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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136화 (136/155)

136화. 이런 시간만 계속되면 좋을 텐데 (2)

“아가씨. 방문하신 손님이 계세요. 지금 응접실로 모셔놓았는데, 바로 이동하시겠어요?”

“응? 손님이라고? 지금?”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연락이 온 것은 하나도 없었는데, 대체 누구란 말일까?

나는 리라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응접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반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크라이스!”

내게 한없이 호의를 보여준 사람.

처음 봤을 때부터 이상하게 믿음이 가던 사람.

부드럽게 웃는 남자는 바로 최고 신관, 크라이스였으니까.

* * *

이제 활짝 핀 해바라기처럼, 편안히도 웃을 수 있게 되었구나.

크라이스는 자신을 보자마자 반가워하며 웃는 힐데아의 얼굴을 욕심껏 바라보았다.

“마을 사람들의 일, 정말 감사해요. 편지도 보냈었는데 아직 도착하진 않아서 답장을 못 받았지 뭐예요. 크라이스는 어디 다친 곳이나, 황태자와 얼굴 붉힐 일은 없었던 건가요?”

다급히 물어오는 목소리는 평소의 힐데아답지 않았다.

친구가 찾아와 기쁜 어린아이처럼 목소리가 무척 밝고 말이 두서없이 이어지는 모습이었다.

크라이스는 부드럽게 웃었다.

처음에 마주쳤던 힐데아를 생각해보면, 지금의 저 밝은 눈빛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변화는 내가 만든 것이 아니지.’

그렇다고 하더라도 질투가 난다거나, 속이 비틀린다는 것보다는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눈앞의 여자가 괴로워하지 않는다는 것에, 이제는 행복하다는 것에.

비록 그 시선의 끝에 있는 것이 자신이 아니라는 것은 여전히 속이 쓰리고, 일순간 괴롭고 질투심도 났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저 미소를 잃고 싶진 않으니.’

지켜주고 싶었고, 위험한데도 나서고 싶었다.

정말 우스운 일이었다.

처음부터 이용하기 위해 다가갔던 마음이 언제 이렇게 변질되었을까?

황후의 부름도 무시하고 이곳으로 바로 온 것은 황태자 벤자민의 행보와 다르지 않았다.

그는 미친 듯이 달려간 황태자보다 하루 더 늦게 제국 수도에 도착했고, 도착하자마자 힐데아와 그녀의 주변에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보고를 들었다.

예상대로였다.

비틀린 집착을 감추지 못한 벤자민이 대뜸 고백했다.

그리고 힐데아는 예의 바르지만 일말의 여지없이 단호히 거절했다.

아마 마음을 고했다면 그 역시 그렇게 거절당하지 않았을까.

재잘거리며 떠드는 힐데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크라이스는 저도 모르게 불쑥 묻고 말았다.

“힐데아. 저를 믿으십니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는 시선에는 왜 갑자기 그런 소리를 하냐는 뜻이 가득했다.

쓴웃음이 피어났다.

내가 이렇게 헌신했으니 당신도 나를 그렇게 바라봐야 한다, 그런 이기적인 마음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녀의 마음에 이성으로 바라보는 남성이 되진 못하더라도,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욕심은 있었다.

그때, 힐데아가 웃었다.

변한 가족들과 그로 인해 행복한 일상을 이야기할 때와는 다른 따뜻하고 다정한 미소였다.

“물론이에요, 크라이스.”

“어떻게 그러실 수 있습니까?”

“크라이스도 절 믿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믿는 거지요.”

그건 크라이스, 그를 향해 보내주는 미소였다.

오로지 그를 생각하며, 그를 위한.

“아닌가요?”

“……네, 힐데아. 저는 힐데아를 믿습니다. 보는 순간부터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보는 순간 첫눈에 반하기라도 한 듯 복수의 뿌리가 송두리째 흔들렸었다.

그때는 그 감정의 변화가 너무 두려워서 절대 가까이 하지 않으려고도 했었다.

하지만 정신 차리고 보니 힐데아를 적극적으로 도우며, 황후마저 속이고 있었다.

힐데아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갸우뚱 흔들었다.

그 귀여운 행동 하나하나를 눈에 담으며 그는 다정히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것을 손으로 가렸다.

제 감정이 웃음에 섞여 흘러나올까 봐 두려웠다.

정신을 놓으면 황태자 벤자민이 그러했던 것처럼 고백을 하고 있을까 봐.

당신이 좋습니다.

당신이 너무 좋아요, 힐.

당신은 내게…… 나의 신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신을 믿은 적이 없었어요.

최고 신관인데도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내 신은 오로지 당신입니다. 내 심장은 당신으로 인해 뛰고 당신으로 인해 살아가니까.

“어머, 참 이상하네요. 저도 그랬는데.”

“……그러셨습니까?”

“네. 크라이스를 볼 때부터 이 사람은 믿을 수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어요.”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아 크라이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얼마나 갈등하고 고민했는지 눈앞의 여인이 알까.

복수를 위해, 가족들을 모두 잃게 했던 자들을 위해 모든 것을 망쳐주리라 다짐하고 걸어왔다.

한순간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내 복수가 당신을 다치게 할까 봐.’

무서워졌다.

힐데아가 보내는 저 신뢰가 무너질까 봐. 그 순간을 상상하면 걷잡을 수 없이 두려워졌다.

그리고 마침내 확실히 결심했다.

기어코 끌고 온 것을 버리게 되더라도.

‘나는 당신을 해치지 못해.’

그러니 결론은 하나밖에 없었다.

“아, 크라이스. 이거요, 저와 로제가 같이 구운 쿠키인데 선물하고 싶어서 가져와봤어요. 음, 맛, 맛은 보장하지 못하지만…….”

“벨키우스 공작께서 이걸 다른 이들에게 준 것을 알면 질투하실 것 같은데 괜찮으십니까?”

“아. 음, 가브리엘은 이미 세 개나 가져갔는걸요……. 더 욕심부리면 제가 혼내줄게요.”

“그럼 감사히 받을게요, 힐.”

크라이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힐데아가 내미는 쿠키를 소중하게 받아 들었다.

* * *

“최고 신관 그 새끼…… 흠, 그자가 왔었다고 하던데, 설마 쿠키를 준 것입니까, 힐?”

살기 등등해 보이는 얼굴이 제법 무서워 보이기도 했지만, 나는 이제 더는 가브리엘의 저 나직한 목소리에 얼어붙지 않았다.

“네, 하나 선물해드렸어요.”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자, 하! 하고 어지럽다는 듯이 이마를 짚는 행동이 웃기기만 했다.

“제가 4개를 다 가져갈 걸 그랬습니다. 하필 그 자식에게 선물을…….”

“어머나, 지금 질투하시는 건가요, 벨키우스 공작 각하?”

조용히 물어보자 가브리엘의 보기 좋게 뻗은 눈썹이 씰룩였다.

“……왜 또 벨키우스 공작 각하가 된 겁니까, 힐. 가브리엘이라고 불러주셔야지요.”

“그럼 뭐라고 부를까요?”

모른 척 물으니 가브리엘의 눈이 과하게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는 정원에 있었고, 지금만큼은 지켜보는 시선이 하나 없이 단둘이었다.

‘심장이 뛰어.’

찌르르 울리는 새소리를 들으며 그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너무 빠르게 뛰어서 가브리엘한테도 들리면 어떡하지?’

나는 정신없이 그를 봤다.

그의 흐트러진 머리카락, 내게 집중한 시선, 높은 콧대, 그리고 달싹이는 붉은 입술까지.

처음 보았을 때는 지나치게 예쁜 얼굴을 한 소년이 부담스럽기만 했는데, 한번 좋아지니 그의 모든 것이 좋아지는 것을 걷잡을 수 없었다.

‘더 말해줬으면 좋겠어. 나를 보면서, 다정하게.’

특히 가브리엘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잠이 솔솔 오고, 안도가 되었다.

나직하게 울리는 음성을 더 듣고 싶어서 자꾸 놀리고 있다는 것을 눈앞의 남자는 전혀 모르는 듯했지만.

그는 습관적으로 내 손가락 끝을 잡고 꼬물거리듯이 매만지고 있었다.

그러다 반짝, 눈을 뜨며 웃었다.

아주 활짝.

“제가 어릴 적엔 브리라고 불리긴 하였었는데.”

브리. 확실히 귀여웠다.

나는 어릴 적에 그의 부모가 무뚝뚝한 작은 아기를 보며 브리라고 부르는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그때는 얼어붙은 심장을 갖고 있었을 테니까 생각만큼 활짝 웃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보고 싶다.

가브리엘의 어릴 적 화첩이 있을까? 나는 그의 청량한 웃음에 정신이 팔린 채 딴생각을 했다.

“브리라는 애칭은 확실히 지금 불리기에는 부담스럽긴 합니다. 그렇게 귀여운 애칭은 어울리지 않을 테니까요.”

어울리는데.

잘 어울릴 것 같은데.

“그러면요?”

“음, 그것보다는.”

어쩐지 우물쭈물 말끝을 흐리는 모습이 귀여워 눈을 가늘게 떴다.

예전이었다면 이런 상황에서 안절부절못하다 뛰어가 버렸을 텐데, 그는 귓불이 새빨갛게 변해 터질 것같이 되었는데도 꿋꿋하게 내 앞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아, 어떡하지.

너무 좋아.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어쩐지 알 것 같다.

우리 이대로 텔레파시까지 통하는 것 아닐까?

나는 그의 귓불처럼 점점 뺨을 타고 오르는 열기를 느끼며, 손부채질을 했다.

그리고 넌지시 물었다.

“그럼…… 제가 부르고 싶은 애칭으로 불러도 되나요?”

뭘까.

왜 갑자기 가브리엘의 눈에서 광선이 나오는 것 같지.

“……무슨 말씀을 해주시려고.”

“가, 브리엘.”

“저를 그렇게 애태우십니까.”

“그게…….”

“말해주세요.”

아까까지 청량하고 수줍음 많은 소년처럼 바라봤다면, 지금은 꼭.

‘요, 요망해.’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저질렀다.

“리엘, 리엘이라고 부르고 싶어요.”

다른 누구도, 원작의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은 가브리엘의 애칭.

내가 지었기 때문에 나만 부를 수 있는 그의 친근한 이름.

슬쩍 눈을 뜨자 녹을 듯이 웃고 있는 미소가 보여 다시 한번 넋이 나갔다.

이제 심장이 얼마나 빨리 뛰는지 가늠할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웃는 게 어딨어. 그건 반칙이라고요, 가브리엘…….

“좋습니다.”

그가 다가왔다.

“힐, 당신은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이라 모두가 그 애칭을 부르겠지만.”

바람에 헝클어졌던 내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다정히도 속삭였다.

“하지만 제 애칭은.”

그러나 그 눈에는 선명한 욕심이 가득 들어 있었다.

손에 잡힐 듯한, 그러나 그것이 불쾌하지 않은.

“어떤 새끼도 부를 수 없게 할 테니까.”

짐승이 짖는 듯 사나운 목소리는 다정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좋았다.

“불러주세요, 힐.”

눈앞의 남자가 욕심내는 것이 나라는 확실한 깨달음이 좋았다.

“당신이 지어주신 그 애칭만큼은 오로지 당신만 입에 담으셔야 합니다.”

그 이름은 당신 거예요.

그렇게 속살거리는 목소리에 진득한 만족감을 느끼는 것은 나도 욕심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가 다시 한번 우리의 약혼 이야기를 꺼낸다면, 그때는 바로 대답할 것이라고.

‘물론 그 전에, 내가 먼저 고백하는 것으로.’

나는 주먹을 살짝 쥐었다.

어떤 방식이 좋을까.

역시…….

고백한다면 역시 우리에게 익숙한 그 방식이 좋지 않을까?

웃음이 나왔다.

정말 이런 시간만 계속되면 너무 좋을 텐데.

* * *

하지만 신은 야속했고, 운명은 잔인했다.

다음 날.

축언 도둑으로 인해 사망자가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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