 나처럼 손을 잡고 싶었고, 다정히 이름을 부르고 싶었고, 포옹하고 싶었던 것일까?

“네가 항상 소중했다.”

그것이 너무 아까웠다.

“이 아비의 표현은 엉망이었지만.”

아아, 보내버린 시간이 너무 아쉬웠다.

“다들 어리석고, 멍청했다.”

나는 아버지의, 아니. 아빠의 눈을 보았다.

그때 편지를 남겼던 마음으로 심장이 뛰었다.

나도 한번 말해 볼 것을.

직접 아빠의 옷소매를 잡고라도 한번 용기를 내어볼 것을.

나도 그것이 뭐 그리 어렵다고.

거울 속의 내 표정도 제대로 보지 못했을까.

나는 더는 전생의 내가 아닌데.

지금의 나는 힐링턴의 힐데아였는데.

“네가 사라지고서 사는 것 같지 않았다. 못해준 것들이 계속 생각이 나고, 네가 어떤 얼굴을 했었는지가 온종일 눈앞을 가렸다. 이 아비는 어리석고 못났다. 그래도…….”

사시나무 떨듯 흔들리는 아빠의 턱을 보았다.

“안아봐도 되겠느냐?”

싫다고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가만히 쳐다보다가 결심했다.

계속 서로 밀어내기만 하는 줄다리기는 끝이 나지 않는 법이다.

머뭇거리긴 했지만, 단호히 움직여 아빠의 품에 안겼다.

“……힐.”

“화도 나고 섭섭하고 아팠지만.”

너른 품은 꼭 예전에, 내가 이 세계에서 처음 눈을 뜨게 된 순간을 떠올렸다.

“……그리웠어요.”

“힐데아.”

“도망친 주제에 이런 말이 우습지만, 정말 그리웠어요. 한순간이라도 떠올리면 다시 제국으로 돌아오게 될까 봐 소식 하나 듣지 않을 만큼.”

나는 어느새 피식거리며 웃고 있었나 보다.

머리 위에서 한숨과도 같은 말이 쏟아졌다.

“웃는 법을 이 아비가 가르쳐줬어야 했는데.”

그럴지도 몰라요. 하지만 이제 저도 웃을 줄 알아요.

엘라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환히 웃는 방법을 알려 줬어요.

“미소가 네 엄마를 닮았다.”

심장이 쿵 하고 뛰었다.

아빠가 엄마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항상 너희를 아끼고 사랑하라고 했는데, 그 사람이 지금 상황을 보면 당장 내 뺨을 후려칠 것 같구나.”

“……정말요?”

내 축언으로 인해 엄마가 돌아가셨을 것이라는 말을 엿들었을 때부터 지금까지도 쭉, 엄마에 대한 것은 금기 사항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아직 못한 말들은 많았다.

리라의 말처럼 신전에서 나를 데려갔었다는 말.

그래서 좌절하고 절망했던 아빠가 나를 되찾고도 가문을 폐쇄적으로 닫으며 필사적으로 나를 지켜왔었다는 말.

신전에 가고 싶다고 말했을 때, 왜 그렇게 펄쩍 뛰며 반대를 하셨는지 그 이유를 제대로 알게 되어 안도가 되던 순간.

“이 아비가 네게 말하지 않은 것들이 너무 많았지만. 지금 이 말만은 하고 싶구나.”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힐데아.”

“네.”

“너의 축언과 이능은 언제나 이 아비의 축복이었다.”

“…….”

“힐링턴의 모두에게도.”

아주 조심스럽고 어색한 손길이었다.

“너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보물이란다. 언제나…… 언제나 그랬다.”

생각해보면 언제나 이랬던 것 같았다.

“네가 이 말을 들어야 했을 순간을 놓쳤지만, 지금이라도 해주고 싶구나.”

가끔 손을 잡을 때, 어쩌다 가끔 머리를 쓰다듬어주실 때.

항상 이런 손길이었다.

희미하게 떨리던 그 조심스러운 손길을 나는 차별하고 꺼리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더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

나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아빠의 품에 이마를 문질렀다.

그리고 울음과 웃음을 삼키면서 말했다.

항상 내뱉고 싶었던 말을.

“저요. 항상 아빠라고 부르고 싶었어요……. 아빠라고 불러도 되나요?”

“……얼마든지. 얼마든지 그리 불러도 된다.”

꽉 안아오는 굳건한 팔을 느끼면서 나는 드디어 웃음을 삼킬 수 있었다.

* * *

끄윽, 끅.

기이한 소리가 울렸다.

그건 로제리엘이 입을 틀어막고 울음을 참는 소리였다.

‘용서해달라 빌지 않으마. 미안하다는 것만 알아다오. 떠나지만, 말아다오.’

먹먹한 아빠의 목소리가 생생히 들려왔다.

로제는 다시 한번 울컥 쏟아지는 눈물을 닦았다.

‘축언 도둑……으로 인해 정말 아무도 다친 사람 없는 거지요? 아빠는, 로제는요?’

언제나 다정하기만 한 언니의 목소리도 들렸다.

지금 그게 뭐가 중요해.

좀 더 이기적으로 자기 생각만 하지!

그러면서도 로제는 한숨과도 같이 속삭였다.

“……잘됐다.”

정말 잘됐다.

기억에 망할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중간에 대차게 꼬여 심각한 착각을 했던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썩어들어가는 것 같았지만.

잠시 뒤에는 다시 이 기억들을 잊어버리고 아무것도 모른 채 제 쌍둥이 언니를 너무 좋아하는 <영애는 달콤하다> 속 로제리엘 폰 힐링턴이 되어버리겠지만.

‘그래도 저 미소를 다시 볼 수 있어서 너무 좋아.’

그 미소 하나를 보고 여태까지 달려왔던 것이 후회되지 않았다.

하지만.

덜컥, 로제는 정색했다.

입술을 질겅질겅 깨물면서.

‘나는 어쩌지.’

언니가 가장 실망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건 바로 자신 아니겠는가.

무서웠다.

마왕과 싸우래도 용기백배인 로제리엘은 언제나 다정하고 상냥한 힐데아의 반응이 가장 무서웠다.

언니가 용서해줄까?

로제는 정말 갓 태어난 아이라도 된 것처럼 멍청하게 생각했다.

3살 때 느꼈던 혼란이 확 다시 불어나는 기분이었다.

‘그래, 일단은 오늘 말고. 오늘 말고 내일…….’

바로 그 순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