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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127화 (127/155)

127화. 바보야, 내가 어떻게 너를 미워해?

끼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그리고 침착하고 조용한 안색의 아름다운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여인이 웃었다.

“로제.”

그런데 이상하다.

항상 다정한 저 목소리가 왜 이렇게 무섭게 느껴지지?

“드디어 찾았다.”

어, 언니야.

“우리 대화 좀 할까?”

살려주세요…….

* * *

사교계의 연회는 낮과 밤을 가리지 않는다.

그리고 밤의 연회는 낮보다 훨씬 과감했다.

“힐데아 폰 힐링턴이 돌아왔다더군요.”

여인들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 힐데아 폰 힐링턴?”

“그래요. 벨키우스, 힐링턴, 그리고 고귀하신 황태자 전하까지 눈이 돌아 찾아다니던 그 여자 말이죠.”

시기와 질투가 담긴 말에 영애들이 코웃음을 쳤다.

그녀들의 감정도 다르지 않은 듯 내뱉는 말이 호의적이진 않았다.

“제국 수도가 축언 도둑으로 인해 얼어붙어 있는 와중에 그 여자 하나 찾겠다고 움직인 인력을 생각하면 지금도 정말 우습군요.”

“벨키우스와 힐링턴이 뭐에 눈이 멀어도 한참 먼 것이 아니겠어요?”

“그런데 대체 누구랑 돌아왔다던가요? 사교계의 소문대로 제 여동생에게 질투한 언니가 약혼식을 파투내려 그 자리에서 도망친 것이 맞다던가요?”

시기와 질투, 그것이 맞긴 했다.

힐데아 폰 힐링턴은 참 기이한 여자였으니까.

고귀하고 특별한 태생의 공작가 영애임에도 불구하고 과격한 보복을 한 적이 없는 이상한 여자.

은근히 뒤에서 험담하며 떠들어도 도도하고 냉정하게 못 들은 척 지나가는 모습은 당신들과 상대도 하기 싫다는 듯 보여 배알이 꼴리기는 했었지만.

“벨키우스 공작과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그럼 벨키우스 가문에서 찾았다는 소리인가요? 이게 어떻게 되는 거야. 제 동생 약혼식 망친 언니를 그 약혼자가 데려왔다고요?”

“하지만 그때 벨키우스 공작 각하의 청혼 상대는…… 누구였는지 아직 의견이 분분하잖아요?”

여인들의 얼굴에 짜증이 스쳤다.

이건 아직 사교계 내부에서도 확실히 결론 맺지 못한 건이었다.

그날. 그날 거기에 있던 모두가 보았지 않은가.

그곳에는 세 명의 주인공이 있었다.

하나는 힐링턴의 영애에게 청혼을 한 남자.

또 하나는 사랑스럽게 뺨을 붉히며 행복하다는 듯 웃고 있었던 여자 하나.

마지막으로 그런 둘을 보며 절망한 채 그대로 그 자리를 박차고 떠났던 여자 하나.

당연히 로제리엘 영애가 청혼을 받은 거다, 아니다 분명 벨키우스 공작의 시선은 힐데아 영애에게 있었다. 이것으로 말이 많았다.

특히 후자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근거는 이랬다.

미친 사람처럼 힐데아를 찾아다니는 벨키우스 공작이 바로 그 증거다!

“그런데 저는 좀…….”

“왜 그런가요?”

황후의 사람으로 유명한 귀부인이 떨떠름하게 중얼거리는 말에 여인들의 귀가 쫑긋했다.

저 입에서 나오는 말이 곧 황후의 메시지일 테니까.

“힐데아 폰 힐링턴 영애와 얽힌 이들의 행보가 모두 껄끄럽게 느껴지더군요. 그렇지 않은가요. 그 차분하시던 황태자 전하가 그 여자 하나 찾겠다고 움직이시던 모습도 기이하고, 벨키우스와 힐링턴의 대의를 무시하고 그 여자 하나만 찾아다니던 모습도 이상하지요.”

살랑살랑 흔들리는 부채를 보며 여인들은 튀어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그럼 저희가 시험해보는 것도 괜찮겠군요.”

“이번 연회에는 제 딸들도 참여하니 주시하라고 전해보겠어요.”

“대체 그 여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벨키우스 공작과는 무슨 관계가 된 건지. 그런 것들을 알아보면 재밌겠군요? 듣자하니 제 또래들의 험담도 제대로 대응한 적도 없는 성격이라고 하니까요.”

황후 폐하께서 그 여자를 제대로 적대하기로 결정하셨구나.

힐링턴의 공녀가 제대로 돌아왔다고 하니 분명 연회에 초대되어 그 낯을 들이밀 터.

“물러터진 것보다는 무시한 것 같다고는 하던데.”

“흥, 그게 그거지요. 어쨌거나 공작가의 영애로서의 제 위치와 힘도 제대로 쓰지 못한다는 거니까요!”

“한심하죠. 어쨌든 축언과 이능을 지녔는데 그것을 제대로 뽐내지도 못하는 꼴이란. 얼마나 못난 이능을 가졌길래 그러는 걸까요?”

하나는 분명했다.

힐데아 폰 힐링턴이 사교계에 복귀하게 되는 날.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싸늘한 사교계의 분위기 속에 벽의 꽃으로 시들어갈 것이라는 점 말이다.

* * *

이렇게 보니 로제가 정말 나와 똑같은 나이의 쌍둥이 동생이 아니라, 몇 살은 훨씬 더 어린아이같이 느껴졌다.

푹 숙여진 고개와 자신감 없이 축 처진 어깨가 더욱 그러해 보였다.

나는 진한 분홍색 머리카락을 바라보다가 결국 물었다.

“왜 피해 다녔어?”

시선만 돌려도 눈을 마주치던 로제였다. 그런데 내내 보이지 않았으니 필사적으로 날 피한 것이 분명했다.

아빠와의 대화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을 때 끅끅거리면서 울고 있던 로제는 바로 도망치려 했었으니까.

바로 잡지 않았다면 분명 튀었으리라.

그게 은근히 화가 났다.

왜 도망쳐. 왜.

너 답지 않게!

“로제리엘.”

그 단호한 부름이 신호탄이라도 된 것처럼 로제리엘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가 들어 올려져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나는 아주 잠시 흠칫 놀랐다.

로제, 너 콧물…….

“흐, 흐으, 언니…….”

이미 로제는 울고 있었다.

저 어여쁜 얼굴이 순간 얼마나 바보처럼 못나 보이는지, 나는 상황도 잊고 웃음을 터뜨릴 뻔했지만.

“언니야 미안해애애애애…….”

울음을 그치는 방법을 모르는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처럼 어깨까지 들썩거리며 우는 로제를 당황스럽게 바라봤다.

아니, 얘가.

화를 내려고 했더니 대뜸 울어버려?

“언니이, 내가, 내가 밉지? 흐어엉!”

어이가 없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가, 결국에는 푸시식 식어버렸다.

내 숱한 상처와 오해의 과정 속에 로제가 관련 있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특히, 가브리엘과의 일에는 로제가 적극 관여했었던 것 같다는 것도.

‘가브리엘에게 보석을 내내 받았다는 이야기는 좀 확인을 해야겠지만.’

하지만 동시에 로제는 언제나 가브리엘과 나를 단둘이 있게 만들려고 했고, 나를 혼자 두지 않으려 했으며, 그리고 항상.

‘다들 언니를 좋아해!’

그렇게 말하던 아이였다.

내 유일한 햇살이었다.

날 좋아해? 아니. 그럴 리가 없어.

그렇게 말하는 내게 로제는 지치지도 않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냐, 내가 언니를 좋아하는 것처럼 다들 언니를 좋아해! 언니 주변을…….’

그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끊어버린 것은 나였다.

로제가 내게 잘못한 것들이 있을지 모른다.

저렇게 서럽게 울 정도로의 잘못이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전에.

내가 어떻게 로제를 미워하겠어.

“왜 이렇게 바보같이 울어? 얼굴 못나졌네.”

“흐, 흐엉, 흐어엉! 나 언니 좋아, 흐윽, 흐으윽, 잘해보려고, 언니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 는데 바보 같이 망쳐버렸, 흐으!”

“아무것도 망치지 않았어.”

내 회색 세상에서 유일하게 웃고, 따뜻했던 사람이 있었다면 그건 로제였다.

“로제.”

“으, 으응, 언니, 흐, 으으.”

“이리 와.”

그러니 로제의 눈물은 다른 모든 사람의 눈물보다도 아팠고 속이 쓰렸다.

두 팔을 벌린 내게 로제가 진격하며 달려온 것은 그때였다.

억, 하는 소리가 난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로제는 힘이 정말 세니까.

“언니, 언니, 언니, 왜 화를 안 내, 나한테 화를 내야지, 왜 화를 하나도 안 내……. 내가 착각해서 중간에 벌인 일들이 언니한테 상처를 줬는데, 내가, 내가.”

윽, 근데 내 동생아. 도대체 단련을 얼마나 한 거니. 갈비뼈 부러진 것 같잖아…….

“그야, 네가 언제나 날 위해줬다는 걸 아니까.”

“……어?”

내 어깨에 마구 얼굴을 문대던 로제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올렸다.

“다 아니까. 넌 항상 날 좋아해줬잖아, 로제.”

“어, 언니.”

흠뻑 젖은 눈이 바로 앞에서 커다랗게 떠지며 나를 바라봤다.

난 웃었다.

내 웃음을 멍하니 바라보는 로제를 보며 더욱 활짝 웃었다.

아, 오늘 울다가 웃은 적이 몇 번이지?

“과정은 엇갈렸을지 몰라도 그걸 알아.”

로제는 항상 밝았다.

“항상 내게 손을 뻗었고.”

그리고 모두가 로제에게 많이 의지했다.

“같이 웃으려고 했잖아.”

나는 항상 저 아이는 여주인공이니까, 저렇게 밝은 아이니까 당연히 사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슬퍼했지만.

로제라고 모든 것이 쉬웠을까?

“그걸 모두 기억하니까.”

“언, 언니…….”

“그렇게 떠나서 미안해. 로제. 언니가 옆에 있었어야 했는데. 많이 놀랐지?”

“으…….”

로제의 얼굴이 다시금 흠뻑 젖었다.

엉망으로 일그러진 얼굴이 이토록 귀여운 것은 내가 동생에게 콩깍지가 씐 언니라서일까?

“언니가, 언니가 왜 사과를 해. 왜 나한테 사과를 해! 흐, 흐엉, 사과는 내가…… 내가 해야 하는데.”

아니. 그렇지 않아.

어색해하는 아빠와 언니를 사이에 두고, 잘 어울리지 못하는 쌍둥이 언니를 보며 어떻게든 어울리게 하려고 노력하고.

이제는 보였다.

그 노력들이.

“너도 하고 나도 하면 돼. 둘 다 잘못하고 싸우고 화해하면 되잖아?”

“이게, 그렇게 간단한 일이야?”

“응. 간단하더라. 그걸 몰랐어. 그리고 말이야, 로제.”

나는 빨갛게 변한 로제의 코를 툭 쳤다.

“아, 아파.”

코를 부여잡고 맹한 소리를 내는 로제를 보며 정말 웃음이 터졌다.

로제도 무서워하는 게 있었구나.

그래, 당연하지.

그걸 왜 난 몰랐지?

“동생이 언니한테 잘못 좀 하면 어때? 실수 좀 하면 어떻고. 내가 너한테 잘못하면 그대로 모른 척하고 다시는 안 볼 거야?”

“아,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절대 날 놓을 생각을 하지 않는 로제의 단단한 팔을 느끼며 눈을 휘었다.

꽉 잡은 손.

어릴 때도 꽉 잡은 그 손으로 인해 나는 다시 잃었던 말을 시작했다.

“그래. 그거야. 네가 잘못했다고 하면 생각 좀 해보고 용서해줄 거야. 네가 언니를 그렇게 용서해줄 것처럼.”

끄으으, 꼭 앓는 토끼처럼 이상한 소리를 낸 로제가 다시 한번 와락 나를 껴안았다.

“언니, 좋아!”

윽 소리를 내며 고통을 참는 내 모습이 보이지도 않는 것인지, 나무를 표범처럼 늠름하게 잘 타는 내 씩씩한 동생이 울먹이며 속삭였다.

“언니, 이제 어디도 가지 마. 응? 내가 잘못했어. 정말 잘할 거야. 언니한테 꼭꼭 제대로 물어보고 행동할게…….”

귀여운 울먹거림을 들으며 나는 로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묻고 싶은 것을 물었다.

“가브리엘에게 보석을 받았다며?”

움찔.

“내 편지를 보여줬다던데.”

움찔.

“로제, 너 마법 잡화 상점의 상단주지?”

로제는 숨 쉬는 것조차 멈춘 것 같았다.

나는 조용히 웃었다.

“들어야 할 말이 많을 것 같구나. 걱정 마, 밤은 길단다.”

응? 이상하다.

왜 로제가 떨고 있는 것 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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