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혼란의 시작 (2)
자신을 믿을 수 있느냐고 묻던 크라이스의 녹색 눈동자가 떠올랐다.
그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붙잡고 싶었다.
누구 하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당시, 가장 크게 힘을 주었던 사람이 크라이스였으니까.
이 사람만은 믿을 수 있어.
어쩌면 이상할 정도로 당연하게 그를 믿었다.
그를 떠보거나 의심하면서 내뱉었던 말이 아니었다. 정말 믿었다.
“바로 확인해보시겠어요, 아가씨?”
리라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편지를 펼쳤다. 가장 먼저 펼친 것은 크라이스의 것이었다.
일상적인 대화, 별다를 필요가 없는 문장들이었다. 내가 루다나 마을에 있을 때 보내왔던 안부 편지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행이야.’
안도의 한숨을 쉬며, 다음은 골치 아픈 두 편지를 보았다.
먼저 황태자 벤자민. 내게 고백을 해왔지만, 거절한 이후로 어떠한 연락도 없었다.
황태자인 위치에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거절을 당했으니 자존심이 무척 상했을 것이다.
펼쳐보니 내용은 의외였다.
“……만나자고?”
나는 눈썹을 휙 치켜올렸다.
옆에서 기웃거리고 있던 시엔이 펄쩍 뛰며 만나지 마세요! 하고 소리쳤고, 리라 역시 얼굴을 확 찌푸렸다.
“아가씨께 거절당한 것으로 사교계에 온통 소문이 퍼졌는데, 좋은 의도로 만나자고 했을 리가 없어요.”
리라의 말이 옳다.
하지만 이건 내가 일부러 경계를 풀고 다가오길 기다리고 있는 미끼일 가능성이 컸다.
‘벤자민은 황후나 황제와 노선이 다르다고 생각했었는데, 내 착각이었던 걸까? 아니면 그날의 고백 이후 선택을 달리 한 걸까.’
이제부터 알아보면 될 일.
벤자민이 언급한 것은 날짜와 장소였다. 시간은 나더러 정하라는 것이겠지.
답장을 보내려고 깃펜을 들을 때였다.
누군가가 빠르게 뛰어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보이는 것은 다급한 얼굴의 로제였다.
“로제?”
“언니, 편지 봤어? 황녀 편지도 읽었어?”
“아니. 황태자가 보낸 편지부터 답장을 쓰려고 했지. 왜 그래?”
“어, 지금 편지 답장을 쓸 때가 아닌 것 같아. 당장 나가봐야 할 것 같거든, 언니야.”
로제가 정색한 얼굴로 말했다.
“황녀가 왔어.”
“응?”
“우리 저택에 찾아왔어! 황녀, 라피이아가!”
“……지금?”
“응. 황녀를 되돌려 보낼 순 없으니, 일단 들여보냈어. 언니를 찾아 왔대.”
설마.
나는 아직 읽지 않았던 황녀의 편지로 휙 시선을 내렸다.
설마 저게 편지가 아니라…… 방문하겠다는 통보였어?
헛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황녀라도 그렇지 정말 이렇게까지 마이페이스여도 되는 거냐고!
* * *
짜악!
화끈하게 돌아가는 소리가 무척이나 선명했다.
고개가 휙 돌아간 남자는 굴욕적이기도 하겠건만, 표정의 변화 하나 없었다.
“최고 신관. 내 아들에게 모든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대가 어찌 이럴 수가 있지?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훼방을 놓아?”
뺨을 맞은 자는 크라이스, 그리고 그의 뺨을 호되게 내리친 자는 황후였다.
황후는 얼굴이 돌아간 채 서 있는 크라이스를 뒤로하고 화가 나 기도실을 정처 없이 서성였다.
또각또각 선명한 구두 소리가 기도실 안에 울려 퍼졌다.
“황후 폐하, 많이 화가 나신 모양입니다.”
“그것을 말이라고! 그대가 모든 것을 망칠 뻔했는데!”
“아무것도 망치지 않았습니다.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황후가 신경질적으로 손톱을 물어뜯었다.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흐트러진 모습을 바라보는 크라이스의 눈은 얼음처럼 서늘했지만, 황후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오만한 여인은 아들이 드디어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왔다는 것에는 만족했지만, 치료사 힐이 제 손아귀에 없다는 것은 상당히 불만이었다.
확 노려본 황후는 거침없이 다가와 크라이스의 고운 은발을 사납게 틀어쥐었다.
머리채를 잡힌 상태인데도 크라이스는 무표정했다.
“많이 화가 나신 모양입니다, 황후 폐하. 제 충정을 의심하시는 것을 보아하니.”
“하, 뚫린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것이야? 벤자민이 그러더군. 치료사 힐이 그 씹어먹을 힐링턴의 계집애라고! 그대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거야. 그렇지 않나?”
“저는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황후 폐하. 기도 유람을 떠나고 있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그날 그 치료사를 잡았다면 힐링턴의 첫째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밝혀질 수 있었고, 바로 범인으로 몰 수도 있었지. 그것을 망친 것이 크라이스, 그대인데 의심하지 말라?”
“예, 의심하시면 안 됩니다.”
실소가 떠오른 최고 신관의 반반한 낯을 바라보며 황후는 미간을 확 구겼다.
분명히 모든 것을 그녀의 통제 아래 두었는데, 왜 이렇게 서늘한 기분이 드는지 모를 일이다.
아니, 아니다. 황후는 고개를 저었다.
크라이스는 그녀가 마련한 가장 크고 강력한 패였다.
“제 충정을 의심하시기엔 너무 멀리 오지 않았습니까. 모든 사건에 제가 관련되어 있는데, 이제 와서 제가 황후 폐하를 배신할 리가요.”
“그렇다면 힐링턴에 대해서는 어찌 된 것인지 설명해 보라.”
“우연이었습니다.”
“하, 우연이라? 그것만큼 비루한 답이 없구나.”
“치료사 힐이 힐링턴의 첫째라는 것은 지금 안 사실입니다. 방금 폐하께서, 벤자민 전하께서 영특하시어 정확한 증거도 없이 추측으로 결론 맺으신 것이라 하셨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
황후의 눈썹이 씰룩였다.
“저를 믿지 않으신다면 지금 버리시겠다는 것인데, 애석히도……. 제가 없으면 모든 일이 힘들어지시지 않겠습니까, 황후 폐하?”
“쯧, 그대를 말로 어찌 이길까.”
요리조리 잘 빠져나가는 작자이긴 했지만, 지금 더 모욕을 주며 쥐잡듯 잡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앞으로 더 큰 일을 맡겨야 하니까.
“좋다, 크라이스. 그대의 말대로 그대의 충정을 의심하기엔 우리가 함께 한 일들이 너무 많지. 그렇지 않나?”
황후는 손을 물렸다.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크라이스가 빙긋 웃었다.
분노조차 보이지 않는 말끔한 얼굴은 진심으로 고개를 조아려 충성하는 듯했지만, 황후는 미심쩍은 기분을 삼켰다.
그래. 어차피 얼마 남지 않았다.
바로 저 앞에 황좌가 있었고, 그녀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다.
그때, 그녀가 개처럼 부린 저 남자를 살려둘 필요가 굳이 있겠는가?
비정한 속마음을 감추며 황후는 냉정하게 지시했다.
“이 건은 이대로 정리하기로 하지. 대신, 크라이스.”
“예, 말씀하십시오.”
“그대에게 아주 중요한 일을 맡겨야 할 것이야. 그대가 준 중요한 패를 어찌 사용할지는 정하지 않았지.”
“하오면?”
황후는 아주 우아하게 웃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그 아름다운 미소가 세상에서 가장 소름 끼치게 보이는 것은.
“치료사 힐이라는 자를 이용하려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힐링턴의 첫째라지 않아? 하늘이 바로 이 몸을 돕는 것이 아닐 수가 없지. 그것을 가장 먼저 이용하기로 하였어.”
“……어떤 방식으로 말씀이십니까?”
황후가 어깨를 흔들며 웃었다.
“힐링턴의 첫째가 그대를 아주 신뢰한다지?”
크라이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것을 조롱하듯 바라보며, 황후가 입술을 비틀었다.
“힐링턴의 첫째를 손아귀에 쥐고, 모든 죄를 덮어씌울 것이야. 그것이 사악한 범인이라는 소문을 흘려 놓았으니. 그러기 위해서는.”
황후가 다가왔다.
“크라이스. 그대가 직접.”
그리고 크라이스의 멱살을 쥐고, 당장이라도 단검으로 심장을 찌를 듯 노려보았다.
“그 계집을 속여, 내게 데려오라. 그것이 내 손에 있어야 일이 수월히 진행될 수 있으니.”
의심의 기운이 남아 있는 시선이었다.
네가 진짜라는 것을 증명해라, 그리 말하듯.
“그리하면 그대의 복수를 위해, 그대의 손으로 직접 황제의 심장을 찌를 수 있게 해줄 것이야.”
* * *
틀어 올린 머리카락이 살짝 내려와 있는 긴 목덜미가 우아하고 희었다.
화장은 옅었고, 전체적으로 평소의 황녀 라피이아와 달랐다.
평소 지나치게 화려한 보석 목걸이 대신 수수하고 우아한 진주 목걸이와 진주 귀걸이를 착용한 채, 흰 레이스 장갑을 낀 손이 찻잔의 손잡이를 의미 없이 매만졌다.
화려한 옷감의 문양이 아름답긴 하였지만, 그 외에는 어떤 장식물도 없는 수수한 흰 드레스였다.
마치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곳에 싸우러 온 것이 아니라 그렇게 주장하는 것 같은 모양새.
시선이 마주쳤다.
대체 이곳에 무슨 일로 온 거지? 황제의 선택도 황후와 같은 것일까?
아주 짧은 시간이 흐른 뒤, 먼저 움직인 것은 나였다.
“제국의 고귀하신 작은 달을 뵙습니다, 황녀 전하.”
“갑자기 찾아와 놀란 모양이군요? 그래도 편지는 보냈는데 아직 읽지도 않은 얼굴이야. 도착 후 시간을 보니…… 최소한의 의복만 갖춘 채 내려온 것처럼 보이거든. 그렇지 않나요? 아니면 기다리는 연락이 있었는데, 내가 와 당황한 것인가?”
역시 만만치 않은 여자였다.
속을 빤히 읽은 것 같은 모양에 가만히 서 있었더니, 성의 없이 손짓했다.
“편히 앉아요, 힐데아 폰 힐링턴 영애. 이곳은 그대의 집이지 않나요? 손님이 주인처럼 굴어서는 안 되는 법이지.”
참 이상한 여자였다.
무례한 듯하면서도 은근히 기분이 나쁘지 않으니, 저것은 다 변해버린 그녀의 시선 때문이리라.
둘만 있으니 더 확연했다.
적의가 없는 시선.
그저 존재하는 힐데아라는 사람을 관찰하는 시선은 투명했다.
나는 입을 열었다.
“전하. 왜 저를 그렇게 보십니까?”
“그건 무슨 말일까?”
재밌다는 듯이 휘어지는 눈매를 보며, 나는 망설임 없이 물었다.
저번부터 묻고 싶었던 말을.
“돌아온 뒤, 마주친 사람들의 시선이 많이 달라진 것은 알고 있습니다. 제 태도가 변했기 때문일 거예요. 하지만 전하께서는 유독 도드라졌습니다.”
“호오?”
“왜 저를 이제 미워하지 않으시나요?”
황녀의 눈웃음이 더 진해지는 것을 보며 다시 물었다.
“더는 저를 공격하지 않으시잖아요. 그 이유를 정확히 알고 싶습니다.”
그래야 당신이 적인지, 아니면 아군이 될 수 있을지 판단할 수 있을 테니까.
황녀, 라피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