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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139화 (139/155)

139화. 응, 그대가 마음에 들어

“아하하하하!”

용기 내어 질문을 던졌는데, 돌아온 대답에 당황해야 했다.

갑자기 표정이 이상해졌던 황녀는 정말 미친 사람처럼 어깨까지 흔들어가며 웃음을 터뜨렸기 때문이다.

“저, 전하?”

“아하하하, 정말, 아하하! 이런 질문은 상상해보지 않았는데…… 아하하!”

당황해 눈만 깜빡이는 내 꼴이 웃겼던 것일까?

한참을 더 웃은 황녀는 눈꼬리에 맺힌 눈물까지 닦고 나서야 제대로 나를 쳐다봤다.

이봐요, 라피이아. 당신 정말 미쳤어?

“안 미쳤어요, 영애.”

“제가 지금 속마음을 말했나요?”

“아니. 하지만 표정으로 말했잖아요?”

아니라고 차마 말할 수가 없어서 입을 다물었더니, 황녀가 다시 한번 픽 웃었다.

“뭐, 참으로 불경한 생각이었지만, 넘어갈게요. 아쉬워서 그대를 찾아온 것은 나니까.”

도도하고 우아한 말투에는 웃음이 스며 있었다.

확실히 알겠다. 황녀가 내게 보이는 것은 확실한 호감이다.

하지만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렇게 갑자기? 아니, 왜?

‘힐링턴은 누가 봐도 황제와 다른 노선을 걸으려 하고 있어. 축언 도둑 사건으로 갈등은 더 커졌지. 그런데 황제의 대변자인 황녀가 내게 호의를 보낸다? 그것도 황제가 원하던 가브리엘과 황녀의 약혼이 영원히 틀어진 지금?’

갑자기 황녀가 톡, 하고 찻잔을 두드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겠는데.”

내 시선을 이끌려는 것이었다.

“그대, 경계할 것 없어요. 나는 지금 아바마마의 뜻을 대신하기 위해 온 게 아니거든.”

“그 말씀은.”

“나는 오늘 지극한 호의로 찾아왔어요. 겸사겸사 그대에게 정보를 줄 것도 있었고, 앞으로의 방향도 확실히 밝혀 굳이 적을 더 추가하지 않으려는 계획이기도 해요.”

“……정보. 그리고 적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래요. 나는 힐링턴을 적으로 삼을 생각이 없거든.”

나는 다른 것에도 놀랐다.

라피이아, 저 여자가 저렇게 웃을 수도 있는 사람이었는가 싶어서.

심술 맞지도, 비틀리지 않은 희미한 미소가 그녀의 입술 위로 떠올라 있었으니까.

황녀는 손깍지를 낀 뒤, 소파에 등을 기대어 편하게 앉았다.

그리고 입술을 삐죽거리며 새침하게 말했다.

“그건 모두 다 그대 때문이야.”

뭐라고?

황당하게 바라보는데도 황녀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억울하네요. 저는 황녀 전하께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아무것도. 내게 아부도 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적대적으로 굴지도 않았죠. 까칠하고 철없고 무례하게 굴면서 그대를 공격한 내게 말이에요. 그렇게 꾹꾹 참아내더니 다른 것으로 시원하게 터뜨리며 사고를 치더군요? 요양? 웃기는 소리지. 다 버리고 도망갔었잖아요, 그대?”

저렇게 직접적으로 물어보는 사람도 황녀밖에 없을 것이다.

다들 내가 요양을 떠났었다 우아하게 말하면 그것에 대해 떨떠름해하면서도 그냥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귀족 예법이 그러하다.

자세히 되묻고, 캐묻고, 당신의 말이 거짓이니 나를 납득시켜라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근데 황녀는 하는구나.

“오, 물론 그대가 내게 거짓말 했다고 추궁하는 거 아니에요. 그걸 황제 폐하께 사실대로 고하라는 것도 아니고. 그러면 너무 재미가 없어지니까.”

재미?

“나는 그대의 행동에 감명받았어. 여태까지 모른 척하고 있었던 것을 그대가 멱살 잡고 눈앞에 들이밀어 준 기분이었거든요.”

참 이상한 기분이었다.

희미하게 웃고 있는 라피이아의 시선이 퍽 따뜻해 보여서, 뺨이 다 간지러울 지경이었다.

나 지금 꿈꾸는 중인 거야? 그게 아니고서야 라피이아가 왜 저렇게 나오는 건지 정말 모르겠는데?

얼떨떨하게 바라보고 있으니, 황녀가 갑자기 표정을 달리했다.

아까까지는 친구…….

이 단어를 황녀를 두고 쓸 줄 몰랐지만, 정말 친구라도 바라보는 듯 했던 표정이 순식간에 돌변한 것이다.

싸늘하고 도도한, 내가 알고 있는 황녀 라피이아의 얼굴로.

“그대에게 도움을 요청하려고 손을 내밀거나, 그 찢어버리고 싶을 만큼 재수가 없는 가브리엘에게 협조를 요청하는 것은 아니에요. 단지 나를 적으로 가정하고 공격할 필요는 없다는 뜻을 전하러 온 것이죠. 가브리엘은 정말 재수가 없지만 까다롭거든.”

하나는 알겠다.

가브리엘이 황녀를 질리게 싫어하는 만큼, 황녀도 가브리엘을 싫어하는구나.

그렇게 싫어하는 주제에 가브리엘에게 약혼하자고 잘도 다가왔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내가 이상하죠?”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갑자기 미쳐버리거나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다 버리고 도망칠 수 있었던 그대의 행동을 보며 용기를 깨우쳤다고 해야 할까.”

용기라니.

그건 용기라고 칭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었다.

참다 참다가 그냥 터져서 행동으로 저질러버린 것뿐이었는데.

칭찬 받을 일도 아니었고.

당황하여 손을 휘저으며 말을 하려고 했는데, 황녀는 자신이 마저 말을 할 수 있게 해달라는 듯이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헛기침을 한 번 한 뒤, 시선을 내게서 돌렸다. 꼭 마주치기에는 낯부끄럽다는 듯이.

“좀 짜증나지만, 그래요. 그대를 보며 깨달았어. 질투도 나더군요. 왜 나는 애초에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지? 그런 생각이 들었으니까.”

황녀의 뺨은 살짝 붉어져 있었다.

“자존심 세우려 더 가시를 세우고, 더 무례하게 굴었어요. 못되먹게 행동했다는 거 알아요. 그대는 가다가 괜히 뺨 맞은 격이었을 거예요. 난 줄곧 화가 나 있었죠. 좋아하지도 않는 가브리엘의 옆자리를 빼앗아야 했거든.”

나는 어느새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평소처럼 카랑카랑하지 않은 조용한 그녀의 목소리를.

“그깟 황녀 자리가 뭐라고, 아버지에게 예쁨받는 것이 다 뭐라고, 벤자민 빌어먹을 오라버니나 나나 똑같이 축언과 이능이 없는 건 마찬가지고, 그놈보다는 내가 더 똑똑한데.”

그깟 축언과 이능.

미엘르 제국민의 뿌리부터 박혀 있는 것을 흔드는 놀라운 말이었다.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황녀라는 것을 생각했을 때 더더욱.

“그리고 축언과 이능이 없는 게 그렇게 죄인 것 같지도 않고요. 무슨 상관이람?”

나는 벤자민을 떠올렸다.

음울한 눈빛과 기이한 열기로 나를 원망하며 고백하던 그 눈동자.

축언과 이능으로 결정되는 세상이라며 억울하게 말하던 벤자민의 예전 모습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그것에 누구보다 얽매여 있는 것 같았던 황태자를.

하지만 황녀는.

“낳은 것은 부모인데 왜 내가 축언과 이능을 타고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죄스럽게 생각하며 아버지에게 충성을 다 바쳤는지 모르겠더란 말이죠.”

같은 입장에 있는 황녀는 저렇게 말했다.

나는 벤자민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말해주고 싶었다.

황녀는 당신과 다른 선택을 했어요.

과거에는 나도 내 불길한 축언 때문에 모든 불행이 시작된 것은 아닐까 두려워했었는데, 당신의 여동생은 저렇게 말하고 있어요.

황녀의 눈은 의지로 가득했다.

“처음부터 벤자민이나 나나, 똑같이 후계자 자리에서 시작한 건데 말이에요. 나는 눈부신 축언과 이능을 가진 자를 남편으로 두고 이후 제국을 위해 선택해야 한다? 돌아보니 개소리였어요.”

웅크리고 있었던 사람이 몸을 펴는 것처럼.

“그러니까 그대, 앞으로 나는.”

황녀는 환히 웃었다.

“내가 알아서 후계자가 될 거예요. 내 능력, 내 위치, 그리고 내가 부리는 내 사람들.”

꼭 거추장스럽게 달고 있던 가면을 벗어버린 사람 같았다.

“가브리엘 따위 필요 없다고 좀 전해줄래요? 그리고 내가 앞으로 아바마마의 대변자 역할을 할 생각이 없다는 것도.”

“직접 말하셔도 되셨을 텐데 왜 저를 찾아오셨는지.”

“아, 정말. 눈치가 더럽게 없는 건 여전하네요, 영애.”

과격한 말에 당황스러워 눈을 깜빡이는데, 황녀가 장갑을 과격하게 벗어내더니 내 손을 덥석 잡았다.

“그대 덕분에 내가 변했다니까요? 그게 무슨 뜻이겠어요. 난 그대가 마음에 든다고요. 게다가 그대, 나더러 가브리엘을 앞에 두고 이런 부끄러운 이야기들을 하라고요? 미쳤어요?”

“가브리엘을 정말 싫어하시네요.”

“진짜 싫어요.”

악력도 무척이나 세서 깜짝 놀랐다. 그리고 닿는 손가락 끝에 희미하게 잡혀 있는 굳은살도.

설마 황녀는 검술을 배운 것일까? 아니, 이 굳은살은 검술을 잘 모르는 내가 봐도 하루 이틀 만에 생길 수 있는 흔적이 아닌데?

악녀 황녀, 라피이아.

그렇게만 봤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아니, 눈앞의 사람에게 감탄했다.

나 때문에 변했다고? 아니.

당신은 스스로 꾸준히 준비하고 있었던 거겠지.

난 라피이아에게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루다나 마을의 엘라가 내게 대해준 것들이 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처럼, 그냥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뿐이다.

“음, 그러니까, 전하. 지금 말씀을 정리하자면.”

“뭔 정리를 해. 그대랑 잘 지내고 싶다는 뜻이잖아요?”

“네, 그런 것 같네요.”

아주 잠깐 침묵한 황녀는 갑자기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저건 습관인가 봐.

말하기 부끄러운 말을 하기 전에 가다듬는 습관.

“그리고, 흠, 내가 미친년처럼 굴었던 과거도 사과하고 싶다는 뜻이고. 뭐, 뭐야. 왜 그렇게 봐요?”

고개 돌린 황녀의 뺨이 무척 붉었다.

그 모습이 부끄러워할 때의 가브리엘과 좀 닮은 것 같다고 하면 두 사람 다 펄쩍 뛰겠지?

물론 황녀가 많이 괴롭혔지만…… 유년기에 알게 모르게 서로 물들었던 것이 아닐까?

“흠, 흠흠. 그대의 마음을 짐작하고 있었던 건 황실에서 나밖에 없었을 거예요.”

“아.”

그건 내가 가브리엘을 짝사랑하고 있는 중이었을 때의 이야기였다.

다시 휙, 고개를 돌린 황녀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걸 알고 내 추종자 영애가 당신에게 편지를 보내며 괴롭혔는데, 솔직히 모른 척했어. 그대와 가브리엘, 둘이 찢어지면 나야 좋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 편지를 황녀께서 보낸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신가요?”

그때 내 마음을 그대로 절망에 빠뜨렸던 쪽지.

“뭐, 나는 관련 없다, 죄 없다는 변명을 하자는 건 아니에요. 흥, 내 사람이 한 행동이었으니 뭐. 여지를 준 것도 있었고.”

“그러셨군요.”

“흠, 흠흠.”

가만히 바라보니 황녀가 다시 한번 헛기침을 했다.

웃음이 나왔다.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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