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납치, 믿음의 결과 (5)
왜. 대체 왜 이 여자는 이 순간에도 저렇게 침착한 거지?
‘웃기지 마. 힐데아, 당신은 뭐가 달라서!’
벤자민은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비웃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천불이 났다.
힐데아가 애원하는 꼴을 보고 싶었고, 구차한 몰골을 보고 싶었다.
그런데 이 상황에도 이 여자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는 듯, 혼자 희게 빛났다.
떨지도 울지도 않았다.
다 짜증이 났다.
똑같이 힐데아를 배신한 주제에 자신을 보며 혐오하는 것 같은 크라이스의 시선도 같잖았고.
관심 없는 척했지만 가브리엘이 구해주러 오길 기다리냐는 질문에 표정이 더 단단해지는 힐데아를 보니 속이 뒤틀렸다.
‘이런 꼴이나 보려고 데리고 온 게 아니야. 힐데아, 타락하려면 같이 타락해야지.’
벤자민은 다른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
비겁하고 저열하게도 자신이 이렇게 된 것, 그것은 모두 저를 거절한 힐데아 탓이라고 여기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꺼내 들었다.
축언 도둑의 패.
충격에 빠진 것 같은 두 남녀를 보며 벤자민은 눈을 휘었다.
“뭐야. 왜 말이 없어요, 힐데아 영애? 설마 아직도 최고 신관을 믿고 싶었던 건 아니겠지요. 당신을 여기까지 데려올 수 있게 한 건 모두 당신의 그 최고 신관님 덕분인데 말이에요!”
날카롭게 소리치자 창백하게 변하는 힐데아의 얼굴에 속이 좀 편해졌다.
그래, 사실은 힐데아를 바라보는 이 감정이 사랑이 아닐지도 몰랐다.
사랑이라면 무조건 아껴주고 품어주게 된다는데, 자신은 그냥 힐데아가 제 손을 놓고 도망치는 꼴을 볼 수가 없는 거니까.
“크, 라이스?”
“……힐데아. 저는.”
당장 툭 치면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은 크라이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주 통쾌했다.
어머니께 모든 사실을 전해 들었을 때, 얼마나 기가 막혔던가.
세상 고고한 척 다 하며 힐데아에게 가지 못하게 하며 잘난 말을 지껄이던 최고 신관님께서 사실은 어머니의 개였고, 시키는 건 모조리 다 했다는 추잡한 축언 도둑이었다는 것에 얼마나 우스웠는지!
“신의 축복을 받은 자라는 위명이 아깝지요. 그의 손길에 모든 축언과 이능이 사라질 수 있다니, 이 얼마나 무서운가요?”
벤자민은 키득거리면서 웃었다.
“그, 만. 그만 하십시오!”
멍해졌던 크라이스가 저를 붙잡고 있는 벤자민의 손을 경멸스럽다는 듯이 내려쳤다.
그래도 벤자민은 꿋꿋했다.
“뭘 그만 해요, 최고 신관님. 더 해야지. 앞으로 더한 걸 할 거잖아요? 힐데아, 당신이 그렇게 믿었던 이 사람이 당신의 가족도, 당신의 주변도 모두 망가트릴 거예요.”
“무, 슨, 대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전하.”
“축언 도둑으로 이 제국의 모든 눈부신 축언과 이능을 없애버릴 테니까!”
더 무너지기를. 더 망가지기를.
아, 그래, 더 좋은 방법이 있었지.
“아. 더 재밌는 거 알려줄까요, 영애?”
벤자민은 무척 기뻐져 노래하듯이 지껄이며 제 품 속에 있던 것을 꺼냈다.
“바로 이것. 이게 뭘까? 맞춰볼래요? 맞추면 이걸 바로 마시게 해줄게요.”
“황태자!”
분노한 듯한 크라이스를 확 밀어버리며, 아까처럼 힐데아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난 이걸 당신의 가족들에게도, 그리고 당신이 그렇게 아끼는 약혼자에게도 먹일 거거든요.”
한층 가까워진 거리.
“그럼 이게 뭘까? 참고로 이걸 만든 건 내가 아니에요. 내 어머니도 아니고.”
“그게 뭐든, 저랑 상관없을 듯하군요. 제가 마실 일도 없을 겁니다, 전하.”
“난 듣고 싶은데? 어디 한번 고민해 봐요. 음, 힌트를 줄까요?”
혐오스럽다는 듯 노려보는 얼굴.
다 좋아, 다 좋다고.
그래도 당신이 내 앞에 있잖아?
“저 유능하신 최고 신관께서는 어찌나 능력이 좋은지, 이능을 다른 곳에 담는 것도 가능했거든요. 아, 당신이 식물에 치유의 이능을 담았듯이.”
벤자민은 잔인하게 속삭였다.
“자. 그럼 이게 어디에 쓰였을까? 황제께서 아끼시는 눈부신 축언들만 공격당했던 것, 이상하지 않았어요?”
“…….”
기절할 듯 흔들리는 힐데아를 보니 속이 다 시원했다.
“평범한 우리 어마마마께서 어떻게 사람들을 중독시킬 수 있었을까요? 축언과 이능을 지우는 능력을 지닌 것은 바로 저자인데?”
당신이 믿었던 저 신관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이제 좀 알겠어?
“크, 라이스. 정말, 정말 저게 당신의 이능인가요……?”
“……맞습니다, 힐데아.”
“언제부터.”
“……처음부터.”
“처음부터 날 속였다고요?”
“그렇습니다.”
이어지는 대화에 기절할 것 같은 힐데아의 얼굴을 보며 벤자민은 웃음을 터뜨렸다.
철저히 무너지는 얼굴을 보았는데도, 저를 증오하며 노려보는 시선을 얻었는데도, 그런데도 대체 왜 이렇게 속이 쓰린지 모를 일이었지만.
* * *
난 왜 크라이스를 처음부터 믿었을까.
그리고 저렇게 잔인한 말들이 떨어지는 이 순간에도 왜 믿고 싶은 것일까?
가브리엘을 대할 때와는 달랐다. 그냥, 그냥 믿을 수 있었다.
그게 나한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크라이스도, 주변 사람들도 과연 알았을까?
나 스스로도 믿지 못하던 사람이 그저 따를 수밖에 없도록, 신뢰가 갔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감정이었는지.
‘그걸 당신이 버린 거야, 크라이스.’
믿음이 쩍 하고 갈라졌다.
‘슬퍼.’
절대 무너지는 얼굴을 저 황태자 앞에서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도, 입술이 바르르 떨리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으며 다가오려 했다가 갑자기 무표정하게 물러나는 크라이스가 보였다.
그는 냉혹하게 말했다.
어쩌면 누군가에게 보여주려는 것처럼, 정을 떼려는 것처럼 더욱 냉정하게.
“처음부터 당신을 이용하기 위해 다가갔던 겁니다.”
이용하기 위해서라고?
그런데 왜.
“그러니 새삼스럽게 놀랄 필요도, 아플 필요도 없는 사실입니다. 저는 황후의 사람이고.”
그런데 왜 그런 눈을 해요?
불안한 듯, 자신을 믿냐고 물어봤을 때의 얼굴을 해, 왜?
하지만 크라이스를 더 볼 수가 없었다. 불쑥 우리 둘 사이로 끼어든 벤자민 때문이었다.
그는 번들거리는 눈으로 웃었다. 꼭 미친 사람 같았다.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하며 미간을 찌푸리는데, 벤자민이 내 어깨를 와락 움켜쥐었다.
우악스러운 손길이 갈고리 같이 욱신거렸다.
“긴 말 할 필요 없어요. 그때 말했죠, 힐데아 폰 힐링턴. 당신이 그랬잖아요. 가브리엘 그 인간을 선택한 이유, 축언과 이능 때문이 아니라고 했잖아. 지금도 그래요?”
“어떤 눈부신 축언과 이능도, 우리 사이 감정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요.”
“그래, 그러면 당신도 이전과 같아지는 거 무섭지 않겠네요?”
불길한 기분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황태자의 손에 있는 검은 약병, 저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이미 들었으니까.
그런 와중에 예전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모를 내가 아니었다.
“놔, 요.”
“잘난 듯 그랬잖아요, 영애. 우울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힐데아 폰 힐링턴! 아무 능력도 없고, 주변 모두가 무서워하고, 껄끄러워하는 저주받은 축언! 그러면 아예 아무것도 못 하게 될 때로 돌아가도 상관없잖아요. 증명해 봐요, 힐데아.”
이제 알겠다. 확실히 알겠어.
“당신도 나처럼 되는 거야!”
이 자는 미쳤어!
벤자민이 병뚜껑을 열었고, 크라이스가 다급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황태자, 당장 그만두세요!”
그것이 내 쪽으로 기울여지려는 순간이었다.
‘아.’
바로 그때.
희미하게 손목 안쪽에 진동이 왔다.
‘시간이 다 됐어.’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고, 내게 약병을 기울이려던 벤자민이 멈칫했다. 그리고 기묘한 얼굴로 날 내려다봤다.
“뭐야, 힐데아, 당신.”
그야.
“지금 왜 웃어?”
연극할 시간이 끝났으니까.
벤자민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바로 그 순간.
콰앙!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우리가 있던 곳이 우르르 울리기 시작했다.
“뭐, 뭐야!”
당황한 벤자민의 손이 풀리자마자 나는 바로 몸을 굴리듯 움직였다.
그리고 철썩! 그의 손등을 후려쳐 약병이 바닥에 흩뿌려지게 했다.
그리고 비웃으며 외쳤다.
“그게 그렇게 좋으면 당신이나 퍼 마시세요, 전하!”
“이, 이게!”
분노에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벤자민이 사람 좋은 척하던 표정을 집어던졌다.
당장 나를 움켜잡으려는 듯한 그의 손에 확 물어버릴까 고민할 때, 묵직하고 날카로운 무언가가 우리 사이를 쐐액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아아악!”
피가 뿌려졌다.
쩍 갈라진 벤자민의 손등에서.
그리고 들리는 차가운 음성.
“감히 누구한테 더러운 손을 대지?”
아.
“썰리고 싶지 않으면 손 치워, 황태자.”
“너, 너는?”
“왜. 낯짝 두껍게 이런 짓을 해놓고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을 줄 알았나?”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네, 네가 어떻게 여기에!”
“내가 좀 유능해서. 약혼녀께서 더러운 종자를 만나러 간다는데, 두 다리 뻗고 있을 수가 있어야지.”
그렇지 않은 척했지만, 긴장으로 굳어져 있던 몸이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힘없이 풀렸다.
나 많이 놀랐구나.
어쩌면 무서웠는지도.
눈가에 뜨거운 기운이 핑 돌았다.
‘내가 하자고 벌인 일인데 왜, 눈물이 나지.’
그리고 누군가의 단단한 팔이 나를 뒤에서 굳건히 받쳐 안았다.
무서워하지 말라는 듯 뜨거운 체온이 와 닿았다.
그리고 나를 토닥였다.
“힐데아.”
아, 가브리엘.
“데리러 왔습니다. 생각보다 신호가 늦게 잡히는 바람에 늦었지만.”
아니, 늦지 않았다.
“그런데, 힐.”
이렇게 맞는 타이밍을 찾으려고 해도 못 찾을 정도였는데.
“저자가 감히 당신의 손끝 하나라도 건드렸습니까?”
“가브리엘.”
보고 싶었어.
너무 보고 싶었어요.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안고 있는 그의 팔을 와락 껴안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가브리엘.”
“네, 힐.”
눈앞의 황태자를 찢어버리고 싶다는 듯 노려보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웃는 부드러운 눈매.
아름다운 제비꽃 눈동자.
“리엘.”
“네, 힐. 저 여기 있습니다.”
아름다운 얼굴. 익숙한 체향과 아름다운 백금색의 머리카락.
나를 안심하게 하는 모든 것.
내가 사랑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