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그 어떤 순간에도 당신만을 (2)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지금은 그의 체온이 너무 선명하게 느껴졌다.
‘어, 음. 지금이라도 떨어져야 하나?’
하지만 나는 다른 의미로 입을 꾹 다물어야 했는데, 그의 두 팔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뒤이어 들린 그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야 했다.
“……사실 미끼가 되겠다는 당신의 말, 끔찍하게 싫었습니다.”
언제나 강인하고, 여유가 가득했던 가브리엘의 음성에 물기가 서려 있었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가 울고 있는 것 같아서……. 가브리엘?
“리엘? 잠시만…….”
하지만 그는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미치도록 무서웠습니다. 정말, 정말 싫었습니다. 한순간이라도 당신을 위험에 빠뜨리는 결정을 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 끔찍해서.”
어째서일까.
그는 진지한데 나는 희미하게 웃음이 피어올랐다.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
상대가 울고 있는데 나는 웃고 있다니, 이 얼마나 심술궂은 상황인가 싶으면서도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 간지러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강인한 사람이 울먹거리듯이 말하고 있는 모습이 마음속 깊이 와닿아서.
날 위해 울어주는 그가 너무 좋아서.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넘치는 감정이 드디어 내 손 밖으로도 흘러나오는 순간이었다.
가둘 수가 없을 만큼 팽팽하게 팽창해서.
“힐, 저는 너무나.”
고개를 푹 숙인 그가 내 어깨에 이마를 살짝 비볐다.
그 움직임조차도 사랑스러웠다.
“너무 무서웠습니다. 그러니 이런 대범한 일은 이번을 마지막으로 더는 시도하지 마십시오.”
“우리 안 다쳤잖아요.”
“그럴 수도 있었으니까. 그 가능성 하나만으로도 죽을 것 같습니다.”
“어머, 난 당신을 믿었는데요?”
아주 잠깐 침묵하며 숨을 들이쉰 그가 결국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싫어요?”
난 쿡쿡 웃고 있었고, 가브리엘은 나를 품에서 천천히 놓아주면서 억울하다는 표정을 했다.
“……싫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멀어지는 그를 내가 잡아당겼다. 거리가 싫었다.
“리엘.”
희미하게 비추는 빛 속에 그가 있었다.
“힐?”
내 행동에 깜짝 놀랐는지 눈이 커다랗게 떠지는 것을 보며 더욱 손에 힘을 주었다.
휘청거리면서 커다란 키의 남자가 다시금 내게 고개를 숙인다.
욕심이 났다. 마음이 움직여 자연스럽게 손이 따라갔다.
당신의 얼굴이 보고 싶어.
“리엘, 나는요. 당신을 겪게 되면서 혼란해지고, 괴로워졌고, 도망치고 싶어졌지만.”
어떤 얼굴로, 어떤 표정으로 내게 그런 말을 하는지.
“그래도 당신으로 인해 흔들렸고, 단단히 감싸고 있던 껍질을 깨고 나왔고.”
“……힐.”
“내 세상이 변했어요. 당신으로 인해 발끝부터 무너져 새로 만들어졌어요. 그리고 나는 그게 싫지 않아요.”
당신의 눈물이 어떤 모습인지.
‘날 위해주는 당신의 모습을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아.’
치밀어 오르는 욕심에 축축해진 그의 눈매를 간지럽히듯 만지다가 핏자국이 난 뺨 위를 부드럽게 쓸었다. 안타까웠다.
“리엘, 나요.”
그래, 이 순간이 아니라면 또 언제 말할 수 있을까.
원래는 편지를 써 그와 나 사이를 이어주었던 방식으로 고백하려고 했었지만.
마음이 터질 것 같아.
나는 환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당신을 사랑해요.”
“…….”
“너무 사랑해요.”
그냥 사랑하는 게 아니라, 죽도록 사랑하는 것 같아요.
“이제 당신이 없으면 하루를 보낼 수 없을 정도로 사랑해요. 가브리엘. 당신이 내게 그래요.”
당신과 함께라면 죽는 것도 두렵지 않을 만큼 그렇게 사랑하는 것 같아.
“힐, 지금.”
“…….”
“제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습니까?”
다가온 그의 심장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당신이 나한테 사랑한다고 한 것 같은데.”
아닌가. 이건 사실 그의 심장소리가 아니라 내 것일지도 모르겠다.
“……만약 이게 꿈이면 전 꿈에서 깨고 나서 좌절하며 울어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다시 한번만. 한 번만 다시.”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는 것은 왜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그의 뚜렷한 이목구비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응, 사랑해요. 내가 당신을 사랑해요.”
나는 웃으며 울었던 것 같다.
더는 무슨 말을 할 수 없어 서 있는 동안, 가브리엘의 커다란 손이 내 뺨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힐, 가끔은 당신이 너무 좋아서.”
감싸 안았다.
“내 손으로 아프게 할 것 같습니다…….”
아.
“씹어 삼키고 싶을 때가 있어.”
눈을 한번 깜빡였을 때, 그와 나의 거리는 아까보다 더 가까워져 있었다.
나는 습관적으로 눈을 감았다.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부드러우면서도 따뜻한 보드라운 감촉.
습한 느낌과 함께 목덜미를 파고드는 커다란 손가락의 느낌.
‘아.’
입맞춤이었다.
자각하는 순간 심장에서 붉은 열기가 확 치솟아 오르는 기분이었다.
손가락이 오므라들었다.
그의 옷자락을 단단히 쥐며 당기는 손길을 따라 품에 밀착했다.
‘리엘, 리엘. 가브리엘.’
내뱉을 수 없이 삼켜지는 숨결을 따라 소리 없이 그를 불렀다.
그의 열기와 불꽃이 내게도 옮겨 붙는 느낌이었다.
발끝을 들어 더 매달리며 나를 삼킬 듯이 다가오는 그의 움직임에 호응했다.
‘리엘.’
뜨거운 열기 같은 것이 등골을 타고 쭉 달렸다.
쪽, 쪽,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가 다시 마주치는 그의 입맞춤은 새의 깃털처럼 보드라웠고 무척이나 섬세했다.
어깨를 타고 내려온 따뜻한 손이 등을 감싸 쥐었다.
그러나 하나하나 먹히는 느낌이었다. 숨결 하나, 움직임 하나.
그와 내가 떨어진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서였다.
“…….”
“…….”
눈이 마주치자마자 우리는 한숨을 쉬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나는 그의 뺨을 타고 또륵 흘러내리는 물방울에 손을 올렸다.
“뭐예요, 또 울어요?”
그렇게 진하게 키스해놓고 우는 남자가 세상에 어디 있어.
툴툴거리듯이 흘겨보자, 내 얼굴을 덮을 듯 커다란 손이 내 속눈썹을 장난스럽게 흐트러뜨렸다.
“너무 좋으면 눈물이 나는 건가 봅니다. 당신의 고백이 저를 울린 것이니 책임지세요, 힐데아.”
“그, 그런 게 어딨어요.”
“다시 입맞춤하면 멈출지도 모르겠습니다.”
“순 거짓말만 하고…….”
“거짓말이라고 누가 그럽니까? 해봐야 아는 거지.”
닿을 듯 닿지 않으면서 간지럽히는 느낌에 발가락이 오므라들었다.
“으.”
시선이 마주치고 다시 입술이 닿을 것 같은 기분에 나는 얼른 손을 올렸다.
“자, 잠깐!”
여기서 또 키스하면 입술이 부르터버릴지도 몰라!
다급한 마음에 손끝에 이능을 담고 그의 뺨을 덧그렸다.
“힐, 이건?”
희미하게 퍼져나가는 따뜻한 빛에 가브리엘의 얼굴이 아까보다 더욱 확연하게 보였다.
그는 얼떨떨한 표정이었는데, 평소의 멋진 표정만큼이나 그 얼굴이 기억에 남았다.
아, 귀여워서.
그러다 가브리엘이 빛무리를 어루만질 듯이 하며 웃었다.
다정한 미소였다.
“힐의 이능이군요. 당신과 비슷한 느낌입니다. 식물에게서 느껴질 때와 또 다르군요.”
그럴까?
“정말 아름답습니다.”
그의 웃음이 옮겨 나도 웃게 되었다.
“하지만 힐, 제 이능이 괴물처럼 강하지 않습니까. 이 정도 상처는 괜찮습니다. 이능을 낭비하지 마세요.”
아니, 내가 안 괜찮아.
당신이 다치면 내가 다치는 것처럼 아파.
그 달콤한 말을 내뱉기에는 아직 내 뻔뻔함이 부족한 모양이었다.
“저도 이 정도는 괜찮아요. 언제 나갈지도 모르잖아요.”
괜히 더 힘을 강하게 발산해 빛무리를 일게 만들고 거두니, 어느새 그와 내가 손을 꽉 잡고 있었다.
“가브리엘. 있잖아요.”
“네, 말씀하십시오.”
얕게 심호흡을 했다.
얼굴에 열꽃이 피었다.
“당신이 날 좋아한다고 했지만.”
“당신께서도 절 사랑한다고 하셨는데.”
“그, 그거 말고요.”
이 말을 하면 정말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꼭, 꼭 한 번 묻고 답을 듣고 싶었다.
어쩌면 이렇게 어두운 곳에서, 그와 단둘이 있기에 가능한 것일지도 모를 진지한 질문.
“정말 내가 당신의, 가족이 되어도 괜찮아요?”
혹시 오늘 번갈아가며 우는 날일까? 그렇게 묻는데 왜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는지 모르겠다.
엄청나게 당황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모르는 가브리엘이 훤히 보이는데도 눈물샘이 망가진 것처럼 주룩주룩 흘러나왔다.
가족.
내게는 정말, 정말 어려운 말이었는데. 이제는 생각하면 가슴이 아리고 동시에 따뜻해져오는 단어가 되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는 그 가족이라는 이름 안에 가브리엘을 넣고 싶었다.
그의 가족이 내가 되고, 내 가족이 그가 될 수 있기를.
눈을 보는 순간 알았다.
내 눈물에 당황하면서도 온갖 감정으로 일그러지는 가브리엘의 눈을 보면서.
그도 나와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달래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그가 손을 뻗었다.
‘!’
아까의 부드러운 입맞춤과는 결이 달랐다. 잡아먹히는 것처럼 뜨거운 열기가 격렬하게 몰아닥쳤다.
으, 등이 밀리고 벽이 닿았다.
고개를 살짝 비튼 가브리엘은 갈증이 급한 사람처럼 내 숨을 삼켰다.
헐떡거리며 멍하니 바라보는데 고개를 든 남자가 나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렇게 묻는 건 반칙이지 않습니까.”
무슨 말이지.
“이미 제 모든 것은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이 싫다고 하셔도 그 손에 꽉 쥐여 드릴 겁니다. 그러니까 제 가족…….”
이제 심장이 너무 뛰어서 터져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환히 웃는 가브리엘의 얼굴만 잔상처럼 남았다.
그렇게 예쁘게 웃기 있어요?
농담을 내뱉고 싶었는데 입술이 파르르 떨리기만 했다.
그는 떨리는 입술을 따뜻하게 하겠다는 듯 다가와 다시 입술을 훔쳤다.
“사랑합니다. 그저,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