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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128화 (128/155)

128화. 판을 깔아볼까요?

로제리엘은 힐데아의 침실 문을 닫고 나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까지 오는 길이 쉽지 않았을 테니, 겨우 버텼던 힐데아는 그대로 곯아떨어진 상태였다.

고개를 돌리자 언제부터 거기에 서 있었을지 모를 남자가 눈을 빛내고 있었다.

저 집착 어린 눈빛을 언니 앞에서는 얌전한 척 뜨는 걸까?

“대체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던 거예요? 이 정도면 무서운데.”

짜증난다는 듯 툭 내뱉자 상대의 눈은 더욱 무섭게 희번덕거렸다.

어휴, 저걸 언니가 봤어야 했는데.

“로제리엘 영애. 당신이 힐데아를 울렸는지 괴롭혔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말입니다.”

“어머, 나로 인해 운 것보다 당신 때문에 운 적이 몇백 배는 많을 텐데 무슨 거들먹이람?”

“하. 언제든 좋아질 수가 없는 사이입니다.”

“누가 할 말인데요.”

로제리엘은 조금 전 힐데아와 나눴던 대화 중 하나를 떠올렸다.

‘언니, 가브리엘은 어때?’

로제는 꽃처럼 피어나는 힐데아의 미소를 황홀하게 바라보았다.

그건 정말 행복한 사람의 표정이었다.

‘……응. 부끄럽지만, 그래. 나는 그 사람이 좋아, 로제.’

예전과는 달리 망설임 하나 없는 솔직한 말들도 뒤따랐다.

동시에 로제는 깨달았다.

자신에게 꾹꾹 눌러 있던 금제 같은 것이 그 순간 살며시 풀리는 것을.

아아, 드디어.

완벽한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히 풀렸다.

대놓고 물어볼 수 없었던 것들을 이제는 물어볼 수 있으리라.

보이지 않는 제약 때문에 한 번도 직접적으로 내뱉을 수 없었던 말.

-가브리엘, 언니가 당신 좋아해요!

-언니, 가브리엘이 언니 미친 듯이 좋아해!

가브리엘도 힐데아도 서로 자각했기 때문에 바뀐 것이리라.

이제는 언제든 당당히 ‘당신들 서로를 미친 듯이 좋아하잖아! 둘밖에 안 보이잖아, 이 답답이들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 그러진 않겠지만.

그래도 다른 변명은 했다.

힐데아가 가브리엘과 자신의 사이를 잘못 알았다고 들었을 때, 정말, 내내, 미친듯이 억울했으니까!

‘언니, 난 가브리엘 이성으로 좋아한 적 없어. 결혼하고 싶어한 적도 없어. 친한 건 사실인데 그건 서로 물어뜯는 사이라서 그래. 미운정 알지?’

‘어, 그, 그래?’

‘응! 가브리엘과 결혼할 바엔 접싯물에 코 박고 죽지!’

‘그, 렇구나.’

쏟아지는 말에 힐데아는 멍한 표정이었지만, 로제는 언니의 그런 표정에도 약해지지 않고 제대로 말할 수 없던 것들을 미친 듯이 쏟아냈다.

‘돈과 정보가 오가는 사이가 아니었으면 제대로 쳐다도 안 봤을걸. 뭐랄까, 동족 혐오? 우리 둘 다 언니를 너무 좋아해서. 그런데 내가 가브리엘과 결혼? 으으, 끔찍하다. 진짜 구역질이…….’

‘그 정도라고?’

힐데아의 벙찐 표정을 떠올리며 눈앞의 진저리나게 잘생긴 남자, 이 세계의 남자주인공, 그러나 사랑은커녕 연애 감정이 쌀알만큼도 올라온 적 없던 이를 바라봤다.

그리고 빈정거렸다.

“왜 모를까. 저 미친 눈을 보면 알 수밖에 없었을 텐데.”

가브리엘의 눈썹이 불쾌감으로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로제는 짜증이 났다.

아니, 왜 언니한테 가는 편지랑 내가 받는 편지랑 비교할 수 있다는 걸 몰랐을까.

나는 바본가? 그리고 저 남자도 그걸 한 번도 생각 안 했으니까 같이 바본가?

아악! 로제는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으나, 눈앞의 가브리엘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뭐라고 하는 겁니까?”

로제는 이제 대놓고 다 말할 수 있으니, 곤히 잠든 힐데아의 침실 문을 열고 대뜸 소리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언니! 언니! 언니가 좋아한다고 하는 이 남자는 완전 미친놈이야! 지금도 언니가 가족들한테 시달린 게 걱정되어서 여기서 이러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살기까지 띄우면서, 이 미친놈이!

“하. 이렇게 돌은 놈처럼 언니한테 미쳐 있는데.”

“그게 내 이야기는 아니겠지.”

“맞는데. 가끔 무서울 정도라고요. 그리고 왜 모르지? 내가 당신을 이렇게 싫어하는데요!”

“……하, 어이가 없군. 이제 대놓고 시비입니까?”

서로 노려보긴 했지만, 정말 죽일 듯 미워하는 건 아니었다.

로제의 어깨에 안도로 힘이 풀리는 것처럼 눈앞의 가브리엘 역시 눈에 띄게 안심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힐데아 폰 힐링턴의 미소를 되찾았다.

이제 더는 이 힐링턴이 힐데아에게 아픔이 되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다.

그렇게 바꾸어나갈 수 있으리라.

“언니는. 좋아 보였어요?”

“그 마을에서 말입니까.”

“응, 정말 고마운 사람들이야…….”

“이미 많은 물건들을 보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야 당연하잖아요. 언니를 저렇게 따뜻하게 대해줬던 사람들인데. 황후나 황제가 수작 못 부리게 뒤처리까지 하는 것도 잊지 않았고요. 마법 잡화 상점을 그대로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다면 루다나 마을을 건드릴 생각은 꿈도 못 꾸겠죠.”

냉소적으로 말하며 픽 비웃자, 기이한 얼굴을 하면서 바라보는 가브리엘이 보였다.

어쩐지 헛웃음이 나왔다.

이 길이 뭐가 그리 어렵다고 이렇게 팽팽 돌아서 왔을까.

앞으로 저 악우와 언니가 다정하게 손잡고 웃을 것을 생각하면 여전히 배알이 꼴렸지만, 그래도.

“언니랑 잘 돌아왔어요, 가브리엘.”

그래도 언니는 행복할 테니까.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예비 형부.”

잔뜩 일그러지는 얼굴을 보니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왜, 예비입니까? 예비 떼고 부르십시오, 로제리엘 영애.”

“아아, 그게 걸렸어요? 당신 성격 진짜 짜증나는 거 알죠? 이 오만한 작자야.”

그들의 투닥거림은 이어졌다.

꽤 시끄럽게.

깊이 잠들었던 힐데아가 눈을 비비적거리며 문을 열고 나올 때까지.

아. 동상처럼 굳어진 두 사람을 바라보며 힐데아는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마침내 깨달았다는 듯 탄식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로제. 그리고 가브리엘.”

“…….”

“…….”

힐데아는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보니 남매 같네요.”

물론 둘은 그 남매라는 호칭도 싫어 부르르 떨었지만 말이다.

* * *

아직도 신기했다.

“자꾸 웃음이 나오네.”

항상 이 책상 앞에 앉아 슬픔을 삼킨 적이 숱하게 많았는데, 지금은 이렇게 웃음을 지으며 편지를 쓰고 있었다.

안녕, 엘라.

그렇게 시작하는 편지는 제법 길게 이어졌다.

사실은 가족들이 이러했다는 말을 쓸 때마다 ‘어머, 어머, 어머!’라며 맞장구를 칠 엘라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고.

다들 울며 화해를 했다는 이야기를 쓸 때에는 ‘잘됐다, 정말 잘됐구나, 힐.’ 그렇게 말하는 마사 부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동생에 대해 이야기를 쓸 때는 ‘언니야, 내가 쪼아요, 언니 동생이 쪼아요?’ 하고 물어볼 루아가 생각나기도 했고.

“정말 좋은 사람들이야.”

급히 떠나왔기 때문에 더 마음이 쓰였다.

나는 내 뒤를 따라 도착할 것이라 했던 크라이스가 소식을 전해주는 대로 그를 한번 찾아갈 생각이었다.

“당신들 덕분이에요.”

나는 편지 봉투를 닫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꿈만 같아.”

지난 밤, 악몽 하나도 꾸지 않고 푹 잠들 수 있었다.

“다들…….”

눈을 뜨자마자 본 것은 어쩐지 눈을 번뜩이는 시엔이었기 때문에 깜짝 놀라기도 했었지만, 곧 시엔은 리라에게 등짝을 맞으며 다른 시녀들의 손에 끌려 나갔다.

어안이 벙벙한 나를 보며 리라가 상냥하게 웃지 않았다면, ‘잘 주무셨어요, 아가씨?’하고 조심스럽게 물어보지 않았다면 어제 있던 일이 꿈인 줄 알았으리라.

어쨌든 상쾌했고, 용기도 났다.

앞으로도 잘할 수 있을 거야.

그게 뭐든지.

‘축언 도둑에 관한 일이라도.’

황궁의 움직임을 봐선 분명 어떤 일이라도 일어날 것이다.

그걸 고민해야겠지만…….

‘일단은.’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빠와 로제 먼저.’

가족들과 식사할 시간이었다.

* * *

“아빠.”

땡그랑!

“…….”

시선이 이쪽으로 집중되었고, 나는 아빠가 수전증 걸린 사람처럼 손을 떨며 나이프를 놓치는 모습을 바라봤다.

‘음. 저렇게들 쳐다보면 부담되는데.’

그래도 한번 심호흡을 한 뒤, 떨리는 아빠의 눈을 보며 다시 한번 말했다.

“아빠. 어제는…… 잘 주무셨어요?”

“헉!”

이제 이 침묵이 싸늘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우리의 모습을 보고 있던 사용인들은 올라오는 격한 것을 참기 위해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었고,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으니까.

“앞으로.”

나는 축축하게 젖은 손을 주먹 쥐어 숨기며 턱에 힘을 주었다.

피하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는 더 행복해질 거예요.”

“히, 힐데아…….”

“다 같이, 그랬으면 좋겠어요.”

하루아침에 모두 자연스럽게 바뀌진 않겠지만, 그래도 이제 피하지 않고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나도 바뀌어야 하니까.’

그리고 다시 한번 부르기도 전에 의자가 드르륵 끌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격하게 끌어안겼다.

“흐, 내 딸, 내 소중한 딸!”

“윽! 아, 아빠?”

“그래, 내가 아빠다, 아빠야!”

평소라면 근엄하게 가주의 위엄을 지키며 자리에 앉아 계셨을 아빠가 성난 들소처럼 내게 달려온 것이다.

그리고 발작적인 가브리엘의 외침이 들렸다.

“이게 무슨 추태, 당장 힐데아를 놓지 못하겠습니까!”

“내 딸을 내가 안겠다는데 네놈이 무슨 상관이냐! 꺼져라!”

“하, 무려 힐링턴 공작께서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이 변해서야 되겠습니까?”

“힐이 돌아왔으니 네놈은 필요 없다!”

“죽어도 힐데아 옆에서 안 떨어질 겁니다.”

왁왁 오가는 대화에 로제까지 끼어들었다.

“아빠가 딸을 끌어안겠다는데 왜 공작 각하께서 방해하시나!”

“당신은 빠지십시오, 로제리엘 영애.”

“언니, 언니, 저 인간이 저래! 저렇게 싸가지가, 읍!”

“힐데아, 당신의 동생 분은 이렇습니다. 항상 언니의 앞에서만 귀여운 척 내숭을- 윽!”

“퉤, 어디다 더러운 손을 가져다 대요!”

“내 발 밟았습니까, 지금?”

역시 어제 잠깐 깨서 봤던 광경이 거짓이 아니었구나.

로제와 가브리엘의 사이가 참…….

“아빠라고, 아하하하, 아빠라고!”

그리고 세상 다 가진 것처럼 크게 웃는 아빠의 모습을 보며 얼굴이 점점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니.

아, 정신없어.

“축하드립니다, 가주님!”

“정말 축하드립니다! 흐엉, 흐어엉, 오늘을 역사에 새겨야, 아니 영상을 떠야!”

민망할 정도로 울고 웃는 사람들 속에서 나도 결국 웃고 말았다.

개판처럼 시끄러웠지만.

어색하고 어설프고, 또 아직 갈 길이 멀었지만.

지금은 이렇게 행복하니까.

* * *

그리고 그날.

황궁에서 한 초대장이 날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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