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그 어떤 순간에도 당신만을 (1)
<그 어떤 것도 뚫지 못하리라>.
이 세계의 남자주인공, 가브리엘 폰 엘른 벨키우스의 타고난 축언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싸우는 모습을 제대로 본 적이 없어 그 이능에 대해 확실히 와 닿은 적이 없었다.
‘우리 리엘. 왜 주변에서 그렇게 무서워하나 했는데.’
그런데 직접 보니까 정말로.
‘무시무시하구나.’
혼비백산해서 창백하게 질린 벤자민이나, 딱딱하게 굳어 심각한 얼굴이 된 크라이스를 보면 알 수 있겠지.
아마 급히 움직이느라 주변 기사들도 따돌리고 먼저 온 것 같았는데, 일당백이 뭔지 가브리엘을 보며 알 정도였다.
‘검 하나로 지금 이 동굴을 부신 것 같은데. 맞지?’
우르릉- 저 멀리서 울리는 것 같은 소리가 퍽 심상치 않았다.
난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입술을 깨물었다.
‘얼른 빠져나가는 게 좋겠어.’
나는 품속에 숨겨 놓았던 영상구를 꽉 한 번 움켜쥐며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증거는 확보됐다.
‘아주 확실한 현장 증거.’
영상구 속에는 모든 정황을 실토한 황태자 벤자민의 생생한 모습과 목소리, 그리고 황후까지 가담한 내용이 담겨 있으니까.
어떤 변명을 붙여도 황후와 황태자는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저는 어리석지 않아요, 전하.”
나는 아직 무슨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벤자민을 향해 한숨을 쉬며 이죽거렸다.
“정말 이상하지 않으셨나요, 황태자 전하? 이 위험한 상황에 힐링턴 공작가의 공녀인 제가 혼자 이리저리 오간 것 말이에요.”
나는 휘청거리며 가브리엘의 팔을 잡고 일어났다.
“웃기지 마. 지금, 당신이 날 속였다고? 내가 당했단 말을 하는 건가요?”
“왜요. 제가 전하를 속이지 못할 이유가 있습니까.”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하, 하하!”
잡아먹을 듯 핏발이 잔뜩 선 눈으로 노려보고 있는 황태자와 시선을 마주 보며 조용히 웃었다.
사실 당신 말 들어주느라 너무 힘들었거든.
“전혀 눈치채지 못하신 것을 보니 제가 연기를 제법 잘한 모양이군요, 전하. 아니면 전하께서 단순히 어리석으셨거나 둘 중 하나겠지요.”
“……지금 이게 다 연기였다고?”
“네.”
당연하지. 아무 생각도, 대비도 하지 않고 이렇게 따라왔을 리가.
“제가 함정에 걸렸다고 생각해서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마구 해주셔서 감사했어요.”
“…….”
“앞으로의 일에 큰 도움이 될 거랍니다.”
가브리엘에게 내가 먼저 제안했다. 내가 미끼가 되어 나를 노리는 자들을 밖으로 끄집어내자고.
상대는 공격해올 것이 분명하니 이쪽에서 먼저 나서 증거를 만드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행적을 놓칠 것을 대비해 가브리엘이 로제의 마법 잡화상점에서 준비한 추적기까지 함께.
‘로제의 발명품이라던데, 꼭 전생의 위치 추적기 같아서 신기했지만.’
어쨌든 난 로제와 가브리엘을 믿고 무방비하게 밖으로 스스로 노출했고, 낚시는 성공했다.
아주 월척이었지.
거기에 당신이 같이 걸려들지는 정말 몰랐지만, 크라이스.
“이제 어쩌실 건가요?”
음울한 내 시선을 받은 크라이스가 시선을 살짝 돌렸고, 나는 가브리엘의 옷소매를 꽉 쥐었다.
“힐데아 폰 힐링턴! 끝까지, 정말 끝까지 날 이렇게 배신할 수가 있지?”
배신?
웃기는 말이었다.
“왜죠?”
“뭐, 라고?”
“왜 당신이 화를 내시는지 모르겠어요. 당신도, 황후 폐하도 잘살고 있던 절 끌어내고 마음대로 휘두르려고 하셨으면서. 그런데 이런 반항은 싫고 짜증이 나나요?”
나는 가브리엘과 눈짓했다.
이곳은 저들이 특별히 마련한 비밀 공간이었으니, 들켰을 경우를 대비해 뭔가 장치를 해놨을 수도 있었다.
가브리엘이 나와 맞잡은 손에 힘을 더 꾹 쥐었다.
그 작은 움직임으로도 그가 하지 않은 말이 전해져오는 것 같았다.
괜찮습니다, 힐데아.
그렇게.
‘응. 나도 알아요.’
벤자민은 비척비척 뒤로 물러나면서도 시뻘건 눈으로 날 노려보고 있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처럼.
“아니, 아무렇지 않은 척 그만하세요, 영애. 당신을 도우러 온 건 고작 저 인간 하나잖아?”
더듬거리다 벽의 어느 부분에 손을 올린 뒤, 우리 쪽을 바라보며 비열하게 웃는 것도 보였다.
“내가, 누구도 살려 보내지 않을 생각이거든요. 전쟁 영웅? 웃기는 소리하지 말라고 해!”
역시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나.
벤자민은 나와 그리고 가브리엘을 바라보더니 울분을 참듯이 소리쳤다.
“가브리엘, 저 인간이 뭐라고? 한 사람 등장했다고 당신의 처지가 바뀔 것 같아요, 힐데아?”
응, 당연하지.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살고 싶으면 빌어. 빌란 말입니다! 그러면…….”
“아니, 싫은데요.”
나는 가브리엘을 믿었고, 그도 나를 믿었다.
“하려는 거 하세요.”
“뭐?”
우르릉-
멍해진 벤자민이 멈칫한 순간, 다시 한번 공간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전하, 나가셔야 합니다!”
“벨키우스 공작은 상대할 수 없습니다, 전하!”
“일이 틀어지면 황후 폐하께서 명령하신대로……!”
크라이스 뒤로 다가온 기사들이 초조하게 황태자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이곳을 무너뜨리는 장치인가?’
괜찮다.
혹여 그가 다친다면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시 심장을 뛰게 만들 것이고.
그 또한 어떤 수를 써서라도 같이 살려고 할 것이다.
우리는 무사히 빠져나갈 거야.
난 서늘하게 벤자민을 응시했다.
“이번에 확실히 말씀드리죠. 벤자민 전하, 전 당신에 대해 어떤 호감도 없었습니다. 이번 일로는…… 꿈에서도 마주치지 않고 싶군요. 너무 싫어서요.”
움찔하는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아마, 가브리엘이 차갑게 웃을 때와 비슷할 미소를 흉내 내며.
얄미워 보이려나?
“빌라고 하셨죠? 아뇨. 당신에게 구차하게 비는 순간은 앞으로도 없을 거예요. 축언과 이능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체가 경멸스러워요. 남 탓하지 마세요. 저 때문이라고도 하지 마세요. 지금 그 선택들을 하신 건 당신이니까.”
나는 벤자민의 손을 가리켰다.
“뭘 하려고 하시는지 모르지만 하세요. 난 이 사람과 살더라도 같이 살고, 죽더라도 같이 죽을 테니까.”
그게 마지막이었던 듯했다.
“아아악!”
단호한 내 말에 벤자민은 이성이 뚝 끊긴 것처럼 비명을 질렀으니까.
핏발이 툭 선 눈으로 발악했다.
“죽여, 죽여버릴 거야! 내가 그랬지, 내가 가지지 못한다면 아무도 가지지 못한다고!”
나는 아쉽다는 눈으로 그가 쥐고 있었던 약병을 떠올렸다.
그것까지 있었다면 정말 빼도 박도 못할 완벽한 증거가 되었을 텐데.
최고 신관이…… 황후와 결탁해서 살인을 저질러 왔다는 사실을.
“시체가 된 뒤에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힐데아 폰 힐링턴! 이건, 이건 모두 당신이 자초한 거야!”
퍽!
황태자는 벽의 장치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와 동시에 천장에서 불길한 소리가 울렸다.
쿠르릉-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지축을 울렸다.
마침내, 콰아아앙!
뿌연 연기가 눈앞을 가득 채웠다.
‘윽!’
“전하, 움직이시오!”
“저들은 여기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겁니다!”
저쪽에 통로가 있던 모양이었다.
마지막으로 크라이스가 벤자민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아, 당신은 정말…….
날 배신했구나.
“힐.”
“……리엘. 일단 저질렀는데, 괜찮을까요? 당장 여기 무너질 것 같아요.”
“그럼요. 제가 누군지 잘 아시잖습니까. 제 축언과 이능은 그 어떤 것도 뚫을 수 없다는 것인데, 고작 바위 따위가 뭉개기라도 할까요.”
단호히 말한 가브리엘이 날 꽉 껴안았다.
체온이 따뜻했고 부드러웠다. 낮은 웃음과 함께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감겼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다정한 눈동자.
가루가 되어 떨어지는 천장의 벽들이 우르르 우리의 앞으로 쏟아졌다.
그래도 무섭지 않았다.
날 감싼 팔이 무척이나 단단했고, 흔들림 없어서.
“어떤 순간에도 당신의 손끝 하나 다치지 않게 하겠습니다.”
응, 나도요.
당신의 작은 생채기 하나 모두 지워줄게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리고 와르르 무언가가 무너지며 앞이 검게 변했다. 전혀. 전혀 무섭지 않았다.
* * *
“…….”
“…….”
결론만 말하자면 우리는 크게 다치지 않았다.
서로를 지키겠다는 듯 꽉 끌어안고 어둠 속에서 각오한 순간.
환한 빛무리가 우리 주변에 떠돌았기 때문이다.
“힐, 이건?”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뜨는 가브리엘과, 멋쩍은 듯한 표정으로 뺨을 긁은 내 시선이 얽혔다.
“그것을…… 언제 가지고 오셨습니까?”
가브리엘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어둠 속에서도 밝게 빛나고 있는 내 품 속을 바라봤다.
그러니까 이 평범해 보이는 옷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목걸이를.
가브리엘이 내게 준 것.
난 괜히 쑥스러워져서 살짝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이 안에 당신 축언과 이능이 담겨 있다고 했잖아요. 당신의 힘이라면 위험한 순간에 날 내버려둘 것 같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당신이 나한테 선물해준 것이니까. 이 안에 축언을 담아 보내준 것을 이제 알고 있으니까.
내 예측대로 위급한 순간, 가브리엘의 축언과 이능을 담은 목걸이는 우리를 단단하게 보호했다.
<그 어느 것도 뚫지 못하리라>.
패배하지 않고, 무엇이든 이겨낼 수 있는 강인한 기사의 이능이 발휘되었다.
무너지는 돌무더기 사이에서도 작은 생채기나 욱신거리는 멍 정도만 생겼을 정도로 우리를 보호했다.
문제가 있다면 희미하게 빛만 새어 들어오는 현 상황이겠지만.
난 지그시 바라보는 가브리엘의 시선에 뺨이 자꾸만 뜨거워져서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온기가 사라지는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점점 커지는 심장 소리가 들릴까 봐 부끄러웠으니까.
난 조심스럽게 입을 꾹 다문 가브리엘을 바라봤다.
왜 저러지?
그러다가 목걸이의 빛에 비춘 그를 발견하고 말았다. 정확히는 그의 뺨에 흐르는 피를.
아. 큰 상처는 아니었지만 보는 순간 심장이 욱신거렸다.
이제 나는 가브리엘이 조금이라도 다친 모습을 아무렇지 않게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래도 리엘, 조금 다쳤어요. 이리와 봐요. 내 이능 한 번도 본 적 없…….”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성큼 다가온 그가 내가 멀어진 거리만큼 불쑥 좁혔다.
그리고 확 품 안에 끌어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