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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143화 (143/155)

143화. 납치, 믿음의 결과 (4)

현재, 제국의 분위기가 너무 수상했다.

원래 시간이 정해져 있던 귀족 회의장에 황제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대신 웃으면서 나타난 것은 황후였다.

그것만으로도 이상한 일인데 황후의 이름으로 황실의 기사단이 움직였다고 한다.

그것도 힐링턴 공작가를 압박하기 위해서.

“축언 도둑 사건의 용의자가…… 힐링턴의 공작 영애라고 하던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그것은 황후의 주장이었다.

황후는 대체 무슨 증거가 있어서 힐데아 폰 힐링턴이 범인이라고 하는 것인지, 그리고 황궁의 이 이상한 분위기를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지.

그러나 어쩌겠는가.

다들 마른침을 삼키면서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제국의 주인이 바뀌려 하는 것일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 * *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보이는 풍경은 지독하게 낯선 곳. 꼭 지하의 밀실로 보이는 어둑한 벽면이었다.

‘역시 납치당한 건가? 근데 여긴 어디지?’

자연적으로 지어진 동굴 같진 않은데, 주변을 꽉 채운 습한 공기가 기분 좋지는 않았다.

결국 황태자는 날 납치하는 데 성공했고, 일은 예상대로 벌어진 것이다.

‘괜찮아. 이렇게 될 줄 각오하고 움직인 것이니까. 문제는 벤자민만 주시하고 있다가 날 놓쳤을 것이라는 건데.’

그러니 이후 과정이 중요했다.

‘그러니 가브리엘이 찾아올 수 있도록.’

아무렇지 않은 척 목덜미를 만지며 무언가를 딸깍 눌렀다.

소리조차 들리지 않으니 작동된 줄도 몰랐을 것이다.

안도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는데 바로 다가오는 손이 있었다.

“깨셨습니까.”

“…….”

“힐데아. 저는…….”

우울한 목소리, 하지만 듣기 좋은 미성은 여전했다.

나는 찌릿한 심장의 고통을 느끼며 시선을 들었고,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눈빛을 마주했다.

크라이스.

내가 가장 신뢰했던 사람.

‘어떻게 당신이.’

한 번도 배신하리라 여기지 않았던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였다.

‘어떻게 당신이 그래.’

가브리엘을 짝사랑하면서도 그때 당시 그를 믿었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도 크라이스는 믿었다.

내 그 굳건한 신뢰가 의아할 정도로 그만은 믿었다.

납치당하기 전, 그를 보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믿고 있었을 텐데.

‘크라이스, 당신이 왜 벤자민과 있는 건데요.’

입술을 꾹 깨물었는데 크라이스는 여전히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 아픈 곳은 없습니까, 힐데아? 머리가 아플 수도 있습니다.”

뭐라 대꾸할 수가 있을까.

왜 위하는 척이냐고?

어떻게 아무렇지 않으냐고?

어찌 날 배신할 수가 있느냐고 해야 할까.

아니면 언제부터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참 웃기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었다.

묻고 싶었다.

당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황태자의 손을 잡은 거냐고.

차라리 이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던 이유가 있다고 변명해달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바로 그때였다.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죽거리는 음성도.

“표정이 말이 아니네요, 힐데아 영애.”

걸어오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등장했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니 속상한가요? 그런데 울지는 않는군요. 아쉬워라…….”

평온한 어투, 그러나 얼굴에 숨기지 못하는 비열한 미소.

황태자 벤자민.

나는 흔들리는 시선을 감추고 꼿꼿하게 허리를 세웠다.

웃기지 마. 당신이 울기를 바란다면 더 반대로 행동해주어야지.

날 해하려 했다면 벌써 그렇게 행동했을 것이다.

예측대로 원하는 게 있어 묶어두고 있는 것일 터.

“어째서일까요, 전하. 눈 뜨니 낯선 곳이군요.”

“응, 그렇죠.”

“확인 차 묻겠습니다, 전하. 설마 저를 납치하신 건가요?”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느냐는 은근한 비난이었으나 그게 통할 상대는 아니었다.

“와, 놀라워라. 대체 언제 놀라는 거예요, 힐데아 영애. 납치됐는데도 이렇게 담담할 수 있어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당신이 너무 좋아서…… 라고 하기엔 함께한 사람이 있으니, 솔직하게 말할게요. 당신이 지금 자유롭게 돌아다니면 곤란해지거든요.”

여유롭고 만만한 표정에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대체 눈앞의 남자가 어디까지 비틀린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제가 있으면 곤란하다니, 바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힐링턴이라고 하면 어떨 것 같아요, 영애?”

힐링턴 공작가.

가만히 입술을 깨물자, 더없이 즐겁다는 듯이 웃는 모습이 잔인했다.

“아하하. 좋다. 정말 좋네요. 진즉 이렇게 행동할 것을 그랬나 봐요. 당신이 뭐가 그렇게 소중하다고 어떻게든 비위를 맞추고, 바라는 대로 해주고 싶었을까?”

바란 적도 없다.

비위가 상한다는 듯이 바라보자 더욱 활짝 웃었다.

“그런 얼굴을 보고 싶었어요, 힐데아. 차라리 증오라도 보고 싶었어요. 근데 억울하네. 내가 경고했잖아요. 내 손을 잡지 않으면 크게 후회할 것이라고요.”

나는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저를 납치했다고 해서 힐링턴이 무너지진 않습니다. 착각하셨군요, 전하.”

“응? 정말?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벤자민은 무구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해를 끼치지 않을 것 같은 순하고 어린 얼굴에 소름이 끼쳤다.

“어마마마께서 준비하신 것들은 당신을, 그리고 당신 주변의 사람들을 끔찍하게 무너뜨릴 텐데?”

“그렇지 않을 겁니다.”

벤자민이 가까이 다가와 내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어쩐지 옆에 있던 크라이스가 그가 내게 무슨 짓을 할까 봐 긴장하는 것 같아 쓰게 웃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근데 말이에요.”

벤자민이 눈을 가늘게 떴다.

“왜 이렇게 침착해요, 영애?”

“…….”

“꼭 납치당할 줄 알았던 사람 같잖아. 아닌가?”

잠시 숨을 들이켰다.

뭔가 눈치챈 건가?

살짝 숨을 내쉬며, 떨리는 손을 움켜잡았다. 목을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안 돼. 태연해야 해.’

그리고 그를 노려봤다.

“……제가 살려달라 애원하는 모습을 보고 싶을 테니, 그 모습을 보여드리지 않는 게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모습입니다.”

“아하, 끝까지 고고한 영애의 모습만 보여주겠다?”

그는 지금 모를 것이다.

그 속을 모두 보이기 위해 내가 아무 말이나 던지고 있다는 것을.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물건에 대해서도.

하지만 예상한 상황이어도, 내가 의도한 상황이어도 황태자의 속내는 제법 끔찍했다.

“아! 설마, 뭐 당신을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가브리엘 폰 벨키우스가 여기에 극적으로 나타나기라도 할까 봐? 그래서 그래요?”

가브리엘.

심장이 욱신거렸으나, 나는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저를 조롱하실 생각이시라면 대화하지 않겠습니다.”

“아, 정말. 너무 단호하잖아요, 영애. 좋아, 그러면 내가 왜 여기에 당신을 가두었는지 말해줄까요? 솔직하게 내 속내 말이에요. 그게 궁금한 것 같은데.”

짐짓 친구라도 되듯 다정한 대화 같았지만, 벤자민의 목소리는 칼날 같았고 나 또한 다르지 않았다.

눈앞의 사람이 너무 싫었다.

황태자의 말대로 분노와 증오라도 생긴 것처럼.

“답해주신다니 묻겠습니다. 저를 이곳에 가두어 무엇을 얻으려 하시는 건가요?”

“축언 도둑 사건.”

역시.

“이상한 말씀이네요. 저는 그것과 어떤 관련도 없습니다.”

“응, 알아요. 하지만 말이에요, 영애. 원래 힘 있는 사람들이 그러고자 한다면 뭐든 없던 일도 관련될 수 있답니다. 이를테면…….”

벤자민이 조롱하듯 내 눈앞에서 손가락을 흔들었다.

“전혀 관련 없던 사람도 범인으로 만든다던가.”

역시 원하는 게 그것이었군.

“저는 범인이 아니에요.”

“안다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만들 거예요.”

황후는 날 이곳에 가두고, 축언 도둑 사건의 범인으로 만들려는 수작이었다.

“아무리 황태자 전하와 황후 폐하라도 절 범인으로 조작하는 것에 한계가 있을 텐데요.”

“왜 그렇게 생각해요?”

“그간 제가 제국에 없었으니까요. 어떤 증거도 없을 겁니다. 축언 도둑 사건의 진범이 황후 폐하의 손에 있지 않는 한, 말이죠.”

“오.”

차갑게 대꾸하자 진심으로 놀랐다는 듯 벤자민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거기까지 생각했어요?”

그리고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즐거워하니 인간이 아닌 것을 앞에 둔 기분이라, 나는 떨떠름하게 속으로 혀를 찼다.

바로 그때였다.

“근데 어쩌죠, 영애?”

돌연 몸을 돌린 벤자민이 눈을 번들거리면서 내 옆에 있던 크라이스의 팔을 잡고 끌었다.

“할 수 있거든요, 조작.”

그리고 꼭 신난 아이처럼 떠들었다.

“진범이 우리 손에 있으니까.”

이건 또 무슨 말이야.

왜…….

“응, 그래요. 그런 표정 할 줄 알았어. 나도 어마마마께 듣고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알아요? 자, 소개할게요, 힐데아 영애.”

왜 당신이.

벤자민이 크라이스를 내 앞에 이끌었다.

그래서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살짝 찌푸려진, 아니 슬퍼 보이는 그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봤다.

크라이스.

나를 배신한 것까지는 그렇다고 치자. 그래, 그렇다고 쳐. 하지만…….

“잘 아는 분이죠? 바로 눈부시고 고귀한 영광을 안은 최고 신관이자!”

하지만 이건 아니잖아.

“축언 도둑 사건의 진범이랍니다. 아하하하!”

어떻게 이럴 수가.

당신이, 진범이었다고?

* * *

로제리엘은 은밀히 움직였다.

아빠가 밖에서 시선을 이끌고 있었으니, 조용히 움직이며 사라진 인원은 눈치채지도 못했으니까.

‘역시 개발해놓길 잘했어.’

가브리엘에게 연락이 왔기 때문이다. 최악의 가정대로 힐데아의 행적을 놓쳤다고.

그러니 이제 힐데아가 가진 마법 잡화 상단 최고의 발명품이 활약할 때였다.

‘신호만 오면 바로 잡을 수 있어.’

로제리엘은 빠르게 달리면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언니야, 너무 멀리 가면 안 돼. 너무 도발하지도 말고!

“상단주님, 방금 작동되었습니다!”

로제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럼 그거 빨리 가브리엘에게 위치 전송해요.”

기다려, 언니야.

데리러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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