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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137화 (137/155)

137화. 혼란의 시작 (1)

“주군.”

생각에 잠겨 있던 가브리엘은 뒤에서 부르는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그의 부관, 디안의 얼굴이 보였다.

“예상하신 대로 축언 도둑이 다시 발생하였습니다. 역시 배후는…….”

“그래.”

가브리엘은 잠시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황제는 확실히 그의 은인이었다. 이유가 어쨌든. 그러나 그것 하나만으로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그는 이제 과오를 바로잡을 생각이었고, 그것을 위해 과거의 사건을 끄집어낼 작정이었다.

“그럼 주군, 이제 어떻게 움직이실 생각이십니까? 언제든 명하시면 준비하겠습니다.”

딱딱해진 표정이 제법 신중하여 낯설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생각 자체가 우습다고 생각했다.

“예정대로 해야지. 살피라고 한 황궁은 어떻지?”

“황후는 최고 신관과 접촉했습니다. 황태자 벤자민은 힐데아 영애에 관한 것을 황후에게 고한 듯 보입니다.”

좋아한다더니 그딴 식으로 보답을 하는군. 그게 네놈의 사랑인가?

가브리엘은 황태자 벤자민이 눈앞에 있으면 당장 찔러 죽이고 싶다는 듯 흉흉한 얼굴을 했다.

자신을 향한 살기가 아닌데도 심장이 멈출 것처럼 두려운 기운이라, 잠시 마른침을 삼켰던 디안이 말을 이어나갔다.

“어떤 움직임이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바로 축언 도둑 사건이 다시 터졌더군요. 예상대로 귀족들은 경직되었고, 황제는 치료사 힐의 마지막 남은 컬렉션들을 모두 황궁으로 사들였다고 합니다.”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금방 찾아오겠지.”

“네, 지금도 불만들은 속출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황후파만 만족스러워하는 분위기이지만…….”

조소하는 디안을 보며 가브리엘 역시 입술을 비틀었다.

황후.

끝없는 욕심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정말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모습이 지긋지긋했다.

“그래, 이 모든 것이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공교롭지. 치료사 힐을 찾던 황후와 황제, 힐이 돌아오자마자 다시 시작된 축언 도둑. 우연이 계속 반복되면 그건 우연이 아닌 원인과 결과라고 불러야 할 테고.”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평화에 익숙해진 것이.

“어디서 피 냄새가 나는 것 같지 않나, 디안?”

“네, 익숙한 피바람입니다.”

“그런데 말이다. 내가 겁쟁이가 된 것 같다.”

“……주군?”

벨키우스 공작 저택이 아닌 힐링턴 저택에 머물기로 선택하면서부터?

아니면 힐데아의 옆에 있을 수 있게 되면서부터 잠시 폭력과 살인에 멀어졌기 때문일까?

가브리엘은 유리창문 너머로 보이는 힐데아와 로제리엘을 응시했다.

“정작 힐데아는 용감하기만 한데, 나는 그녀가 다칠까 봐 무서우니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

“……강한 분이지 않습니까.”

“강한 자에겐 강하고, 약한 자에겐 한없이 약해. 그 다정한 성격이 힐데아를 다치게 할까 무섭다.”

로제리엘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축언 도둑 이야기를 듣고 어두워졌던 힐데아가 모처럼 웃는 얼굴이 무척이나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서로 꼭 닮은 자매는 무척이나 다른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평화로워 보였다.

‘힐데아.’

저 시간을 되찾기 위해 얼마나 괴로운 감정의 늪을 건너야 했는데, 다시 시끄러운 소용돌이로 힐데아를 불러들이는 주변이 퍽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당신만 행복하면 돼.’

마음 내키는 대로 다 짓밟아버리고 힐데아에게 평화만 선물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힐데아는 모를 것이다.

그녀의 은은한 웃음을 보고 있으면 너무 행복해져서, 가끔은 오랫동안 준비해온 가문의 복수 따위도 다 귀찮아지고 마는 것을.

‘처음부터 냉정하기 짝이 없는 심장이었으니까.’

벨키우스 공작가의 사람들이나, 돌아가신 부모님이 알게 되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나 가브리엘에게 정말 의미 있었던 사람은 오로지 힐데아뿐이었다.

그녀로 인해 감정을 알았고, 감정의 흐름이 시작되었다.

벨키우스 공작가 가신들의 한을, 원망을, 그들의 분노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한 것도 그 이후였다.

오로지 힐데아가 우선이었고, 부차적인 것은 그녀 뒤에 따른 것이었다는 소리다.

‘당신은 나를 사람처럼 살게 해.’

유리 너머로 마침 힐데아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그를 보며 웃었다.

천천히 더욱 밝고 환해지는 미소를 보면 가브리엘은 자신도 그녀의 미소를 따라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무슨 걱정을 하시는지는 알지만, 힐데아 영애의 곁에 저렇게 괴물 같은 사람들이 많은데 뭐가 걱정이십니까. 그리고 가장 강한 주군께서 어떻게든 지키려고 하고 계시는데요.”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부관, 디안의 시선을 의식하고 미간을 살짝 찌푸리자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리는 꼴도 우스웠다.

“그건 무슨 표정이지? 닭살이 돋는군. 치워.”

“그, 흠흠, 너무 매정하신 것 아닌가요, 주군! 주군께서 드디어 제대로 된 사랑을 하시는 것 같아 부관된 도리로 행복하여 그러는 것인데!

“그래도 치워.”

가브리엘은 힐데아에게 눈인사를 하고서 다시 가족들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테라스에서 나와 정원 밖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적이 많다.

적이 너무 많을 때는 한꺼번에 묶어서 한 번에 처리하면 그만이다.

‘어차피 다 같은 쓰레기이니.’

사납게 비틀리는 제 주군을 본 디안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는 것을 알지도 못한 채, 가브리엘은 서늘하게 비웃었다.

“그때처럼 넘어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황제 폐하. 이번에는 증거도 증인도, 그리고 앞으로 만들어낼 증거까지 넘치니까.”

힐링턴에 일어났던 비극.

벨키우스 참변에 있었던 일.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지는 이 일련의 사태들.

그것도 모자라 감히 힐데아 폰 힐링턴까지 노리는 그 욕심을 도무지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끝은 준비해뒀지만, 더 앞당기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힐데아는 너무 똑똑하다.”

디안이 잠시 제대로 들은 게 맞냐는 듯 경악스러운 표정을 했다.

그리고 수줍게 웃으며 뺨을 긁적였다.

“그, 저, 주군?”

“왜.”

“어, 물론 힐데아 영애에 대한 정이 두터우시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시도 때도 없는 팔불출은 좀……. 듣는 제가 괴로워지는 것 같…….”

“닥쳐.”

가브리엘은 주책을 떠는 디안을 확 노려본 뒤, 눈에 힘을 주었다.

나풀나풀 떠드는 입이 꾹 다물리는 것을 보고서야 만족스럽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안전하게, 위험하지 않은 것만 보여주고 싶어도 너무 빠르게 눈치를 채.”

“음, 혹시 영애께서 말하지 않아도 눈치챈 것이 있으신 건가요?”

“그래. 짐작이지만, 어쩌면…… 범인도 알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축언 도둑 사건이 다시 벌어지자마자 힐데아는 가브리엘을 찾아왔다.

‘가브리엘, 저는 그렇게까지 눈치가 없진 않아요. 당신이 내게 모든 것을 말하고 공유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앞으로의 일들에 배제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힐데아?’

‘범인은 내가 치료사 힐이라는 걸 알고 그것을 이용하려고 할 게 분명하죠.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당신과 나는 이 범인이 대충 누구와 선이 닿아 있는지 유추할 수 있어요. 그렇죠?’

‘……힐.’

‘저는 이대로 피할 생각도, 눈을 감을 생각도 없어요. 이대로 넘어간다면 평생 어딘가에서 내 가족이, 당신이, 그리고 내가 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으로 살아가야 하니까.’

힐데아는 스스로를 가리키며 다부지게 웃었다.

아주 멋진 웃음이었다.

‘짐승을 잡으려면 미끼가 필요하죠. 그러니까 가브리엘, 아니. 리엘, 날 이용해요.’

정말이지.

회상을 끝낸 가브리엘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주군?”

“디안, 앞으로 이렇게 한다.”

“예?”

“황궁에서 힐데아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접촉을 해올 것이다. 그건 황태자일 수도 있고, 어쩌면 황후가 직접 보낸 사람일 수도, 신전일 수도 있다.”

“경계를 강화하란 말씀이시군요. 그것이라면 철저하게 준비를…….”

“아니.”

“예?”

디안의 영문 모를 표정을 바라보며, 가브리엘은 천천히 이를 악물었다.

“경계를 비워. 접근할 수 있도록.”

“주, 주군, 설마?”

그가 사랑하는 사람은 너무 멋진 사람이라 앞으로 쑥쑥 걸어가는 그 뒤를 따르기에도 벅찼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어떻게든 바라보고 싶은 사람이 앞으로 나가기로 했으니, 그는 그 길을 더 쉽게 걸어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공격하는 이가 있다면 목을 베고, 함정을 파는 이가 있다면 그 함정을 짓밟으면서.

그리고 마침내 오랫동안 준비해온 올가미를 씌워 그 적을 끌어낼 마지막 준비를 시작할 때였다.

* * *

이후로 발생한 축언 도둑 사건은 모두 세 건.

모두 황제의 오래된 충신 가문에서 발생한 일로, 유능한 축언과 이능을 지닌 자들이었다.

미엘르 제국에는 얼음 같은 공포가 퍼지기 시작했고, 황제의 얼굴에는 시름이 번졌다.

귀족들은 살얼음과 같은 귀족 회의장에서 누구도 감히 먼저 의견을 내지 못했고, 힐링턴 공작가와 벨키우스 공작가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것에 대해 황제의 진노를 샀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은밀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미엘르 제국을 피로 물들이고 있는 축언 도둑 사건.

그 사건이 사실은 어떤 불길한 축언과 이능을 타고난 영애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영애의 이름은…….

* * *

“개소리! 대체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모함을 한단 말입니까?”

“당장이라도 그렇게 떠드는 자들을 잡아와 머리 가죽을 벗겨버릴 거예요!”

“리라, 시엔. 괜찮아.”

나 대신 화를 버럭 내는 리라와 시엔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목구멍까지 치민 웃음을 꾹 참았다.

주변은 모두 심각한 분위기였는데, 당신들이 걱정해줘서 기분이 좋다고 웃어버리면 안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가브리엘과 내 예상대로 제국에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단다.

축언 도둑 사건의 배후가 불길하고 재수 없는 축언을 지녔다는 힐링턴 가문의 첫째 영애와 관련이 있다는 그런 소문.

이틀 사이에 널리도 퍼진 것을 보니 범인의 능력이 참으로 출중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드디어 움직여줘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바로 그때,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던 리라가 내게 들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휴우, 소문이 퍼지자마자 아가씨께서 말씀하신 대로 바로 연락해 온 곳이 있었어요. 그리고 보내온 서신들이랍니다.”

모두 세 통의 편지였다.

나는 어둡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 서신들을 보았다. 그리고 발신인의 이름이 적힌 부분을 매만졌다.

그건 황태자. 황녀. 그리고…… 크라이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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