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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140화 (140/155)

140화. 납치, 믿음의 결과 (1)

“물론 그대가 용서하기 힘들다고 한다면 앞으로 꼬시려고 더 노력해야겠지만.”

“꼬, 셔요? 저를요?”

“……응. 싫나요?”

황녀가 입술을 비틀었다.

“그러니까 그대, 나는. 나는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라 자꾸 말이 헛나가고 있긴 한데.”

여전히 사나워 보이는 눈초리였지만, 예전처럼 심장이 쿵쿵 뛰지는 않았다.

“친구 하자고 하는 거예요.”

나는 눈을 크게 떴다.

황녀의 얼굴은 이제 토마토처럼 붉게 변해 있었다.

“나는 고귀한 황녀여야만 해서, 속 터놓고 말할 수 있는 또래 친구가 하나도 없었거든.”

잡힌 손을 바라보며 나는 웃어버리고 말았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정확한 건 내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것. 어쩌면 이건 엘라와 처음 대화를 나누었을 때의 기분 같다는 것.

“내가 한 일이 있으니, 그대와 바로 친구가 되는 건 무리겠지만…….”

안 그런 척하며 긴장했던 것인지, 심각하게 굳어지는 황녀의 얼굴을 보며 잠시 뜸을 들였다.

가브리엘이 여기 있었다면 펄쩍 뛰며 반대했을 것 같기도 하지만.

‘친구라고.’

더 있다간 황녀가 울어버릴 것 같다고 생각하며 얼른 말을 이었다.

“그래도 이전과는 관계가 달라질 것 같네요.”

황녀가 고개를 홱 돌려 나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정말?”

“네.”

“진짜? 이렇게 쉽게?”

은근히 귀여운 사람이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잘 부탁드릴게요, 전하.”

“…….”

“전하?”

“흠, 흠흠.”

사실은 거절당할 것도 고려하고 왔었던 것일까.

헛기침하며 눈꼬리에 맺히는 눈물을 닦아내는 황녀의 귀여운 행동을 나는 모른 척해주었다.

엘라, 나 친구가 한 명 더 생겼어.

* * *

“치졸하게 구는군. 이런 식으로 엮어보시겠다?”

가브리엘은 입술을 비틀며 들고 있던 서류를 집어 던졌다.

번지는 소문이나, 적극적으로 힐데아를 끌어들이려는 분위기를 보아, 어떤 식으로든 더 확실하게 증거를 만들려고 할 줄은 알았지만.

“힐데아 영애가 연회장에 나타난 날만 골라서 축언 도둑 사건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벌써 눈치챈 몇몇은 신나게 떠들어대고 있고요.”

보고했던 디안도 영 마뜩잖은 표정으로 씁쓸하게 혀를 차며 말했다.

“방식이 추잡하다며 로제 영애가 길길이 날뛰는 걸 간신히 말렸어요.”

“그 성격에 제 언니 욕한 영애들의 머리라도 뜯으려고 들었겠지……. 됐고. 힐데아가 황태자를 만나기로 한 날짜는?”

“내일입니다.”

가브리엘은 손으로 얼굴을 거칠게 쓸며 한숨을 내쉬었다.

전쟁터에 나서기 전에도 이렇게 긴장된 적이 없던 것 같은데, 힐데아가 주변 경계까지 풀고 홀로 나가 있을 생각을 하니 위가 쑤시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사람 몇이라도 붙이는 게 낫지 않을까요?”

디안은 영 불안하고 초조한 기색으로 미간을 구겼다.

그러나 그건 가브리엘이 하고 싶은 말이었다. 할 수 없는 말이기도 했고.

“아니. 그러면 겁먹은 범인은 절대 나서지 않을 테지.”

“무려 힐링턴 공작가의 딸입니다. 혼자 움직인 것이 더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함정이라 여길 수도 있고요.”

“상대는 힐데아를 무시하고 있어. 게다가 힐데아는 평상시에도 혼자 움직이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아마 잘 속여 넘겼다고 생각하거나, 함정이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할 거다.”

축언과 이능을 지우는 능력.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는 능력이었다.

그것을 얻었다면 주변 모두가 제 마음대로 되었다고 자만하며 생각할 사람이었다.

그것이 그 범인이 직접 갖고 있는 능력인지, 아니면 그 능력을 가진 자를 아랫사람으로 부리는 것인지는 몰라도.

“최대한 멀리, 최소한 행적을 파악할 수 있는 거리에 사람을 배치하도록 해. 신호를 보내면 내가 직접 움직인다.”

“네, 주군.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그때 마법 잡화 상점에서 말한 물건을 요청해서 힐데아에게 건네도록.”

“어? 주군의 말씀은…….”

그 더럽게 비싸기만 하고 실제 작동하는지 의문스러운 기이한 물건 말씀하시는 겁니까?

……라는 디안의 경악한 표정을 보며 가브리엘은 쓴 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것.”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그 미친 로제가 물건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만들어내니 분명 쓸모가 있을 터.’

더럽게 비싸긴 하더라도 말이다.

가브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잘 꾸며진 카페의 거리.

늘어선 음식 가판대와 카페에 걸맞게 잘 꾸며진 예쁜 화분들을 구경하는 인파로 제법 시끄러웠다.

그때, 그 여자가 그곳에 등장했다.

우아하고 도도하여,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듯한 분위기에 남녀 구분 없이 감탄하는 시선이 내리꽂혔다.

“어머나, 저 옷 좀 봐요. 저 형태의 옷을 저렇게 아름답게 소화하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가까이 가지 마. 고위 귀족일 것이 분명해.”

“저 은발, 힐링턴 공작 영애가 저런 머리카락을 지니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에이, 공작 영애가 왜 호위도 없이 혼자 다니겠어?”

반짝이는 은발 위에 꽃과 보석이 장식된 우아한 모자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날씬하고 길쭉한 팔다리를 강조하듯, 넥라인 위로 장식된 러플이 무척 화려했고 부푼 풍성한 치맛단 아래 또각거리는 벨벳 소재의 구두가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런 여자가 걸어간 곳에는 그린 듯한 미소를 그리고 있는 신사가 앉아 있었다.

깊게 쓴 모자 때문에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살짝 보이는 매끈한 턱만으로도 그가 눈부신 미남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아아…….”

하지만 곧 두 남녀의 애정 행각을 기대하고 있던 군중들은 아쉬움의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고귀한 신분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카페 앞에 가림막이 세워졌기 때문에.

대체 누굴까.

저 한 쌍의 남녀는?

* * *

그때의 헝클어진 모습이 마지막이었는데 지금의 벤자민은 무척이나 깔끔하고 신사적인 의복을 갖추고 있었다.

부드럽고 편안해 보이는 미소는 꼭 처음에 만났을 때 같았지만.

‘눈빛이 달라.’

마주치는 사람을 오싹하게 만드는 그 시선은 결코 편하지 않았다.

“앉으세요, 영애.”

약속 장소에 이르게 도착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더 일찍 도착해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었다.

마냥 호의적으로 대할 수 없는 경계심을 억누르며 나는 자리에 앉았다.

기사들 몇이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황태자의 사람인가?

일부러 사람들이 모두 모이는 곳을 선택한 것도 쉽사리 위험한 짓을 하지 않겠다는 안심을 주려는 것일지도 모르지.

난 치마 위로 놓은 손을 꽉 쥐었다. 아니, 난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각오를 하고 이곳에 나왔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밖이니까 편히 대해요.”

“그럴 수야 있겠습니까.”

“우리가 처음 만났던 곳도 이런 분위기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는데, 기억해요?”

“이보다는 조용했지요.”

“그래도 내겐 영애만 보였는데.”

빙긋 웃으면서 내뱉는 말이 지나치게 친근하게 느껴져 살짝 미간을 구겼다.

“오늘 저를 보고자 하신 용건을 여쭈어도 될까요?”

“용건이랄 것이 있나요. 영애는 내가 영애에게 고백했다가 차였다는 걸 잊은 모양이에요. 난 당신이 보고 싶은데, 쉽게 만날 수 없으니 약속을 청한 거죠.”

나긋나긋하고 친절한 말씨였지만, 분명 그 안에 가시가 있었다.

나는 벤자민을 뚫어져라 바라봤고 그도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게 화가 나셨습니까?”

“아니요. 거절당했다고 바로 꼬리를 말고 사라지는 것보다는 몇 번이라도 더 얼굴을 마주 보고 싶었을 뿐이에요. 난 영애를 좋아하니까요.”

왜 벽을 보고 대화하는 기분이지? 나는 그가 날 좋아한다고 말할 때 알 수 없는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그런 벤자민을 볼 때마다, 가브리엘이 떠오르며 그가 했던 말과 태도, 표정과 비교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가브리엘은 좀 더.’

조심스러웠지.

나를 배려하는 느낌이었고, 항상 그 시선 끝에는 나를 살피는 기색이 역력했다.

‘반면에 벤자민은.’

하지만 황태자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연회장에서와 다르지 않아.’

오히려 한 번씩 내비치는 시선의 차가움이 거절한 내게 분노라도 품은 듯했다.

황태자가 불러낸다면 공작 영애는 그것을 쉽사리 거절할 수 없다는 것도 상관하지 않는 것 같았다.

벤자민의 시선에는 미안함도 없었고, 배려도 없었고, 조심스러움도 없었다.

오로지 자기 자신만 있었다.

저렇게 오만한 사람이었던가? 성격이 저렇게 갑자기 바뀔 수 있어? 아니면 저게 본성이었을까.

“너무 경계하지 말아요. 만남을 청한 이유는 단순해요. 우리가 단둘이 제대로 대화한 적이 없던 것 같아서요. 나는 영애에 대해 궁금한 것이 너무 많은데……. 항상 당신 시선의 끝에는 그 사람이 있었거든요.”

발랄하게 대화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 안엔 선명한 질투가 담겨 있어서 다시 등골이 오싹해졌다.

“축언과 이능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부득부득 노력했던 나를 비웃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결국 당신도 눈부신 축언을 선택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단 말이죠.”

“전하, 저는.”

억울한 말이었다.

축언과 이능?

내가 가브리엘을 마음에 담기 시작한 것은 그런 것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눈부시게 잘생긴 사람이라는 것도, 제국의 영웅이라는 것도, 젊은 공작이라는 것도 내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다정한 말 한마디.

조심스러운 인사말.

흐르는 시간 속에 쌓여가던 편지들.

그 사이의 정 때문이었다.

“저는 그런 것 때문에 그 사람을 눈에 담은 것이 아닙니다. 축언과 이능은 상관없는 문제였어요.”

“상관이, 없다?”

“네. 저는 그냥 그 사람을 본 것뿐이에요. 그가 축언과 이능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어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

“그게 전하가 아니었을 뿐이에요. 말씀하신 대로 저희는 단둘이 대화조차 자주 해보지 않은 낯선 사이니까요.”

“힐데아 영애.”

“전하께선 제가 좋아하는 음식도, 제가 좋아하는 취미도, 제가 좋아하는 것을 위해 노력한 적도, 저와 함께 시간을 보낸 적도 없으신 분이에요. 제게 애정이라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같이 쌓아가는 것. 그 상대가 전하가 아니셨을 뿐이에요.”

덜컥 굳는 눈을 보면서도 할 말은 해야 했다.

질질 끌려다니고 싶은 생각은 없었고 또한.

‘이렇게 도발해서라도.’

오늘 만난 목적을 달성하고 싶었다. 아니, 정확히는 나를 불러낸 그의 속셈을 알아내고 싶었다.

무엇을 하려면 빨리 해, 벤자민. 다시는 당신과 이렇게 단둘이 만나고 싶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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