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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134화 (134/155)

134화. 저는 전하께 마음이 없습니다 (2)

‘누가 누굴 좋아해?’

처음에는 잘못 들었나 싶었다.

하지만 옆에 있는 가브리엘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꼈을 때, 내가 들은 말이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가브리엘의 옷자락부터 잡았다.

그가 당장 튀어 나가 내 앞을 가리지 않도록.

‘안 돼요.’

황태자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나만큼이나 놀란 주변의 경악한 표정이 똑똑히 보였다. 웅성거리는 소리들까지도.

“지금 황태자 전하께서…….”

“힐링턴과 벨키우스 사이에 황궁까지 끼게 되는 건가요?”

“하지만 분위기가 어째 좀.”

시선을 돌려 황태자의 눈을 보았을 때 찬물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비틀린 시선, 짙은 눈빛.

저 눈빛의 어디가 고백을 하는 사람의 시선일까.

그 눈이 내게 경고하는 것 같았다. 당신이 어디에 있었는지 나는 알고 있다고.

이를 악물며 앞으로 나섰다.

나를 붙잡으려던 것처럼 손을 뻗었던 황태자 벤자민이 똑똑히 보였다.

“전하, 제가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 같습니다.”

“아니, 영애는 정확히 들었어요.”

물론 그와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

황후와 내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을 생각했을 때, 살갑게 웃으며 대화를 하고 나를 초대했던 황태자의 행동은 확실히 이상한 것이었다.

하지만 날 좋아한다고?

‘이렇게 갑자기?’

내게 좋아한다는 고백은 어렵고 조심스러운 것이었다.

이렇게 마음을 확신한 지금도 가브리엘과 나는 서로에게 가볍게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황태자가 나를?

우리가 대체 무엇을 했다고?

둘이 함께 있는 시간이 몇 번이라도 되기나 했을까?

이렇게 모두가 보고 있는 앞에서, 내게 대한 배려 하나 느껴지지 않는데?

“내가 당신을 좋아해요, 영애. 그리고 당신은……. 내가 당신의 어디까지 쫓았었는지 알고 있을 겁니다.”

“…….”

“분명히 알 거예요. 그러니 대답하기 전에 고려해줘요. 난 정말……. 당신을 간절히 찾았어요.”

속삭이는 목소리였지만 그건 분명한 협박이었다.

얼굴이 일그러졌다.

시선이 닿을 때마다 오싹했다.

차라리, 그래 차라리.

‘예전처럼 말했다면.’

황태자가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고백을 했다면 감동했을지도 몰랐다.

미안하게 생각했을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나를 좋게 봐주어 고마웠을 것이다.

다정했던 영주님이 그러했듯이, 그에게 거절을 말할 때 마음이 찌르르 아팠듯이.

하지만.

저게 사랑이라고?

좋아하는 감정이라고?

황태자는 여전히 그 차가운 시선으로 내게 으르렁거리듯이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나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지 말아요, 영애.”

나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지 말라는 그 말이 얼마나 비겁하고 영악한 말인지 황태자는 알고 있는 것일까?

어쩐지 미소가 지어졌다.

내 표정의 변화를 보며 말이 통했다고 생각했는지 반색하는 벤자민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속이 뜨거워졌다.

친절했던 황태자와 있었던 좋은 기억들마저 흙탕물이 튀는 기분이었다.

‘웃기지 마.’

치료사 힐이라는 약점을 붙잡고 위협적인 태도로 으르렁거리는 저 시선이 정말 나를 좋아하는 사람의 고백이라고?

지금 저 시선 또한 내가 아니라 가브리엘에 대한 질투와 분노로 번뜩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은 오로지 내 착각이란 말인가?

‘나를 얼마나 쉽게 봤으면.’

어쩐지 헛웃음이 나왔다.

‘얼마나 하찮은 대상으로 봤으면.’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황태자가 갖고 싶다고 말하면 가질 수 있는 소유물이 아니었다. 절대.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하염없는 영광일 것입니다, 전하.”

나는 부드러운 웃음을 가면으로 내걸었다.

“그러면 영애, 나를…….”

“하지만.”

다가서려는 벤자민의 손을 피해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힐데아 영애, 지금 설마, 나를.”

황태자의 얼굴이 굳어지고, 주변의 숨을 들이켜는 소리도 들렸다.

나는 몇 걸음 물러나게 했던 가브리엘의 옆으로 나란히 섰다.

“네, 전하.”

그리고 허리를 똑바로 펴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죄송합니다만, 감정이란 본디 서로 오고 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그렇지 않군요.”

말하고 싶으면 해.

“영애, 내가 아까 한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것 같…….”

“압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아니라고 주장하면 그만이고, 증거를 가지고 온다고 하더라도 치료사 힐이라는 것을 굳이 숨겨가며 부정할 생각 없었다.

황궁이 공격한다면 부딪힐 생각이고, 축언 도둑과 관련하여 옭아맨다면 오히려 이쪽이 더 공격적으로 나설 생각이었다.

‘평범한 평민 치료사라고 생각했을 때와 그 치료사가 사실은 공작가의 첫째 영애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땐 태도가 다를 수밖에 없지.’

그렇지 않은가.

내가 죄인이 아니고, 떳떳한데.

고개를 치켜들고 말할 것이다.

내가 당신들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데, 앞으로 어떻게 할 건가요?

나는 눈에 힘을 주며 또박또박, 황태자가 똑바로 듣도록 명확히 말했다.

“저는 전하께 마음이 없습니다.”

“…….”

“그러니 전하께서 하신 고백은 거절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 * *

라피이아는 입술이 들썩이는 것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저렇게 거절하다니!’

정말, 정말 미친 것인가 싶을 정도로 대단한 여자였다!

게다가 허망한 황태자의 꼴은 웃음이 나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그래, 그렇지.

자기가 고백하면 반드시 상대가 응해야 한다는 그 오만한 성질머리가 뻥 차이는 것을 보니 얼마나 속이 상쾌한지!

거기다 마무리까지 완벽했다.

‘그럼, 전하. 오늘의 대화는 무척 즐거웠습니다. 시간이 늦었으니 저희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평안하시기를.’

힐데아 폰 힐링턴은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예법으로 작별 인사를 한 뒤, 제 파트너의 팔짱을 끼고 연회장에서 우아하게 퇴장했다.

총총걸음으로 멀어져가는 그 뒷모습을 아무도 말리지 못했고, 심지어 같이 팔짱 끼고 걸어 나간 벨키우스 공작조차 얼빠진 표정이었다.

그리고 남게 된 황태자?

그는 드디어 제 모양새가 어떤지 깨달았는지 주변도 살피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곧장 모멸감에 얼굴이 시뻘겋게 변해서는 뛰쳐나가는 꼴이라니.

아, 어떡하지?

‘너무 웃기잖아?’

라피이아는 입술을 축이던 와인 잔을 팽개치다시피 던져버리면서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힐데아 폰 힐링턴!

아주, 아주 마음에 들어!

“하하, 하하하!”

결국 웃음을 터트리자 곁에서 부채질을 하며 눈치를 보던 여인들이 안절부절못했다.

“화, 황녀 전하. 오늘의 일이 분명 황후께 들어갈 것이온데.”

“푸, 푸하, 하하! 하……. 뭐?”

와락 웃음을 터뜨렸던 라피이아는 순식간에 정색했다.

그리고 말을 꺼낸 자를 노려보았다.

“그건 무슨 뜻이지. 그대는 설마 내가 지금 황후 폐하의 분노를 살까 봐 몸을 사려야 한다 그런 소리를 지껄이려는 건가요?”

“저, 전하!”

“내가 왜?”

“이, 이 미친 입이 실수를……. 요, 용서해주시어요, 전하.”

“쯧.”

서슬 퍼렇게 노려보니 입을 딱 다무는 모습이 참으로 맥없고 재미도 없었다.

심드렁하게 변한 눈빛이 연회장의 지루한 인간들을 훑었다.

이제 파할 시간이었고, 건질 것은 건졌다.

‘아버지의 뜻과는 다르지만.’

황녀, 라피이아의 입술 위로 진득한 미소가 떠올랐다.

직접 보니 더더욱 확실해졌다.

잡아야 할 패가 무엇인지.

그리고 앞으로.

‘드디어 결정을 했어.’

해야 할 선택조차.

“연회는 끝내도록 하죠. 그리고 믿을 만한 사람을 좀 알아와요.”

“그, 그런 사람은 왜 부르시는지 여쭈어도 될까요?”

뭐긴 뭐야.

라피이아는 씩 웃었다.

“누구한테 만나자는 편지를 좀 보내야겠어.”

아쉬운 사람이 움직여야 하는 법.

이제 그녀 또한 움직일 때였다.

* * *

소중했던 감정이 짓밟혔다.

생각할 가치도 없다는 듯 차분한 말투로 날리는 비수를 믿을 수가 없었다.

왜 힐데아도 나를 그렇게 보는 거지? 아무런 필요도, 가치도 없다는 듯이!

모든 사람들이 축언과 이능을 타고나지 못한 황태자를 바라볼 때처럼!

‘그렇게 당신을 찾아 헤맸는데, 그 시간에 대한 보상은 줘야 하는 거잖아.’

내 욕심은 모두 당신으로부터 기인했는데.

황위에 대한 욕심도, 벨키우스 공작보다 뛰어난 자가 되고 싶다는 열망도, 당신의 시선 한 자락을 붙들어놓고 싶어서.

벤자민은 미친 사람처럼 걸어가 화려한 문 앞에 섰다.

헛웃음도 나왔다.

그렇게 벗어나고자 했는데 결국에는 이곳밖에 갈 곳이 없구나.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우아하고 도도한 낯의 여인이 마중 나왔다.

바로 그의 어머니.

이 제국의 황후.

“아들아. 그러게, 이 어미가 뭐라 했느냐. 바로 이 어미에게 달려왔어야지, 왜 그 계집을 보러 갔다가 그 수모를 당해?”

이가 악물렸다.

“하지만 저는…….”

“변명은 필요 없다. 그 계집이 네게 해준 것이 무엇이 있더냐? 그리 위해 봤자 결국에는 벨키우스의 손을 잡았지 않더냐?”

“…….”

“축언과 이능을 지녔다고 고고하게 구는 꼴들이 우습지 않니? 응? 자. 들어오거라. 들어와 이 어미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듣도록 하렴. 모든 것은 다 너를 위한 안배라는 것을 왜 몰라.”

“…….”

“축언 따위 상관없이 고귀한 핏줄로도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그런 제국을 이 어미가 만들어주마. 네게 선물하마.”

그 사람을 정말 좋아했어요.

그래서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 사람의 약점 따위 어머니에게 고하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저도.”

먼저 버린 건 당신이야, 영애.

벤자민의 눈이 비틀렸다.

“저도, 어마마마.”

언젠가는 순수했을지 모르는 그 눈은 이미 자신만의 생각에 사로잡혀 검게 비틀려 있었다. 텅 비었다.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요. 치료사…… 힐에 대해서예요.”

쩍 갈라지는 것 같은 어미의 미소를 바라보며, 벤자민은 황후의 방으로 걸음을 움직였다.

그리고 잠시 뒤.

깔깔깔, 끝없는 웃음소리가 방 안에서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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