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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129화 (129/155)

129화. 쉽게 당하지 않아

사라졌던 그 힐링턴의 첫째가 사교계에 복귀할 예정이다!

그 소문은 번지기가 무섭게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었다.

게다가 그것이 사실이라는 양, 황궁에서는 축언 도둑 사건 이래 화려하게 열지 않았던 황궁 연회를 재개하며 초대장을 돌렸다.

주최자는 황제의 총애를 받는 황녀, 라피이아였다.

이것이 무슨 뜻이겠는가?

귀족들은 언제 죽을지 몰라 전전긍긍하던 분위기에서 벗어나, 은근히 기대하기 시작했다.

그 가브리엘이다.

속사정은 몰라도 미친 사람처럼 굴며 힐링턴의 첫째만 찾아 헤매던 영웅.

그런데 그 당사자가 제국으로 다시 돌아왔다면, 제국의 안위도 도외시했던 영웅이 드디어 제정신으로 돌아와 나타날지 모르는 일이었다.

“영웅이니까요.”

우연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축언 도둑 사건이 멈춘 것도 벨키우스 공작이 돌아온 것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만약 축언 도둑 사건이 자연재해나 전염병이 아닌 누군가의 수작이라면, 벨키우스 공작이 두려워 멈춘 것일 수도 있죠!”

“맞습니다, 무시할 수 없는 가정이 아니겠습니까?”

그건 황제파에서 더욱 목말라하는 기대였다.

황제의 은밀한 명령은 치료사 힐이라는 자를 데리고 오는 것이었는데, 보란 듯이 놓쳐버리고 말았으니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황후도 그 정보를 듣고 황태자를 움직였는데, 그 역시 허탕을 치고 되돌아오고 있다는 사실일까.

이대로라면 정말 미엘르 제국이 휘청일지도 몰랐다.

“그나저나 치료사 힐이라는 이름, 꼭 힐데아 영애의 애칭처럼 들리네요, 하하…….”

누군가가 농담처럼 한 말에 모여 있던 귀족들이 싸늘해졌다.

하지만 곧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듯한 웃음이 번졌다.

“하하,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농담을 하세요? 그 여자가 그렇게 대단한 이능을 지녔을 리 없잖아요?”

그 냉정한 목소리에 말을 꺼냈던 자도 픽 비웃었다.

“그렇죠. 축언 도둑에 당한 사람을 살려낸 유일한 이능인데, 그 여자가 그런 대단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면 여태 불길한 축언이다 뭐다 욕을 먹으면서 지냈을 리 없겠지요.”

당연하다.

힐링턴의 첫째는 다가가기도 꺼림직하고 무서운 상대였지만, 그래도 은근한 비웃음의 대상이었다.

공작가의 여식이면서도 자신의 작위로 누군가를 핍박하지 않고, 도도하고 고고한 척 언제나 그들과 말도 섞은 적이 없는 여자였으니까.

그런데 왜일까.

대체 왜 이렇게 소름이 돋을까?

“하하,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 말고 연회에 대해 더 이야기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귀족들은 괜히 섬뜩한 기분에 부채를 열심히 팔락이며 눈에 힘을 주었다.

어쨌든 곧 열릴 황녀의 연회장에서 모두 확인될 일이다.

두문불출 사라졌던 힐링턴 영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 * *

“휴우, 드레스를 또…….”

사교계는 지긋지긋했다.

요즘 나는 가족들과 이전과는 달리 매우 우호적인 분위기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지만, 그래도 다시 귀족 영애가 되어 사교계 준비를 하려니 힘이 빠졌다.

‘루다나 마을에 있을 때는 이게 참 좋았는데.’

허리를 꽉 조이는 코르셋도 없고, 치렁치렁하게 늘어뜨려 숨 막히도록 무거운 드레스도 없고, 하루 종일 발 부서져라 신어야 하는 구두도 없었다.

그런 와중에 힐링턴 공작가에 관심을 두고 다가올 인간들과도 마음에도 없는 인사를 나눠야한다.

그 과정이 얼마나 귀찮고 사람 진을 빼놓는지는 이골이 날 정도로 잘 알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있다면.

“언니, 언니, 가브리엘과 같이 간다며?”

“아, 로제. 으응, 그렇게 됐어.”

연회장에 가브리엘과 함께일 것이라는 점이다.

예전에는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불편했었는데, 이제는 이렇게 든든하다니 참 신기하기도 하지.

어쩐지 가브리엘을 생각하니 그가 무척 보고 싶…….

‘응? 왜 로제가 저렇게 날 보지?’

로제는 꼭 소름을 참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후아- 하고 숨을 거칠게 내쉬더니 빠르게 말했다.

“우와, 언니, 그 인간 생각만 해도 그렇게 좋아? 엉? 아주 얼굴에 꽃이 피었어요!”

앗. 정말?

나는 당황해서 얼굴을 감쌌다.

얘, 얘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로제는 입을 내밀며 툴툴거렸다.

“나 질투 나려고 해. 언제는 내가 제일 좋다고 했으면서……. 으으, 역시 얄미운 가브리엘은 힐링턴의 원수! 아니, 나 로제리엘의 원수!”

“그, 그런 거 아니야. 그리고 원수는 무슨.”

로제는 숫제 발을 쾅 굴렀다.

“아니긴 뭘! 얼굴이 그렇게 빨갛게 변했는데! 이렇게 편까지 들면서! 아니지. 우리 아빠 또 하염없이 우셨던 거 아냐?”

“아빠도 승낙하셨어.”

“아냐, 아냐. 그 뒤에 일기장에 오늘도 기록을 남기겠지. 가브리엘 망할 놈이 우리 딸 힐데아를…….”

나는 펑펑 눈물을 터뜨리던 아빠를 떠올리고 떨떠름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설마 그럴 리가.”

“에휴, 언니는 아직도 우리 아빠를 잘 모르네.”

처음 황녀 라피이아에게서 초대장이 날아왔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쌍욕을 내뱉어 날 깜짝 놀라게 했던 우리 로제는 언제 그랬냐는 듯 능글맞게 웃었다.

얘를 누가 말려.

“근데 언니야, 정말 내가 따라가지 않아도 괜찮겠어? 사교계 분위기 굉장히 안 좋거든. 황후파고 황제파고 다 언니한테 시비를 걸지도 몰라.”

나는 빙그레 웃었다.

그래서 너를 데리고 가지 않는 거란다, 로제야.

로제의 말이 맞다.

분명 황녀나 황제, 그리고 황후 쪽도 내게 시비를 걸어올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아직 이동 중이라는 황태자가 이르게 도착하게 되면 직접 내게 물을지도 몰랐다.

치료사 힐과의 관계라던가.

“걱정하지 마, 그래도 힐링턴의 영애로서 그런 자리에 나섰던 것은 네가 아니라 나였잖니.”

“그건 그렇지만…….”

이제 숨겨진 진실을 모두 알게 된 나는, 나를 위해 로제가 무슨 짓을 저지를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야.’

이제는 안다.

‘네가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내 동생은 나를 너무 좋아했다.

무슨 짓을 할 각오가 되어 있는 그 눈이 심장을 따뜻하게 하면서도 두려웠다.

난 걱정을 감춘 로제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로제, 나는 네가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어린아이가 아니잖아.”

“그야…….”

내 말에 시무룩해졌던 로제가 한숨을 내쉬었다.

“황녀가 언니를 직접 불렀잖아. 그 여자 꿍꿍이를 어찌 안담. 저번에도 언니 잡아먹을 듯이 굴었었는데, 이번이라고 뭐가 다르겠어?”

확실히 황녀는 만만치 않은 상대였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가브리엘에 대한 짝사랑으로 무너져가고 있었던 이전이라면 몰라도 이제는 다르다.

“언니가 바로 나서야 하는 상황이 마음에 안 들어. 물론 황태자가 오기 전에 얼굴 비쳐서 증거 만들어야 하는 상황인 건 나도 잘 알지만.”

로제의 얼굴에 짜증이 떠올랐다.

“축언 도둑, 그거 아직도 못 잡았단 말이야. 그거 분명 사람일 텐데.”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로제는 진지하게 물었다.

“언니도 그렇게 생각하지?”

“……응. 그렇지.”

로제가 쭉 정리해서 들려준 이야기를 모두 들었고, 나도 축언 도둑이 분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우연한 사고나 전염병이라고 하기에는 노리는 바가 확실해. 피해자는 축언과 이능을 가진 귀족. 물론 우리 가문이나 벨키우스 사람을 건드린 적은 없지만…….”

나는 새삼스럽게 정색한 로제를 바라봤다.

냉정한 말투.

차분한 목소리.

그리고 경계하며 일그러진 표정.

“그 공격 대상이 언니가 될 수도 있어.”

참 낯설었다.

내 동생은 사실 이렇게 깊은 생각을 할 수 있었구나.

‘감춰진 것을 보지 못했던 건 나였을지도 몰라.’

하지만 로제는 왜 저렇게 절박했을까. 뭘 지키려고. 아니, 뭘 알고 있기에?

‘나처럼 원작을 알고 있던 것도 아니고.’

로제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손을 꽉 잡았다.

“언니, 그러니까 조심해야 해.”

“응.”

“자나 깨나 인간 조심, 다가오는 사람은 일단 경계하고 물어뜯을 준비 하고.”

“으, 응.”

“혹시 상대 안 되면 가브리엘 미끼로 삼고 뒤로 숨자.”

“……응?”

얘한테 가브리엘은 대체 뭐지.

아무리 그래도 전쟁 영웅인데 취급 너무한 거 아닐까.

난 이런 두 사람을 사랑하는 사이로 오해하고…….

음, 민망함에 얼굴을 문질렀다.

“그건 내가 치료사 힐이니까?”

“응. 그건 당분간 절대 귀족 새끼…… 놈들에게 들키면 안 돼.”

로제의 얼굴에 먹구름이 꼈다.

내가 치료사 힐이라는 것을 알아낸다면, 그 축언 도둑은 내게 접근해올까.

‘아직도 모르겠어. 대체 왜 원작에도 없던 사건이 일어난 거지.’

그때, 로제가 두 눈을 부릅떴다.

“가브리엘이 도움 안 되고, 황녀가 너무 괴롭힌다 싶으면 그때 내가 소개해준 귀부인들 있지, 그분들 뒤로 숨어. 언니야.”

“…….”

음,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 척 발랄하게 주변 귀부인들과 영애들을 휘감았던 로제의 모습들은 모두 의도적이었나 보다.

아마도 로제는 황녀와 황후, 그리고 황제의 괴롭힘이 없도록 그 귀부인들의 무리 속에 나를 집어넣으려고 했던 것이 틀림없었다.

내가 잘 어울리지 못하고 튕겨 나왔지만…….

로제가 원작의 여주인공처럼 온갖 괴롭힘에 휩쓸릴까 봐 걱정하며 내가 저 아이 대신 앞으로 나서려고 했었던 것처럼, 로제만의 방식으로.

‘아니, 잠깐.’

이렇게 보니 내 동생 무서운데?

대체 언제부터 준비한 거야?

“로제, 너어.”

얘 대체 뭐지?

“응? 히히. 왜?”

눈이 마주치자 까르르 웃는 모습은 여전히 내가 알고 있는 순진하고 밝은 우리 로제가 맞았는데 말이지.

‘마법 잡화 상점의 상단주에, 여태까지 가브리엘과 했던 거래도 그러하고, 얘는 내가 모르는 사이에 대체 뭔 일들을 저지르고 다닌 걸까.’

상단주가 로제라는 것을 예측한 이유는 간단했다.

그 먼 거리까지 사람을 보내 루다나 마을 사람들까지 지키고, 나한테 그렇게 호의적인 관심을 두며, 거기다 날 보고 싶어하기까지 한 인물이 또 얼마나 있겠는가.

제일 결정적으로 의심 많은 가브리엘이 믿고 협력하는 대상은 많지 않았다.

‘그래도 이건 너무 다 로제 혼자 해 먹는 것 같은데. 돈과 정보 모두 끌어 모으고 있었다는 거잖아. 대체 왜?’

우리 로제가 원작의 여주인공 로제리엘과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가냘프고 연약해서 얼음 심장을 가지고 있던 가브리엘을 사르르 녹였던 햇살 여주는 어디로 가고…….

“응, 언니야. 왜 표정이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갑자기 허탈해지긴 했었지만, 그래도 뭐 어쨌든.

“로제. 걱정하지 마.”

나는 조용히 입술을 끌어당겼다.

“언니도 그렇게 약하지 않거든.”

로제는 날 너무 좋게 보는 경향이 있었지만, 내가 항상 마음을 쓰다가 바닥까지 침몰했던 것은 내가 아끼는 사람들에 한해서였다.

그러니 더는 다가오는 시비를 유하게 받아줄 이유가 없었다.

그게 누구든지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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