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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133화 (133/155)

133화. 저는 전하께 마음이 없습니다 (1)

황태자 벤자민.

그가 초대받지 않은 자, 연회장의 문을 열고 들어온 자였다.

나는 이 연회의 주최자인 황녀를 살핀 뒤 그녀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며 황녀도 모르고 있던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황태자는 아무도 모르게 갑자기 도착한 것이다.

고개를 돌려보니 가브리엘의 얼굴 역시 황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브리엘?”

“네, 보고 있습니다.”

“황태자 말이에요. 꼭 이곳으로 바로 온 것 같죠.”

“네. 예상한 시일보다 며칠이나 앞당겨서 도착했군요. 그만큼 황태자가 연회장에서 급히 확인할 것이 있었나 봅니다. 이를테면…….”

“수도에 갑자기 등장한 힐데아 폰 힐링턴 영애의 모습 같은 것 말이죠.”

나는 가브리엘의 옷자락을 한번 강하게 쥐었다가 놓으며, 일단 가브리엘과의 거리를 벌렸다.

귀족들도 혼란한 기색이었다.

이쪽으로 다가오려던 황녀가 발걸음을 멈추는 것이 보였다.

문을 연 황태자는 주변을 한번 쓱 훑으며 누군가를 찾고 있었는데, 그 시선이 내게로 닿았을 때 똑바로 멈추었기 때문이다.

“…….”

“…….”

황태자와 내 시선이 마주쳤다.

보는 순간 알았다.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목표는 나였구나. 내게 알아보고 싶은 것이 있었겠지.

황태자는 내가 치료사 힐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눈치였다.

문제는 증거. 증거였다.

‘그래도 내가 먼저 도착했으니 그 부분은 괜찮을 거야. 증거나 증인을 붙잡아 오지만 않았더라면. 그 부분은 로제와 가브리엘, 그리고 크라이스가 막았으니까.’

머리가 복잡했다. 그리고 무표정한 황태자의 얼굴을 보며 새삼스럽게 놀랍기도 했다.

‘정말 많이 변했잖아.’

연회장에 나서기 전, 로제가 그랬다.

‘언니, 황태자를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때는 무슨 말인지 정확히 이해가 안 갔었는데,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내가 루다나 마을에서 웃을 줄 아는 사람으로 변했던 것처럼, 황태자에게도 성격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만한 사건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나를 많이 찾았었다고 들었는데, 그것도 황후의 명령이었던 걸까?’

냉정한 얼굴.

눈 밑에 진 짙은 그림자.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은 까칠하고 피폐해 보이기까지 했다.

내 기억 속의 황태자는 수줍음 많은, 지나치게 어려 보이는 외모의 청년이었을 뿐이라 기분이 꽤 이상했다.

아주 잠시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초조해졌다.

‘언제 움직일 셈이지? 이쪽이 먼저 인사하러 오길 바라는 건가?’

이 기묘한 대치에 주변에 있던 귀족들 사이로 싸한 침묵이 감돌았다.

잔뜩 헝클어진 머리카락이나 약간의 먼지마저 묻어 있는 옷차림은 누가 봐도 연회장에 참석하는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이대로 들어오는지, 아니면 다시 밖으로 나가는지를 가늠하지 못해 나를 포함해 모든 귀족이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황태자가 입을 열었고.

“여기에.”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나 찾을 수 없던 분이.”

정확히, 나를 향해서.

“계셨네요.”

뚜벅. 뚜벅.

거침없이 걸어들어온 벤자민이 나와 가브리엘의 앞에 섰다.

“힐데아 영애.”

시선이 팽팽하게 부딪혔다.

나는 잠시 내가 먼저 인사를 해야 하는 입장이라는 것까지 잊을 정도였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치맛자락을 잡고 인사를 했다.

“제국의 영광스러운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태자 전하.”

“…….”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바로 인사가 들려오지 않았다.

살짝 고개를 들어 올리자, 황태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내 옆에 누가 있는지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나만 응시하고 있었다.

오로지 나만 보인다는 것처럼.

식은땀이 관자놀이를 타고 한 방울 흘러내렸다.

설마.

황태자가 이 자리에서 바로 치료사 힐에 대한 의문을 터뜨릴 생각일까?

심장이 쿵쿵 뛰었다.

* * *

힐데아 폰 힐링턴은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물론 그녀의 어둑한 표정과 냉정하기만 한 태도 때문에 호감을 이끌어 내는 것에는 실패할 순 있었겠으나, 벤자민은 그녀가 항상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감히 홀로 즐거워했다.

저렇게 빛나는 사람을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였는데도, 자신은 알아봤다는 것에.

그렇기에 축복받지 못하는 축언과 이능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어떤 것도 물려받지 못한 자신과 뜻이 통하리라 생각했다.

그것이 첫 번째 느낀 동질감.

이후로 뒤따른 짜릿한 흥미.

계속 품어왔던 동질감은 결국 호감이 되었고, 축언과 이능 따위 없는 황태자인 자신에게도 태도 하나 변하지 않는 힐데아를 보며 감동한 나머지 구애를 하려고 했다.

그녀가 사라지기 전까지는.

‘어째서?’

겉으로 티가 날 정도로 벤자민은 힐데아에게 호감을 표하고 있었다.

왕래도 초청도 별로 없었던 황태자인 자신이 직접 힐링턴 가문에 편지를 쓰고, 초대장을 보냈을 정도로.

연회 내내 그가 환히 웃으며 다가가 말을 건 것은 힐데아 폰 힐링턴뿐이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모를 수가 없을 터인데…….

이가 갈렸다.

왜 하필 벨키우스의 옆이지?

왜 최고 신관 크라이스였지?

왜, 왜 내가 아니었지?

‘도망을 칠 것이었다면 내게 왔어도 됐잖아.’

힐데아의 부탁이라면 어머니의 명령도 무시하고 얼마든지 도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보고 싶은 것은 이런 풍경이 아니었다.

가브리엘 폰 벨키우스의 손을 잡고, 아무렇지 않은 척 연회장에 서 있는 지금이 아니라!

힐데아가 닿지도 않는 곳으로 훨훨 사라져 기이한 의심만 품은 채 이곳으로 달려와야 했던 제게 이렇게 비참함을 줄 것이 아니라!

‘내가 찾은, 그래서 나를 찾는 당신이었는데.’

벤자민은 마지막 염원을 담아 연회장에서 환히 빛나고 있는 힐데아에게 시선을 던졌다.

아니다. 지금이라도 괜찮았다.

벨키우스의 손을 놓고, 제게 걸어온다면.

‘날 불러요.’

당신이 사라졌던 동안 황태자인 자신이 모든 것을 다 내버린 채 얼마나 간절히 찾았었는지를 듣고, 그것에 감동받아 다가와 주기만 한다면.

‘지금이라도 내게 웃어.’

다 잊을 수 있었다.

‘그러면 모든 섭섭함을 잊고 당신과 함께할 수 있을 거예요.’

이 마음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치료사 힐과 관련된 힐데아의 비밀도 그대로 삼킬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약점이라 생각되는 것을 쥐고 비겁하게 뒤흔들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발.

그러나 그가 다가서는 동안 힐데아는 흔들림도 없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오히려 싱긋 웃기까지 했다.

‘왜? 어떻게 웃지?’

그 낯선 미소에 벤자민은 크게 충격을 받았다.

몰래 새어 나온 미소도 아니고,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 자리였다.

그런데 힐데아가 웃었다.

그, 힐데아가 어떻게?

그러나 흔들리던 벤자민을 더욱 나락으로 떨어뜨려 놓은 것은 바로 가까이에 다가섰을 때 보인 휘황찬란한 무언가였다.

‘저건.’

이가 악물렸다.

저것을 잊을 리가.

힐데아의 목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화려한 목걸이는 분명 가브리엘이 힐링턴 자매에게 선물했던 목걸이였다.

‘그 목걸이를 왜 당신이 하고 있어.’

벤자민은 다시 한번 차분히 힐데아 폰 힐링턴을 바라봤다.

귀족 영애다운 우아한 자세와 행동거지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같은 얼굴인데도 불구하고 느낌이 달랐다.

흔들리지 않는 단단함이 있었다.

시선을 돌리자 의기양양한 표정의 벨키우스 공작 또한 함께 보였다.

‘결국 나를 피해 도망친 곳이.’

분명 치료사 힐은 힐데아 폰 힐링턴이다.

‘저 남자였던 건가요?’

최고 신관에 관련하여 의심을 하고 있던 벤자민이었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것.

모든 직감이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그녀가 자신을 피해 도망친 곳이 결국 벨키우스의 손이었다는 것이 허탈했고, 허망했고, 눈앞이 새까맣게 변할 정도의 질투가 났다.

‘왜 내가 아니라 저 인간이지.’

축언과 이능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힐데아 영애. 내가 당신을 바꿔주고 싶었는데…….’

참을 수 없었다.

모멸감에 심장이 짓이겨지는 기분이었다.

황태자로서의 오만함도 부리지 않고 조용히 살아왔던 그였다.

힐데아는 그런 그가 처음 욕심낸 것이었다.

저와 같아야 하는 힐데아가 찬란한 축언과 이능을 지닌 이라는 것도 믿을 수가 없었다.

제가 없는 시간 동안 바뀌어버린 힐데아를 용납할 수 없었다.

왜 혼자 빛나고 있죠?

나를 버리고.

‘왜 변했어요. 힐데아 영애.’

참을 수 없는 배신감.

홀로 남은 외로움.

‘왜. 당신은 그러면 안 되잖아. 내게 손을 내밀었으면서.’

더 찬찬히, 그리고 더 시간을 들여 내뱉으려 했던 말을 꺼내게 된 것은 그것 때문이었다.

“힐데아 폰 힐링턴 영애. 당신을 무척이나 간절히 찾았습니다.”

힐데아의 시선이 흔들렸다.

그가 내뱉으려는 말을 짐작한 것이 분명했다.

치료사 힐, 힐데아 영애의 약점.

“전하, 걱정을 끼쳐드린 모양이군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건강상의 이유로 요양을…….”

“아니.”

그런 되지도 않는 거짓말을 듣고 싶었던 것이 아니야.

“나는 영애, 당신을 정말 미친 사람처럼 찾았습니다.”

“……전하?”

“그러니 그런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반칙이에요.”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몰랐다고? 정말 몰랐어요, 영애? 내가 당신을 어떻게 보는지 정말 몰랐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요? 그건 기만이야.”

“……전하?”

벤자민은 속으로 이를 갈며, 손을 뻗었다.

잡혀. 내 손에 잡혀 줘요, 영애.

저자가 아니라 나였잖아.

하지만 벤자민의 손이 닿기도 전에 곁에 경직된 표정으로 서 있던 벨키우스 공작이 그녀의 팔을 잡고 가볍게 당겼다.

거리가 멀어진다.

멀어지지 마.

나 말고 저 인간을 선택하지 마.

당신은 그래서는 안 돼.

더는, 정말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벤자민은 모두가 보고 있다는 것도 잊고 고백했다.

“내가 당신을 미친 듯이 찾은 이유는 단 하나예요.”

벤자민은 똑바로 자신을 바라보는 힐데아 폰 힐링턴의 시선에 짙은 만족감을 느끼며 얼굴을 비틀었다.

“제국의 황태자인 나, 벤자민이 힐링턴의 영애인 당신을 좋아하니까요.”

힐데아, 당신의 약점을 알고 있는 날 이대로 거절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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