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132화 (132/155)

132화. 나는 힐링턴입니다 (3)

하, 정말 어떡한다.

가브리엘은 치열하게 생각했다.

잊지 않게 되새기고 떠올렸다.

이곳이 황녀가 연 연회장이라는 것을, 이 자리에 힐데아와 자신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당장.’

그렇지 않으면 저 멀뚱한 얼굴을 부드럽게 끌어당겨, 오물거리는 입술 위로 깊게 입맞춤할 것 같았다.

‘지금이라도 당장.’

그게 아니라면 그가 선물한 반짝이는 목걸이를 걸고 있는 목덜미에 얼굴을 묻을지도 몰랐다.

품에 넣고 누구에게도 상처받지 않게 지킨다고?

하, 정말 웃기는 말이었다.

그러지 않는다고 해놓고 또 보고 싶은 것만 보았던 모양이었다.

눈앞에 있는 힐데아를 또 멋대로 상상하고 재단한 모양이었다.

‘나는 정말 구제불능이군.’

뭘 상상했지?

영애들의 험담에 어둑한 얼굴이 되는 그녀를 떠올렸나?

부끄러운 마음이 올라왔다.

‘저렇게 당당하고.’

멋진 사람인데.

험담을 일삼던 여자들에게 향하던 차갑게 내리뜬 눈은 긴장한 채 누군가를 바라볼 때와는 달랐다.

살기를 퍼뜨리지도, 손에 피를 묻혀본 적 없는 힐데아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얼마나 위엄이 넘치는지.

‘힐, 왜 자꾸 반하게 만듭니까.’

그 여자들이 어떤 표정으로 도망갔는지 생각하면 웃음까지 나왔다.

‘여기서 더 어떻게 좋아하라고.’

그는 웃었다.

당신을 당장 끌어안고 싶어.

튀어나오려는 진한 진심을 꾸역꾸역 눌러 삼키며.

그녀가 제 적나라한 욕심에 깜짝 놀라 도망가버리면 어찌하나.

“너무 늠름하셔서.”

“네?”

“그렇게 씩씩하신데 로제리엘 영애가 대체 왜 걱정했는지 모를 정도입니다.”

“으, 으음. 늠름……했어요?”

힐끗 올려다보는 시선에 그것 보라는 듯 의기양양한 빛이 비쳐 그것조차 사랑스럽고 귀여웠다.

힐데아는 눈을 깜빡이다가 진정한 듯 차분히 말했다.

“로제는.”

“네.”

그는 힐데아의 속눈썹을 바라보고 있었다.

작은 보석들을 올려놓아도 떨어지지 않을 것 같은 그 풍성한 속눈썹과 그 아래 짙게 내려앉는 그늘을.

손으로 그녀의 눈가를 쓸면 아찔하게 간지럽힐 것 같았다.

“대놓고 갈등을 일으킨 적이 없었어요. 가문에 누가 된다고 생각했었으니까요. 침묵하거나, 눈을 감거나. 로제는 그걸 걱정했을 거예요.”

“……그건 힐링턴의 사람들이 들으면 불을 뿜을 이야기로군요.”

“네, 이제 알아요.”

그러면서 힐데아는 웃었다.

그녀는 더는 울지 않는다.

흔들리지 않을 강한 영혼의 미소였다.

‘보지 마.’

가브리엘은 이 사랑스러운 모습을 한순간도 다른 놈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며, 주변에 기세를 퍼뜨렸다.

‘아무도 보지 마.’

얼빠진 눈으로 힐데아를 바라보는 것들이 하나도 없도록.

로제리엘이 질투와 집착 좀 작작 하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지만, 알게 뭔가.

이 사람이 너무 반짝거리니까.

이렇게 초조하고, 질투 나는데.

가브리엘은 그에게만 보이는 것들을 흡족하게 눈에 담았다.

아무도 모를 것이다.

손을 잡으면 더욱 붉게 물드는 힐데아의 귓바퀴라든가, 시선을 마주치면 살짝 찡그리는 눈썹이라든가.

맞잡은 손을 통해 전해지는 맥박의 속도가 빨라지는 순간의 달콤함 따위 그 누구도 알게 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건 그만 아는 그의 것이었다.

그때였다.

“저, 가브리엘?”

“네, 힐.”

“잠깐 귀 좀.”

“지금 말입니까?”

“네, 얼른요.”

주변의 시선이 조금 물러난 것을 본 힐데아가 까치발을 하며 다가왔다.

“왜 그러십니까? 무슨 일이라도.”

“저어, 그게 아까부터 생각한 건데요…….”

살짝 고개를 숙이자, 향긋한 숨결이 닿았다.

‘아, 젠장.’

가브리엘은 이를 꽉 깨물었다.

‘미치겠군.’

어느 순간부터 자신을 완전히 믿어버린 힐데아는 거리낌 없이 거리를 좁혀올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그는 심장이 덜컹 떨어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대체 자신의 무엇을 믿고.

아니, 그 신뢰가 더없이 달콤하고 기쁘지만…… 참 복잡한 기분이었다.

“오늘 굉장히, 멋져요.”

“……예?”

작게 속삭인 그 말이 너무 달아 눈 뜨고 꿈을 꾸나 했다.

두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니 수줍게 웃고 있는 힐데아가 보였다.

‘아.’

사르르 휘어지는 눈매는 확실히 평소보다도 더욱 선명하고 아름다워서, 가브리엘은 덜컥 겁이 들었다. 짜증도 났다.

빌어먹을, 저 황홀한 미소를 이곳에 있는 개나 소나 죄다 보았기 때문이다.

‘내게 지어준 미소인데.’

그러니 저 미소는 그의 것인데.

그러나 참으로 우스운 것은.

“그래서 다들 당신만 보고 있는 것 같고……. 그게 좀.”

힐데아의 조곤조곤한 속삭임에 치솟았던 짜증과 분노도 게 눈 감추듯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목덜미를 옥죄는 목줄이 그녀의 손에 묶여 있는 것처럼.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힐데아가 꼭 변명하듯 말을 내뱉은 것은 그 순간이었다.

“그, 그러니까 질투했다는 건 아니고요.”

질투면 좋을 텐데.

“워, 원래부터 가브리엘이 잘생겼다고 생각했지만, 오늘따라 유독…….”

“제가 잘생겼습니까?”

“어, 네? 뭐라고요?”

“잘생겼다고. 지금, 제게.”

웃음이 나왔다.

당신은 왜 이렇게 사랑스럽지?

물론 가브리엘은 제 외모가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힐데아의 눈에도 그렇게 보이는 것인지에 대한 확답을 듣고 싶었다.

제 눈에 힐데아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석이나 진주보다도 황홀해 보이는 것처럼, 그녀에게도 자신이 특별하게 보이는지.

그 달콤한 말을 꾹 닫힌 그녀의 입술 사이로 꺼내어 욕심껏 제 귀에 담고 싶었다.

“말해주세요, 힐. 제가 당신의 눈에도 잘생겼습니까?”

갈증이 났다.

조급증이 났다.

재촉하듯 묻자 힐데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이상해. 그, 그런 걸 보통 직접 물어요……?”

“네. 묻습니다.”

아닌 것 같은데.

“듣고 싶으니까 몇 번이고 물을 수 있습니다.”

“들, 들었잖아요.”

불신 가득한 표정으로 속삭이는 모습에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가브리엘은 뻔뻔해지기로 했다.

시선 속에 열기가 절절하게 담겼다.

아, 힐데아. 당신이 너무 좋습니다. 정말 너무 좋습니다.

“그래도 또. 한 번만 더 말씀해주세요.”

“그, 네? 네?”

그녀가 당황하는 것을 알면서도 가브리엘은 거리를 좁혔다.

“당신께 또 듣고 싶습니다.”

“……왜요? 그런 소리 많이 들었을 텐데.”

아직도 모르는구나.

다른 인간들이 제게 하는 칭찬 따위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

그녀가 하는 말이기에 이렇게 기쁜 것이었다.

이런 때를 보면 자신은 참으로 몹쓸 놈이었다.

“힐데아. 너무 좋습니다.”

힐데아가 그로 인해 당황할 때는 참, 행복했으니까.

“한 번도 제 외모에 대해 칭찬을 해 주신 적 없었는데.”

“제가요? 아닐 텐데요…….”

“그럼 언제나 저를 그렇게 봐주고 계셨습니까?”

“아니, 그건 제가 아니라도 다들…….”

“다들?”

“잠깐만. 가브리엘, 지금 일부러 그러는 거죠?”

저런 표정과 반응들도 오로지 제게만 허락된 것이라는 생각에 끔찍할 정도로 행복했으니까.

사과처럼 붉어진 얼굴을 보며 가브리엘은 배부른 짐승처럼 웃었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두 팔 속에 힐데아를 가두고 제 이름을 열 번은 불러달라 청하고 싶었다.

“이렇게 좋을 줄 알았다면, 다음에는 더 예쁘게 꾸미고 나와야겠습니다.”

그렇게 당신의 시선을 잡아끌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어.

* * *

아, 괜히 말했나 봐.

가브리엘을 연신 살펴보는 영애들의 시선을 봤던 것이 문제였다.

평소라면 당연히 그럴 만하지 라고 생각하며 넘겼을 그 시선이 대체 왜 이렇게 따끔따끔하게 느껴졌을까.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옷자락을 잡고, 나를 바라보게 하고, 그리고 고개를 숙이게 했다.

그리고 잘생겼다고, 그 말속에 담은 질투를 가브리엘이 알아챌지도 모르는데.

‘꼭 투정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솔직하게 누군가에게 요청하고, 내 기분이 이랬다고 투덜거리고.

내겐 그 모든 과정이 참으로 낯설었다.

그런데 참 좋았다.

부끄럽고 수치스럽긴 했지만, 가브리엘의 뚜렷한 시선은 내게만 향해 있었으니까.

내가 이렇게 욕심이 많은 사람인 줄 몰랐다.

정말로.

‘아직 제대로 고백도 못 했으면서.’

그때 가브리엘이 내게 다시 고개를 숙였다.

“당신도 잘 어울리십니다.”

아, 귓가에 스치는 숨결에 등골이 짜르르 울렸다.

“아름다워서 눈이 멀 것 같…….”

“잠깐!”

이어지는 말이 뭔지 알 것 같아 그의 옷자락을 확 잡아당겼다.

웃음소리가 정수리를 스쳐지나갔다.

“그, 그만해요. 맞네, 나 놀리는 거잖아요.”

“진심입니다. 정말로 너무 아름다워서 당신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미쳤나 봐, 정말.

내가 팔을 탁탁 때리자, 그의 웃음이 한층 더 진해졌다.

“이런 말들에 약하시군요.”

당연하지. 그런 말에 익숙한 사람이 어디 있어!

“그럼 더 하고 싶은데.”

뭐?

“이렇게.”

그의 손가락이 내 흐트러진 옆 머리카락을 슬쩍 건드렸다.

툭 하고 치는 그 손길이 왜 이렇게 간지러웠는지 모르겠다.

“제 말에 이렇게 눈가가 빨갛게 달아오르시면.”

입술을 꽉 깨무는데, 그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더 놀리고 싶어지는데.”

그 순간 정신이 퍼뜩 들었다.

‘여긴 우리 집이 아닌데.’

보지 않는 척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시선들이 있다는 것이 찬물을 끼얹은 듯 떠올랐기 때문이다.

주춤 나도 모르게 그에게서 몇 걸음 멀어졌다.

어떡해.

여기가 어딘지도 잊고 가브리엘에게만 몰두하고 있었구나, 내가.

맙소사…….

그때였다.

“그건 안 됩니다.”

몸이 휙 잡아당겨졌다.

가브리엘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내 손을 잡고 살짝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어?’

멀어졌던 거리가 순식간에 닿을 듯 가까워졌다. 그가 코앞에 있었다. 지그시 담는 눈이 너무 뜨거웠다.

“한 걸음도 멀어지지 마세요.”

아, 안 돼.

“그건 못 참아.”

시선을 돌릴 수가 없어.

그렇게 멍하니 생각하는 때였다.

끼이익-

연회장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초대 받지 않은 자가 등장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