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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131화 (131/155)

131화. 나는 힐링턴입니다 (2)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나였다.

“힐링턴의 힐데아, 제국의 고귀하신 작은 달을 뵙습니다.”

작은 코웃음.

“그대, 오랜만이로군요?”

이어지는 도도하고 오만한 목소리.

황녀, 라피이아였다.

“도통 보이지가 않던데. 그대에게 나는 모르는 바쁜 일이 있었나 보군요.”

살짝 비웃는 듯한 그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대꾸했다.

“몸이 좋지 않아 요양을 다녀온 차입니다.”

“호오, 요양.”

“네, 그렇습니다. 돌아온 지는 꽤 되었지요.”

황녀 뒤엔 금붕어 똥처럼 달고 다니는 귀족 영애들도 보였는데, 내 말에 날카롭게 반응한 것은 황녀보단 오히려 그녀들이었다.

“하!”

“나 참, 그런 거짓말을…….”

“이건 전하를 모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지요!”

그녀들은 당장 달려들어 내 머리채라도 쥐어뜯고 싶다는 듯 노려보았는데, 굳건히 버티고 선 가브리엘 때문에 그러지 못한다는 듯 이를 갈고 있었다.

이제 황녀가 나를 공격하겠지. 요양이 아니라 우기면 무슨 근거로 조롱하느냐는 식으로 맞받아치면 될…….

“그런데 그대, 벨키우스 공작. 그대는 여인들이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 부득불 끼어들고 싶은 건가?”

나를 찌르리라 생각한 황녀의 못마땅해하는 시선이 내 옆의 가브리엘에게 향했다.

그건 무척이나 의외였다.

말을 맞춘 것이 아니라는 건, 황녀의 뒤에 있던 영애들의 당황한 얼굴을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뭐지?’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어쩐지 황녀의 시선 속에…… 예전에 느꼈던 적대감이 느껴지지 않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잖아.

내가 고민하는 사이에도 가브리엘과 황녀 사이에는 살벌한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너무 소중한 분이라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오호라, 그런 낯짝 두꺼운 말도 할 줄 알았는지 몰랐군요, 공작.”

“황녀 전하께서는 주최자로 바쁘실 텐데 이곳에 그만 시간을 할애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가브리엘의 빈정거리는 소리에 황녀 쪽 영애들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당장 그 무례함에 대해 성토하고 싶어 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이번에도 또 황녀가 초를 쳤다.

“하긴, 공작과 내가 나눌 친밀한 대화 따위 없긴 하지.”

황녀가 그렇게 말하며 한걸음 뒤로 물러난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그대에게는 궁금한 것이 있어.”

꼭 무언가를 가늠해보듯이.

“무엇이십니까, 황녀 전하?”

“흐응.”

“……전하?”

“그대, 자매 사이의 피 튀기는 로맨스는 그만두기로 한 건지?”

“…….”

그건 로제리엘과 나, 그리고 가브리엘 사이에 흐르던 소문들을 비꼬는 말이었다.

그야말로 선명한 돌직구였다.

“그것이 이 자리에서 중요한 질문이라면 대답하겠으나, 그렇지 않은 것 같군요, 전하.”

그런데 어째서일까?

“재밌어.”

“예?”

“그대, 변했군요. 아주 많이.”

무슨?

“뭐가 그대를 변하게 했지?”

“무슨 말씀이신지 잘…….”

“뭐, 됐어요. 지금 당장은 들을 생각 없었으니.”

도도하고 오만한 눈빛에 서린 호기심이 이전과는 달리 그렇게까지 꺼려지진 않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더 자세히 살피기도 전에 황녀가 시선을 휙 돌렸다.

아니, 몸을 완전히 돌렸다.

“인사는 나누었으니 연회를 즐기도록 해요. 이 몸은 앞으로도 맞이할 객이 많아서, 불쾌한 낯짝을 계속 보고 싶진 않군요.”

그 불쾌한 낯짝이 가브리엘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을 모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미련 없다는 듯 순식간에 멀어지는 황녀의 뒷모습을 보며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정말 이대로 간다고?’

당황스럽게 제 주인의 행보를 보던 황녀의 추종자 영애들이 입술을 잘근거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우르르 황녀의 뒤를 따라가는 게 아닌가.

이럴 리가 없는데.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습니다. 아주, 불쾌해.”

가브리엘의 낯은 목소리는 으르렁거리는 짐승 같았다.

그러나 나도 동의했다.

“약점을 잡으리라 생각했어요.”

“예, 그게 황녀의 더러운 성격을 생각하면 더 맞는 방향입니다.”

“그런데 왜.”

차라리 대놓고 적의를 보이는 상대는 상대하기 쉽다.

하지만 속을 알 수 없는 자는…….

‘어디로 튈지 모르니 무서운 법이야.’

그러나 모두가 황녀의 돌발 행동에 동의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녀가 아니더라도 노려보는 시선들은 많았고, 그들 중 몇 명의 영애가 내 쪽으로 다가왔으니까.

직접 시선을 마주치고 대화를 나누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흥, 낯짝도 뻔뻔하지. 자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손해를 입었는데 아무렇지 않게 요양?”

내가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린 것이 문제였다.

‘거리낌도 없네.’

영애들은 키득거리면서 분명 내가 들을 수 있는 거리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내가 바라보는 것을 느꼈는지 제일 목소리가 큰 영애가 눈을 휘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악의적으로 비틀리는 입술도.

“어머, 그러니까요. 거기다 동생의 남자를 차지한 것이 뭐 얼마나 대단한 일이라고 저렇게 의기양양해서는…….”

“오, 물론 이건 제 친구의 친구 이야기랍니다. 이 자리에 없는 제 친구의 친구!”

“오호호호호!”

반응은 내가 아니라 가브리엘에게서 즉각적으로 나왔다.

“하, 저 미친 여자들을 당장…….”

나는 차분하게 그의 팔을 잡았다.

“힐?”

“가브리엘, 잠시만.”

그의 단단한 팔 근육이 선명히 느껴졌다.

잔뜩 화가 나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것처럼.

‘나 대신 화를 내주는 사람.’

어쩐지 상황도 잊고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가브리엘은 얼굴을 구기며 당장 내 귀를 막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왜냐하면.”

이전에도 이런 일은 많았다.

내 흉을 보는 이들은 많았다.

그것이 내가 답답해 보여서였는지, 아니면 불길한 축언을 지녔다는 첫째 공녀라는 소문 때문이었을지 모르겠다.

다만 그런 반응을 목격했을 때 내가 언제나 그들에게 굳이 따지지 않고 침묵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듣지 못한 척, 보지 못한 척.

전생에서부터 나를 비난하는 자들에게 그런 식으로 대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충분했었으니까.’

누구 하나 내 말을 들어주지 않고, 내가 내뱉는 호소가 닿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약해지거나 흔들리면 더 지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브리엘, 내가.”

가브리엘의 팔에서 손을 떼고 앞으로 나아갔다.

“이제 참지 않을 거거든요.”

“……힐?”

내 일로 나보다 더 슬퍼하고, 아파하고, 화를 내는 사람이 바로 옆에 있으니까.

시시덕거리는 그 여자들의 앞에 또각거리며 다가가자, 당혹한 표정을 하는 것이 보였다.

왜. 내가 이렇게 다가올 줄 몰랐던 모양이지. 언제나처럼 무시할 줄 알았구나.

나는 무표정하게 그녀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영애들.”

어깨들이 흠칫 뛰었다.

그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기묘하게 비틀어진 얼굴로 날 바라봤다.

“……지금 저희를 부르신 건가요?”

인사는 없었다.

내가 누군지 알고 있는데도.

“그래요, 당신들.”

나는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가만히 넘기기에는 지독하게.”

차갑게 내리뜨는 눈은 언제나처럼 내 얼굴을 더욱 냉정하고 서늘하게 만들 것이다.

“무례하군요.”

커다랗게 떠지는 눈들이 겁먹은 어린 뱀들 같았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가…….”

“차라리 대놓고 욕을 하도록 해요. 이건 너무 비겁하고 무례한 방식이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고작 이 한마디.

내가 무시하지 않고 뭐라고 하는 그 한마디에 여자들은 입을 꾹 다물고 얼굴을 벌겋게 물들였다.

아무런 항의도 못 하고.

“그런데 당신들 중 누구도 내게 먼저 이름을 밝히지 않는군요. 아니면 그쪽의 이름을 내가 모두 외우고 있으리라 생각한 건가요?”

왜냐하면 이곳은 귀족 사회였고, 그들과 나 사이에는 까마득한 차이가 있었으니까.

“히, 힐링턴 공작 영애……. 그러니까 저희는…….”

“그래요, 힐링턴. 내가 힐링턴입니다.”

“으.”

“대체 언제부터 당신들이 힐링턴 공작가를 무시할 수 있었는지 신기하네요.”

흐음, 하고 나는 턱을 매만졌다.

가장 먼저 말을 꺼냈던 영애를 바라보며 눈을 휘었다.

지금은 아마 웃었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이런, 벨텐 지방의 석유가 채굴되고 있다는 것을 들었는데 그것을 믿는 건가요?”

그리고 바로 뒤에 동조했던 영애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아니면 레덴 백작령의 교역 건을 믿고 이런 식의 무례를 저지르는 건가요? 영애들은 세상을 너무 모르는군요……. 가엾을 정도로.”

그녀들은 내 말이 이어질수록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그게 자신들 가문에서 비밀리에 진행되는 일들이기 때문이리라.

“힐링턴의 권력을 업은 나도 이렇게 모든 준비를 갖추고 상대를 대하는데.”

사실 나서면 되는 것이었는데, 그런 행동조차도 가문에 누가 되거나 혹은 오만하고 못된 사람으로 비출까 봐 침묵했었다.

“당신들은 무슨 배짱으로 날 공격한 것인지, 정말 궁금했어요.”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

“저, 저희는.”

“그러니까, 저희는 영애가 아니라 친구의 이야기를…….”

비겁하기까지.

차라리 솔직히 인정하고 사과를 했다면 좋았을 텐데.

나는 입술을 비틀었다.

아마도 이것은 비웃음으로 충분히 보였으리라.

“영애들.”

“흐, 으!”

그러니까 저렇게 졸도할 것 같은 얼굴을 해 보이는 것이겠지?

나는 가브리엘이 싸늘하게 목소리를 내리깔 때의 분위기를 떠올리려 애쓰며 고개를 살짝 숙여 그녀들에게만 들리게 속삭였다.

“잘 들어요. 다음부터 이딴 식으로 내 욕을 할 거면.”

마주친 눈이 공포로 흔들리는 것을 똑똑히 보면서.

“당신들의 소중한 것 하나쯤은 잃을 각오를 하는 게 좋을 거예요. 알겠어요? 말은 함부로 떠드는 게 아니랍니다.”

다음엔 이대로 안 넘어갈 테니까.

흡, 하고 숨이 넘어가는 소리들을 들으니 조금은 속이 시원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을 때.

어쩐지 멍한 표정의 가브리엘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서 있었다.

“……?”

뭐야, 왜 저런 표정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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