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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135화 (135/155)

135화. 이런 시간만 계속되면 좋을 텐데 (1)

하룻밤 사이, 사교계에 폭풍 같은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사라졌던 힐데아 폰 힐링턴의 사교계 복귀도 큰 사건이었는데, 그 힐데아가 제국의 영웅, 가브리엘과 아주 다정한 연인처럼 보이는 행동을 했다는 것이 사람들의 뒤통수를 때렸다.

그런데 거기에 더불어 황태자 벤자민이 힐링턴의 힐데아에게 고백을 했다니!

이게 큰일이 아니고 무엇이 큰일이겠는가?

힐링턴과 벨키우스의 결합이 확정되는 것인지, 아니면 그 사이에 황태자 벤자민이 끼어들게 되는지 모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를테면…….

지난 몇 년간 단둘이 담화를 나누지 않았던 황제와 힐링턴 공작이 마주하게 되었을 정도로 말이다.

“이야기는 들었소, 공작? 그대의 딸과 벨키우스 사이에 도는 이야기 말이지.”

“네, 들었습니다, 폐하. 그리하여 신을 부르신 것이 아니십니까.”

“……그대는 돌려 말하는 법이 없었지.”

“저희가 편한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세상 모두가 압니다. 용건이 있으시다면 가감 없이 말씀하시지요.”

황제와 공작 사이에 감도는 분위기가 무척이나 냉랭했다.

직접 본다면 의아하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로.

황제가 가장 총애하는 신하를 고른다면 모두가 힐링턴 공작을 뽑았을 것이었다.

만약 그 질문이 20년 전에 행해진 질문이었다면 그러했다는 것이다.

그때만 해도 힐링턴 공작은 자신의 타고난 축언과 이능을 마음껏 황궁과 젊은 황제를 위해 썼다.

기꺼이 그의 검이 되었고, 방패가 되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힐링턴 공작이 황제를 독대하는 일이 없어지고 황제 또한 힐링턴을 먼저 찾지 않았다.

그 자리는 젊은 영웅, 가브리엘 폰 벨키우스가 자연스럽게 메꾸게 되었다.

아무도 그 이유를 몰랐다.

황제도, 힐링턴 공작도 입 밖으로 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힐링턴 공작.”

황제의 음울한 표정을 보면서도 시어스 폰 힐링턴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바늘 하나 통과하지 않을 것처럼 단단했고, 어떤 면으로는 속내를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기도 했다.

“후우, 우리 사이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가 되긴 하였지. 오랜만에 독대하여 내뱉는 화제가 자녀들의 일이라는 것이 그리 유쾌하진 않군. 하지만 넘어갈 수가 없는 이야기라 말이오.”

“벨키우스와 힐링턴 사이에 폐하께서 언짢아하실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의자 손잡이를 쥔 황제의 손이 하얗게 변했다.

시어스의 눈에 가득 찬 적대심이 화살처럼 황제에게 꽂혔기 때문이다.

무례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것이었다.

지켜보고 있던 시종장이 몸을 움찔했을 정도였건만, 황제는 찔리는 것이 있는 사람처럼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한숨을 내쉰 힐링턴 공작이 음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폐하. 두 사람이 좋다고 결정했다면 저는 아무것도 막지 않을 것입니다.”

황제는 눈살을 찌푸렸다.

균열이 간다고 생각하여 좋아했더니, 어찌하여 두 가문 사이가 더 돈독해진 것이란 말인가.

힐데아 폰 힐링턴, 역시 그 애가 문제란 말인가.

“그 말은 가브리엘과 힐데아, 둘이 서로 좋다 그렇게 말했다는 것인가?”

“폐하께서 어떠한 미래를 그리고 벨키우스 공작을 이용하려 하셨는지는 모릅니다. 관심도 없습니다. 다만 제게 중요한 것은 단 한 가지.”

황제의 입술이 꽉 다물렸다.

“제 딸입니다.”

명백히 질책하는 시선이었다.

“이 자리에서 말씀드립니다, 폐하. 다른 무엇도 상관없으니 제 딸들만큼은 건드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공작.”

“제가 오랫동안 참아왔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아니요, 폐하께서는 다 알고 계셨습니다. 제가 왜 폐하께 멀어져 문을 걸어 잠그고 힐링턴을 지켰는지 모르시지 않습니다. 너무나 잘 아십니다.”

“…….”

“무엇을 지키려 하였는지도 아십니다. 그리고 폐하께서는 모든 것을 짐작하시면서도 눈을 감고, 방관하셨습니다. 이번에도 그러기로 하셨다면.”

황제는 눈을 감았다.

“적어도.”

그 차가운 목소리에 뭐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제 딸들은 건드리지 마십시오.”

“공작!”

“저는 제 딸아이의 혼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생각도 없고, 외부의 압박에 의해 그 아이가 뜻을 꺾어야 할 상황도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20년 전과 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고 여기지 마시라는 뜻입니다, 폐하.”

황제가 무어라 하지 않았는데도, 힐링턴 공작은 먼저 몸을 돌렸다.

그리고 걸어가기 전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20년 전, 제가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 범인이 누구인지 몰랐기 때문이라 여기지 마시옵소서.”

공작이 걸어 나갈 때까지도 황제는 조각처럼 굳어 있었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한숨을 내쉰 그는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마른세수를 했다.

그는 자조하듯 웃었다.

다 알고 있었다고.

다 짐작하고 있었다고?

“아주, 이것도 저것도 죄다 엉망진창이로구나.”

그러나 제일 엉망진창인 것은 제국의 안정을 위해 모든 것을 눈을 감고 모른 척했던 황제인 자신이었다.

* * *

“꺄아아앙!”

나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환호성을 지르는 시엔을 보았다.

그래, 시엔도 그렇고 주변 사람들도 그렇고 내가 생각한 것과는 퍽 다른 성격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이야.’

내 그림이 그려진 초상화. 작은 액자. 거울.

거기다 저건 뭐야, 드레스에 내 얼굴을 어떻게 인쇄한 건데? 여기 인쇄기술 없지 않아?

사방 천지가 다 내 물건이었고, 사람들에게 아주 유명하단다.

내가 제국의 황녀도 아닌데 왜 이런 것이 유행을 하고 있다는 건지 도통 이해가 안 갔다.

거기다 하루 이틀 일도 아니라고?

“보통의 평민들은 고귀한 아가씨를 쉽게 뵙거나 말을 섞을 수 없으니까…….”

“이렇게 아가씨를 흠모하는 이들이 많았던 거지요!”

내 영혼은 반쯤 가출했는데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시엔이 내게 무언가를 내밀며 제발 사인을 해달라고 하는 중이었다.

“그, 그래요. 잠깐만. 다 좋아요. 다 좋은데.”

“여기, 여기에 남겨주세요!”

“어, 여기요?”

“네!”

하하하.

나는 멍한 얼굴로 깃펜을 받아 들고 내 얼굴이 그려진 초상화 끝에 사인해주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니, 이게 아닌데?

난 얼굴을 굳혔다.

“시, 시엔. 잠깐만요. 이게 다 뭔지 제대로 설명을…….”

시엔의 눈이 번뜩였다.

“설명이 필요하신가요?”

“네?”

“후후, 제가 설명해드리지요, 아가씨. 오늘만을 기다렸답니다. 이른바 저의 컬렉션!”

광선이 나오는 줄.

“힐데아 아가씨를 흠모하는 사람들이 만든 물건들이지요! 힐링턴 영지에 떠도는 것들이 꽤 많답니다. 물론, 불법적으로 나쁜 일에 쓰이지 못하게 저희가 매의 눈으로 단속을 하고 있지만요! 잘못 걸렸다가는 뼈도 못 추리게 될 것이라는 걸 제대로 보여준 뒤부터는 그런 일이 없…….”

“아니, 아니!”

내가 알고 싶은 건 그런 게 아니고!

끝도 없이 이어지는 말을 자르자 대놓고 시무룩해지는 얼굴이 꼭 커다란 눈을 축축하게 물들인 아기 여우 같아서 움찔하고 말았다.

시엔, 아무리 그래도 이런 성격 변화는 너무 심하잖아요…….

다행히도 내 당황은 카리스마 있게 등장한 리라로 인해 끝나게 되었다.

“시엔의 말은 100에 90은 헛소리랍니다, 아가씨.”

“리, 리라?”

리라는 퍽- 하고 놀랄 만큼 과격하게 시엔의 옆구리를 찼는데, 더 놀라운 것은 공중제비를 돌며 충격을 완화시킨 채 멋지게 착지한 시엔의 모습이었다.

와아…….

나도 모르게 손뼉을 칠 뻔했다가, 방긋방긋 웃고 있는 로제의 등장에 정신이 팍 들었다.

어쩐지 로제는 굉장히 무흣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건 뒤따라 들어온 다른 고용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보셨군요, 아가씨!”

“저희의 마음을!”

“뒤에서 이런 식으로 애정 표현하고 있어서 너무 음침하고, 못났고, 바보 같고, 무서우실지도 모르지만!”

당사자 동의 없이 이러고 있었다는 것이 무섭기는 했다.

하지만 흔히 선망하는 대상의 초상화를 만들어 퍼뜨리곤 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가브리엘의 초상화를 지니고 있는 여인들이 꺅꺅 하는 장면을 꽤 많이 봤었으니까.

그런데 나도 그런 대상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에 어쩐지 얼굴에 열이 올랐다.

내 얼굴을 빤히 보며 자기들이 더 좋아 죽는 것 같은 사람들의 모습도.

“아가씨가 이렇게 사랑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맞아, 언니야. 언니 새로운 버전 떴다 하면 매출이 대박, 읍, 으읍!”

지금 로제가 이상한 말을 한 것 같은데.

“어쨌든……. 처음에는 안 좋은 소문들도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친근한 이미지가 퍼지기 시작하면서 영지 내에서 아가씨의 인기가 올라간 것도 사실이랍니다.”

리라의 조곤조곤한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내 얼굴이 새겨진 그 물건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어쩐지 전생에 아이돌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누군가가 저런 물건들을 양손에 쥐며 방방 뛰었던 것 같은데…….

‘그게 누구였지?’

아, 머리가 순간 아파와 눈앞이 흐려졌지만 곧 언제 그런 두통이 왔었냐는 듯이 말끔해졌다.

눈을 깜빡이며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로제를 바라봤다.

꼭 봐야 할 것이 있다며 시엔의 방에 따라 가보라고 하더니만, 이런 광경을 보여주려고 그랬구나.

“헤헤, 언니야, 기분이 어때?”

“뭘 묻고 그래.”

“얼굴이 빨개졌는걸!”

“……우리 로제가 이렇게 심술궂은지 몰랐네. 응?”

“아야, 아야! 언니, 잠깐만, 나 뺨 떨어져!”

“언니가 그렇게 당황하는 게 보기 좋았어? 너무 섭섭하려고 하잖니.”

이제 내 일상은 제법 달라졌다.

방 밖을 나오면 양 뺨을 붉게 물들인 힐링턴의 고용인들이 내게 앞다투어 인사를 하려고 경쟁하는 모습은 예사였다.

아빠나 로제와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면 흐뭇한 표정 그대로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질 것처럼 바라보고 있는 시선들에 깜짝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니, 대체 언제부터 저렇게들 보고 있었던 건지.

나는 또 왜 저런 노골적인 시선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것인지.

감시하고 경계한다고 생각했던 시선은 그냥, 팔불출이라서 날 지켜본 것뿐이었다.

인지한 뒤에 마주하면 얼굴이 뻘겋게 달아오르는 그런 애정.

“……이 아빠는 질투가 나는구나. 딸들이 이 아빠만 빼놓고 그렇게 재밌게 놀고 있을 줄이야.”

그리고 대체 언제 오셨는지, 문틈 사이로 빼꼼 고개를 들이밀고 축축해진 시선으로 바라보는 아빠.

문장마다 꼭 아빠라는 말을 넣고 다시 한번 불러주길 바라는 표정을 보면, 너무 부끄러워서 자꾸 헛기침이 나왔다.

‘이런 날만 계속되면 좋을 텐데.’

가족들을 보며 웃음을 참고 있을 때였다.

리라가 다가와 내 귀에 무언가를 속삭인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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