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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141화 (141/155)

141화. 납치, 믿음의 결과 (2)

황후는 우아하게 걸었다.

그녀는 원래도 기세가 당당한 사람이었지만, 오늘만큼은 더욱 두려운 것이 없었다.

황후는 코웃음을 치며 제 뒤를 따르는 이들을 무기처럼 휘두르며 앞으로 향했다.

누구도 그녀를 막지 못했다.

그래, 이것이다. 이런 것을 원했다!

지금쯤 잘 해내고 있을 아들을 생각하니 흐뭇한 웃음마저 나왔다.

‘아주 오랫동안 기다린 사냥감을 드디어 손아귀에 쥐겠구나.’

한동안 어미 말을 듣지 않았던 아들이 다시 착한 마음을 먹고 돌아온 것이 아주 만족스러웠다.

이게 모두 하늘이 자신을 돕는 기분이었다.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졸도할 것 같은 표정의 궁인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그리 고했다.

곧 화려한 문이 열리고, 사치스러운 의자 위에 앉아 있는 사내가 보였다.

황제.

그녀의 남편.

“이게 무슨 짓이지, 데자이아?”

그러나 황제의 서늘한 눈동자는 결코 아내를 보는 눈이 아니라, 원수를 보는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건 그녀도 그다지 다르지 않으리라. 황후는 오만하게 웃으며 황제의 앞에서 콧대를 세웠다.

“어머나, 안색이 그리 좋지는 않으십니다, 폐하?”

“어찌 사사로이 궁의 기사들을 움직인 것이지? 지금 나를 유폐하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황제 디트로이아는 영특하고 영민한 자였다. 아니, 능구렁이에 가까웠다.

쉽게 사람을 믿지 못하고 자신의 손으로 모든 것을 관여하고 나서야 안심하는 지독한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

문제는 그 오만함.

‘당신은 나를 봐줬다고 생각했겠지.’

황후의 입술이 사납게 비틀렸다.

“유폐라니요, 폐하. 누가 들을까 겁이 납니다.”

봐주다니, 이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말인가?

황후는 똑바로 걸었다.

“사안이 급해 폐하를 보호하고자 온 것이랍니다. 사악한 축언 도둑 사건의 범인을 이 황후가 찾은 것 같으니,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요?”

“데자이아!”

파랗게 질린 황제의 시종들이 당장이라도 제 몸을 던져 막기라도 할 듯 부들부들 떠는 것이 보였다.

초대받지 않은 자에 대한 무례를 설파하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사실 이 황궁에서 황후인 자신이 가지 못할 곳은 없었다!

‘앞으로는 더더욱 그렇게 될 터이지!’

가까이 다가선 그녀를 보며 디트로이아의 구겨진 얼굴이 보였다.

그는 허를 찔린 사람의 낯을 하고 있었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하, 검을 든 자를 바로 옆에 두었군. 내가 어리석고 멍청했구나.”

“강인한 축언과 이능을 지닌 자들이 대부분 그러더군요. 자신이 신이라도 된 양, 착각을 하더란 말입니다.”

이를테면 당신처럼.

“이해할 수가 없어.”

“무엇을 말입니까, 폐하?”

“황후의 위치에서 가지지 못할 것이 없고, 누리지 못할 영광이 없는데. 왜……. 대체 왜?”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누리지 못할 것이 없다? 가장 먼저 나를 황후 취급하지 않고 무시했던 사람이 대체 누구인지 모두 잊으신 모양입니다, 폐하?”

사납게 비웃는 제 목소리에 담긴 경멸을 읽은 모양이었다.

황제의 차갑게 굳는 얼굴을 보며 그녀는 속이 비틀렸다.

“내가 축언과 이능을 지니지 못한 아들을 낳았을 때, 나를 조금이라도 존중해주었다면 이런 일을 벌이지 않았을 수도 있지요.”

“그럼 이게 모두 내 탓이라는 건가?”

“가브리엘 그 가증스러운 것을 가까이 두며 다른 생각을 품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이 욕심 많은 황후가 나서서 참담한 일을 벌였겠습니까?”

황제의 눈썹이 당장이라도 고함이라도 지를 듯 분노로 들썩였다.

그들 부부 사이에서 이 화제를 입 밖에 제대로 꺼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벨키우스 사변.

모조리 죽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감히 자신의 아들의 자리를 그것에게 물려줄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고작 갓 태어난 갓난쟁이가 놀라운 축언과 이능을 가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디트로이아의 눈에 스치는 욕심을 보았을 때.

원래도 좋지 않았던 부부 사이는 최악으로 굴러 떨어졌다.

“나를 악녀라 칭해도 좋아요, 폐하. 하지만 앞으로 벌어질 모든 일은 폐하께 참으로 가혹할 것이랍니다. 저는 탐욕에 모든 것을 맡기기로 했거든요.”

그 오만한 군신처럼 굴던 황제가 입을 꾹 다물고 가만히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황후는 녹아내릴 듯이 고혹적으로 웃으며, 손에 든 작은 유리병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직감적으로 안 것이리라.

이 손아귀에 든 것이 무엇인지.

이것에 한 방울이라도 닿으면 스스로가 어찌 변하게 될지, 눈치 빠른 황제는 알아챈 것이리라.

‘아아, 이렇게 기쁠 수가.’

힘을 가진다는 것은 이렇게 황홀한 것이었다. 황후는 짐짓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신이 그리도 집착하고 아끼던 것이 어찌 망가지는지, 그곳에서 똑똑히 지켜보도록 해요. 황제 폐하.”

그녀는 가장 처음, 힐링턴과 벨키우스를 망가뜨릴 작정이었다.

그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손아귀에 쥐고, 쥐어뜯어, 약점에 칼을 쑤셔 박으리라.

* * *

허튼 시간이었다.

대체 무슨 꿍꿍이를 가진 것인지 의심하며 귀를 기울였지만, 거진 한 시간 동안 벤자민은 의미 없는 대화를 떠들어댔다.

주로 주제는 축언과 이능이 없는 세상이 온다면 어떨 것 같냐는 말이었다.

꼭 축언 도둑 사건에 자기가 직접 관여되어 있다고 실토하는 것 같기도 한 말에 헛웃음이 나왔다.

아니면 날 협박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이런, 지루한 표정이군요, 영애. 일말의 예의도 보여주지 않겠다는 그런 건가요? 왜. 영애는 놀라운 이능을 갖고 있으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저는 놀라운 이능을 갖고 있지 않아요. 전하께 보여드린 적도, 언급 드린 적도 없는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우리 둘 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잖아요? 영애가 사라졌던 동안, 그렇게 놀라운 일들을 하고 있었을 줄 몰랐어요.”

굳이 루다나 마을의 이야기를 들추겠다는 걸까.

황태자를 만나러 오기 전, 특별히 루다나 마을에 대한 경계를 로제와 아빠에게 부탁했다.

내 일로 그들에게 화가 미쳐서는 안 될 테니까.

나는 테이블 아래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주먹을 꽉 쥐었다.

“정말 저는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축언 도둑.”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돌연 벤자민이 화사하게 웃었다.

부드러운 미소였는데, 한겨울 밖에 내쫓긴 것처럼 서늘해졌다.

“축언과 이능을 모두 없애는 능력도 황홀한데, 그것을 유일하게 치료하고 막아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하면 너무 대단하지 않겠어요?”

왜 저런 말들을 하는 거지?

“제안하고 싶은 거예요. 영애가 솔직해진다면, 그 능력을 아주 유용하고 값지게 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상상해봐요. 당신을 여태까지 무시했던 자들이 반대의 위치에서 벌벌 기게 되는 장면을. 구미가 당기지 않아요?”

나는 입을 꾹 닫았다.

황태자는 속이려는 생각도 없었고, 거기에 더 나아가 지금 나를…… 끌어들이겠다고?

“전하. 저는 그런 취미가 없습니다.”

“나는 마지막으로 힐데아, 당신에게 기회를 주고 싶은 거예요. 내 호의를 무참히 짓밟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그러니까 내 손을 잡아요.”

벤자민이 보란 듯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면 당신이 어떤 행동으로 내 마음을, 그대를 위하려던 호의를 짓밟았든 상관하지 않을게요.”

호의라고?

우스웠다.

벤자민의 눈은 전혀 상냥하지 않았고, 흉흉하기까지 했다.

그는 눈을 번뜩이며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하지만 이건 정말 마지막 기회라는 걸 명심해요. 난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은 다른 이도 가지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거든요.”

느릿느릿한 어조가 무척이나 여유로웠다.

나는 그가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시선에 보이지는 않아도 날 확인할 수 있는 거리에 가브리엘과 가브리엘의 수하들이 있을 것이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 갑자기 생기더라도, 로제의 물건 덕분에 찾아올 수 있다.

‘겁먹을 것 없어.’

나는 벤자민을 향해 눈도 깜빡이지 않고 말했다.

“저는 전하의 호의에 기대야 할 만큼 절박하고, 나약하지 않아요. 전하께서 고백하셨더라도 그 마음을 거절할 자유가 있는 것처럼요. 저는 전하께 도와달라 청한 적이 없고, 기회를 달라 부탁드린 적도 없습니다.”

“…….”

벤자민은 말이 없었다.

그가 버럭 화를 내거나, 아니면 격한 행동을 하리라 생각했는데.

“그래요? 아쉽네요. 그런 답이 돌아오리라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의외로 끼익, 하고 의자 끌리는 소리가 났다.

퍽 아쉽다는 듯, 어쩐지 불쌍하고 모자란 것을 바라보는 듯한 그 눈이 무척이나 기분이 나빴다.

뭐야, 왜 날 저렇게 쳐다 봐?

“우리가 다음에 만날 때는 이런 분위기가 아닐 것 같네요. 그때 날 원망하지 말아요, 힐데아 영애.”

벤자민은 그 말만 던진 채 뒤로 돌았다.

‘뭐야? 이렇게 간다고?’

내가 당황할 겨를도 없이 그는 인사조차 받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정말 그 말을 하기 위해 나온 것이라는 듯이.

가림막이 순식간에 치워지고, 그가 데리고 왔던 자들이 대열을 이루어 뒤를 따라 사라지는 과정을 모두 바라보았다.

나는 긴장으로 느려졌던 숨을 탁 내쉬면서도, 주변을 당황하며 살폈다.

없었다. 어떤 공격도.

벤자민이 시간을 끈다고 생각했지만, 다가온 이들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었다.

대체 왜?

대체 왜 나를 여기까지 만나면서 시간을 끌었던 거지?

‘정말 마지막 경고를 하기 위해서였다고?’

황태자는 내게 좋아한다고 계속 말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가 나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집착하는 것이라 추측하고 있었다.

그는 자꾸 말했다. 당신과 내가 비슷하다고, 같다고 느꼈다고.

어떤 질투심이나 소유욕을 느끼는 것인지는 몰라도 그게 사랑이라는 감정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기분이 나빴다.

나는 어딘가에서 보고 있을 가브리엘과 그의 기사들을 생각하며 일단 몸을 일으켰다.

‘함정은 실패한 건가?’

어둑한 얼굴로 움직였을 때, 바로 그때였다. 한 무리의 인파가 길거리로 쏟아지듯 움직였다.

어, 하고 당황한 사이에 나는 이미 그 인파 사이로 쓸려 들어 간 뒤였다.

수많은 사람 속.

정신이 없는 와중에, 나는 너무나 익숙한 아름다운 얼굴을 발견했다.

“…….”

이 사람이 왜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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