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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142화 (142/155)

142화. 납치, 믿음의 결과 (3)

그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반가움이 섞인 웃음부터 먼저 튀어 나갔다.

“크라이스?”

그런데 그 반가운 사람은 눈물이 뚝 떨어질 것 같은 우울한 얼굴로 다가와 내가 생각하지 못한 말을 내뱉었다.

“……미안합니다, 힐.”

무엇이 미안하신가요?

그렇게 묻고 싶었으나, 물을 수가 없었다.

크라이스가 내게로 손을 뻗었고,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순간이었으니까.

‘어?’

몸이 축 처지는 느낌과 함께 누군가가 내 몸을 지탱하는 느낌이 났다.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해요. 그렇게 속삭이는 익숙한 목소리도.

대체 왜…….

왜 그런 말을 해요, 크라이스.

그를 붙잡고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이후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 * *

고요히 잠든 얼굴은 어떤 근심도 없어 보여서 그것이 오히려 크라이스의 마음을 시끄럽게 했다.

‘크라이스도 절 믿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믿는 거지요.’

그렇게 다정하게 말해주던 사람이었는데, 한순간이라도 흔들리던 그 눈빛이 칼날이 되어 심장에 박히는 것 같았다.

앞으로 몇 시간 동안 힐데아는 잠에서 깨지 않을 것이다.

벨키우스 공작이라도 쉽게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이동하기 전까지는.

흐트러진 힐데아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주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 와서 섰다. 그리고 작게 웃으며 크라이스를 비웃었다.

“생각보다도 더 잘해주었네요, 최고 신관. 한치의 의심도 없이 다가가는 그 얼굴을 나도 봤거든. 지금 기분이 어때요?”

“…….”

조롱하는 듯한 어조에 고개를 돌리니 음산한 눈빛으로 서 있는 황태자 벤자민이 보였다.

“무슨 기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힐데아 폰 힐링턴을 배신한 기분?”

“꼭 조롱을 하셔야겠습니까.”

“왜, 재밌잖아요? 원래 다 믿고 있던 것이 무너질 때, 그때가 제일 괴로운 법이거든요. 힐데아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전하.”

“너무 궁금해서 힐데아가 깨면 그것부터 물어봐야겠어요.”

악랄한 감정이 넘실거리는 목소리. 칼날 같은 황태자의 시선이 힐데아를 바라봤다.

저것을 과연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

크라이스는 이를 악물었다.

사람의 본성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던데, 황태자는 원래부터 저런 자였을까 아니면 가지지 못한 것에 미쳐버린 것일까.

가지지 못하면 다 없애버릴 것 같은 모습의 황태자가 제 어미와 똑같아 보여 소름이 돋았다.

그런 크라이스의 속을 읽은 것처럼 벤자민이 입술을 비틀었다.

“뭘 그런 표정을 하고 있습니까, 최고 신관. 누가 보면 내가 당신에게 시키지 못할 일을 시킨 것 같아 보이잖아요. 응? 그 눈빛은 뭐예요.”

눈으로 조롱한다.

너라고 다를 것 같아?

“전 원하지 않았습니다.”

“푸핫!”

벤자민이 어깨를 흔들며 웃었다.

“뭐야, 이제 와서 누굴 탓해. 이건 다 당신이 어마마마의 충직한 개로 살아와서 그런 거잖아요. 그런 주제에 힐데아의 옆에서는 살랑살랑, 사람 좋은 척을 했잖아.”

쿡 찌르는 말이었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아니에요, 최고 신관?”

사람 좋은 척.

믿음을 주는 척.

그러나 사실은 크라이스는 황후 데자이아를 위해 온갖 것을 다 해온 자였다.

오로지 한 가지 목적을 위해 하지 못할 것이 없었기에 크라이스는 과거의 자신의 행적에 대해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했었다.

단 한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는.

‘힐데아.’

차라리 힐데아의 저 눈꺼풀이 열리지 않기를 바라는 비겁함은 마음을 숨기면서, 크라이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벤자민과 똑바로 마주섰다.

적어도 이곳에 있는 동안 황태자가 힐데아에게 다가서지 못하게 하려는 듯이, 제 등으로 막으면서.

“정말 당신은 볼 때마다 기분이 나빴어요.”

“제가 위선자든 아니든 지금은 힐데아 옆에서 물러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벤자민의 눈이 불쾌감을 가득 머금으면서도 부드럽게 휘어졌다.

“어쨌든 당신이 시선을 돌리고, 배신해준 덕분에 지금 벨키우스 공작 측은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난리가 났을 거예요. 그러니 한 걸음 물러나죠.”

즐거운 듯 말하는 벤자민이 주변을 빙글 돌았다.

크라이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벤자민도 대꾸를 듣고 싶은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다. 다 어마마마가 원하는 대로 끝날 거니까.”

그들은 지금 황후가 특별히 마련한 곳으로 이동하고 있고, 며칠만 지나면 황후가 원하는 대로 흘러갈 것이다.

자리를 비우고 사라진 힐데아 폰 힐링턴이 완전히 축언 도둑으로 몰려 벼랑 끝에 서게 되는 상황.

그리고 그동안 황후는 황제를 압박하고 그 자리를 기어코 빼앗아 벤자민에게 그 자리를 물려줄 것이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크라이스의 주먹이 하얗게 변했다. 그러나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내가 마련한 검이 누구에게 꽂힐지는.’

그의 복수의 대상에 누가 포함되어 있는지를.

황후는 끝까지 알지 못할 것이다.

크라이스의 시선이 고른 숨을 내쉬는 힐데아에게 닿았다가, 애틋하게 뭉그러졌다.

그의 연정은 여전히 변하지 않고 그곳에 남아, 애틋하게 심장을 찔렀다.

‘당신을 놀라게 해서, 그리고 그 순간 당신의 신뢰를 저버려서…… 미안합니다.’

* * *

가브리엘에게 어느 날, 황녀 라피이아의 편지가 도착했다.

그건 이 납치 사건을 위해 함정을 파기 바로 전의 일이었다.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벨키우스 공작. 황후와 황태자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으니까.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건지는 몰라도 그 뒤의 일도 주의하는 게 좋을 거랍니다.’

황태자와 황후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일로 황녀가 제게 편지를 쓸 줄은 몰랐다.

따지자면 옆에 서는 것도 꺼림칙한 상대에게 받은 어처구니없는 호의였다.

더 어이없는 것은 그 뒤에 이어진 말이었다.

‘물론 당신만 대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최악의 상황이 생기면 내가 움직일 거예요. 욕심내던 것을 가지기로 했으니까.’

그것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다.

미묘한 황궁 내의 움직임의 변화.

그것을 어찌 모를까?

황녀는 스스로 후계자가 되고자 했다. 그건 황후와 황태자와 정면으로 맞서겠다는 뜻이었다.

‘근데 당신이 좋아서 말하는 건 절대 아니고 힐데아가 내 친구라서 걱정하는 것뿐이에요. 벤자민에게 힐데아를 뺏기지 않게 주의하도록.’

불쾌한 기분을 삭이면서도 어쨌든 가만히 굴러들어온 협조를 거절하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평소라면 무슨 꿍꿍이 속인가 의심했을지도 몰랐겠지만, 힐데아에게 황녀에 대해 전해 들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친구라니 그것조차 어이가 없었지만 그렇게 말하는 힐데아의 눈이 너무 기쁘게 반짝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일을 벌였고, 현재.

“주군, 황태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멀어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된 거지요?”

“더 지켜봐라.”

이대로 떠날 리가 없다.

황후는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벤자민이 이대로 떠날 리가.

반드시 힐데아를 인질로 잡고 약점으로 삼으려 들 터였다.

그런데 왜 저대로 멀어지는 거지. 가브리엘은 쿡쿡 쑤시는 것 같은 불쾌감을 삼키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때였다. 갑자기 한 무리의 인파가 거리에 나타났다.

그 속에 힐데아가 있었다.

가브리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순간, 보고하고 있던 디안의 목소리가 찢어지듯 울려퍼졌다.

“어어? 힐데아 영애가 시야에서 사라졌…… 주군, 없습니다! 영애가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아요!”

그도 보아 알고 있었다.

인파가 사라진 거리.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온데간데없이 증발한 것처럼.

유유자적 멀어지는 황태자와 연관성을 찾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주, 주군.”

허망한 듯 말하는 디안의 표정은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왜.

왜 그렇게 침착하세요?

라고.

* * *

감히 누가 힐링턴의 가주, 시어스 폰 힐링턴을 무시할 수 있을까.

그는 일선에서 물러난 상태이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도 전쟁의 신이었고, 기사들의 우상이었다.

중년의 나이로 보이지 않는 젊은 외모도, 그가 타고난 <사랑으로 완벽하리라>라는 축언으로 인해 아내를 잃고 한순간 흔들렸지만, 그는 여전히 강건했다.

그렇기 때문에 힐링턴 공작가의 위세가 예전보다는 떨어졌어도, 시어스 폰 힐링턴을 앞에 두고 비웃을 수 있는 사람은 결코 없었다.

“비, 비켜주십시오, 공작 각하!”

그래서 황후의 명령을 받들어 이곳에 쳐들어온 기사들은 지금 그대로 딱 졸도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늘의 위상을 받아 그 자리에 선 전쟁의 신처럼, 시어스는 차갑고 냉혹한 얼굴로 힐링턴 공작가를 압박하는 기사들을 위엄 있게 내려다봤다.

“지금 무어라 했지?”

“축언 사건의 용의자로 추정되는 히, 힐데아 폰 힐링턴 영애를…….”

용의자.

축언 사건의 용의자!

시어스 폰 힐링턴의 얼굴이 한층 더 살벌히 구겨졌다.

말을 내뱉던 기사가 딸꾹질을 했다.

“그래서. 그까짓 근거도 없는 이유로 내 딸을 데리고 가겠다?”

“이, 이것은 화, 황후 폐하의 명령입니다! 자세한 것은 저희들이 조사를, 으, 이것이 제국의 위엄을 무시하는 일이라는 것을 각하께서는 아셔야…….”

“위엄?”

악!

기사들은 비명을 삼키며 휘청거렸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그들의 가슴을 후려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우습군.”

짐승처럼 빛나는 눈동자.

그것이 눈앞의 힐링턴 공작의 힘이라는 것에 얼굴에 파랗게 질렸다.

“갑자기 쳐들어와 내 딸을 내놓으라 말하는 자들을 살려주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지금 황후에 대한 예를 다하고 있는 것인데.”

황후의 지엄한 명령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예를 다하지 않는다고 하니. 이 얼마나 힐링턴 공작가를 무시하고 있는 것인가.”

원래 계획은 시어스 폰 힐링턴이 제 딸을 내주지 않는다면 그것을 근거로 힐링턴을 압박하고 묶어두기 위한 명분을 얻는 것이었다.

내주지 않을 것을 알았으니까.

왜냐하면 힐링턴 공작가에 힐데아가 없다는 걸 기사들은 이미 알고 이 자리에 왔으니까.

‘그, 그런데 왜 이렇게 무섭지?’

기사들은 채 말을 잇지 못하고 푸르게 질려 입술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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