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그 어떤 순간에도 당신만을 (3)
모든 것은 단 며칠 만에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었다.
귀족들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움직이기 전에, 황후는 자신과 결탁한 이들과 함께 황제를 유폐시켰고 황녀를 잡아야 했다.
가장 큰 방해가 될 수 있는 벨키우스 공작가와 힐링턴 공작가를 그들의 자식을 미끼로 목줄 걸어 움직이지 못하게 약점을 쥐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공작 둘을 데려다 놓고 축언 도둑의 이능으로 그들을 협박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황태자 벤자민을 황위에 올려놓는 것을 공표함과 동시에 축언 도둑 사건의 진범이 사실은 힐링턴의 영애였음을 밝히며 공작가 자체에 죄를 물어야했다.
그렇다면 완벽한 것이었다.
정말 완벽하게.
“뭐라고 했지, 지금?”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황후는 그야말로 분노에 눈이 돌아버리는 느낌이었다.
“아니. 아니야. 이상한 말을 들었다. 지금, 크라이스, 그대가 뭐라 했지?”
“죄송합니다, 황후 폐하. 황태자께서…….”
데자이아는 핑- 도는 현기증에 이를 악물었다.
계획대로 멍청하게 홀로 다니는 힐데아 폰 힐링턴을 납치했다.
크라이스가 있으니 여차하면 이능을 없애버리라는 이야기를 하고, 정말 어쩔 수 없으면 그 자리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죽여버리라는 이야기까지 전달한 뒤였다.
그 와중에 황녀 라피이아를 잡으려 했지만, 그 미꾸라지 같은 계집이 순식간에 빠져나가 이를 갈고 있던 차였는데.
그랬는데.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야!”
쾅! 결국 분을 못 이긴 황후가 손에 잡히는 것을 마구잡이로 집어던졌다.
그중 날카로운 것이 있었는지 엉망인 몰골의 사내의 뺨을 스쳐지나갔다.
순식간에 피부가 갈라지며 붉은 피가 흘렀다.
그래도 황후의 분노는 가라앉을지 몰랐다.
“그대 혼자 살아남았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죄송합니다, 황후 폐하. 너무 경황이 없어…… 전하를 챙기지 못했습니다.”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사실입니다. 힐데아 폰 힐링턴에 대한 미련이 남으셨는지, 전하께서 갑자기 다시 되돌아가셨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때는 완전히 무너지고 만 상황이라…….”
“같이 간 기사들은, 그들도 고립되었단 말인가?”
“그들도 뒤따랐습니다.”
그런데 어찌 그대만 무사하지?
의심 가득한 눈을 받고도 최고 신관은 여전히 유리알 같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황후는 이를 악물었다.
“아니, 믿지 않는다.”
황태자가 실종되었다.
“발견되기 전까지는 믿지 않아.”
아직 힐링턴에서 소식이 온 것이 없으니, 납치했던 그 계집애가 살아 돌아온 것은 아닌 듯했다.
하지만 그것이 죽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의 아들이, 가장 큰 패가 사라지다니!
“당장 인원을 보내 고립된 장소를 파헤치게 해! 당장 내 아들을 데리고 돌아오라! 못한다면, 못한다면…….”
시체라도.
시체라도 데리고 와.
황후의 눈이 기이하게 번들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크라이스의 표정은 모든 것이 빠져나간 것처럼 무기질적이었다는 것을.
* * *
그 어느 때보다 절박하고 무서워야 하는 상황인데, 왜 이렇게 편안한 것일까.
“목이 마르지는 않으십니까?”
나는 피식 웃었다.
이 상황에 물을 구할 수 있을 리도 없고, 목이 마른다면 어떻게든 구해다 줄 것 같은 가브리엘의 목소리가 웃겨서.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날 끌어안고 있는 품에 어깨를 더 푹 기댔다.
따뜻해.
“저번에도 비슷하게 말한 적 있는 것 같지만, 리엘. 난 첫눈에 당신에게 반한 것은 아니었어요.”
가브리엘의 품이 경직되는 것이 느껴졌다. 짓궂은 웃음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사이가 된 게 지금도 신기해요.”
“……저는 신기하지 않습니다.”
“운명이라는 게 있다면 적어도 당신과 나는 아니었을 것 같지 않아요?”
가브리엘은 아주 섭섭하고, 충격이라는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사실이었다.
“그런 표정 짓기 전에 우리 첫 만남을 생각해 봐요.”
“……그때는.”
아니, 그렇잖아. 정말이란 말이야. 우리 첫인상은 정말 최악이었다고. 당신, 도둑이었잖아요. 그걸 보며 첫눈에 반하면 이상한 거지.
“저는 첫눈에 반했습니다.”
다부지게 말하는 가브리엘을 보며 웃음이 터졌다.
“저는 처음부터 당신이 좋았습니다.”
심장이 멎어서 죽을 뻔해 놓고 뭘 해?
어이가 없다는 듯 바라보자 억울하다는 듯 불퉁한 표정을 하는 것이 웃음이 나기는 했지만.
나는 그의 뺨을 쿡 찔렀다.
“조용히 해요, 가브리엘. 오늘은 내 말을 들어줘야 하는 날이에요.”
“……가만히 듣겠습니다.”
그래야지.
나는 괜히 그의 옷자락을 꼼지락거리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느리고, 둔하고, 굼떠서 아직 제대로 다 말도 못했는데.
“나는.”
그는 내가 어떻게 그를 좋아하게 됐고, 어떤 감정이 피어났고, 그래서 지금 어떠한지 세세하게 들을 필요가 있었다.
아주 멀리, 멀리 돌고 돌아서 이렇게 고백하게 되었으니까. 그가 내 그 말을 간절히 기다렸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모두 말해주고 싶었다.
“당신은 내게 쌓이는 눈과 같았어요. 그냥 가브리엘 폰 벨키우스, 그냥 그런 사람일 뿐이었는데 어느 순간 이름이 눈에 들어왔어요. 자꾸만 생각이 났죠.”
“힐.”
감동한 듯한 목소리를 달게 삼키며 눈을 감고 말을 이었다.
“고독할 때마다 당신이 서툴게 위로를 남겼던 편지의 말들이 생각났어요. 당신이 직접 쓴 편지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때였는데도 그랬어요. 보고 싶었고. 기다렸고.”
“……정말 기다리셨습니까?”
“응. 당신의 편지가 오길 기다리게 되었어요. 부모님을 기다리는 아이처럼요.”
“더 많이, 더 자주 쓸 걸 그랬습니다. 당신께 하고 싶은 말이 더 많았는데…….”
“그게 자제한 거였어요?”
“네. 수다쟁이가 되면 격이 떨어진다고 옆에 있는 놈이 잔소리를 하는 바람에.”
울분에 찬 듯 말하는 목소리에 깔깔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저 말은 엄살 섞인 거짓말이었다.
그 먼 곳을 생각하면, 그 치열한 전투와 전쟁터를 생각하면 그의 편지는 엄청 자주 쓴 것이었다.
아마.
‘당신은 모든 남는 시간을 내게 쏟아부었겠지.’
이제는 그가 직접 말하지 않아도 그 정도는 다 안다.
힘들 때도, 괴로울 때도 편지를 썼을 그를.
“당신이 수도를 떠나 있던 그 시간, 이상하죠. 나는 언제나 당신이 옆에 있는 것 같았어요.”
옷소매를 만지작거리던 손이 이제 그의 손가락을 장난감처럼 어루만졌다.
“그래서 정이 쌓이고 쌓이다가 당신이 되돌아온 순간. 편지만으로 쌓였던 그 정이, 당신을 직접 보니 사랑으로 변해버린 거예요. 정확히는 이루어질 수 없는 짝사랑으로.”
그때마다 그가 손가락을 움찔거리는 것이 재밌어서 웃음을 몇 번 짓기도 하면서.
“견딜 수가 없어졌어요. 난 여태까지 내가 생각한 올바르고 착한 첫째 영애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마음이 생각대로 되지 않았어요.”
불을 삼키는 것 같았던 순간들.
그게 거짓말 같았다.
지금은 이렇게 따뜻하고 좋았으니까. 당연하다는 듯이 내 머리카락 끝을 매만지는 그의 손길이 친근했다.
“당신이 내 동생을 좋아한다고 생각했고, 나는 방해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내 마음을 전하면 속이 시원해졌겠지만, 그 행동으로 동생의 평온을, 그리고 당신을 아프게 하는 것이 너무 두려웠어요. 다 망치고 깨뜨리게 될까 봐. 그런 마음으로 떠났어요.”
떠난다는 말을 내뱉을 때마다 가브리엘의 손이 한층 움찔거렸다.
듣기만 해도 싫은 모양이었다.
비식비식 웃음이 나왔다.
“너무, 슬픈 말입니다.”
“이제 안 가요.”
“가시더라도 따라붙겠습니다.”
“어디라도요?”
“네. 그러니 앞으로는 어디든 저만 데려가시면 됩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빙긋 웃는 얼굴이 가까워졌다.
나는 살짝 그의 팔뚝을 꼬집었지만 꿋꿋하게 밀어오는 얼굴을 어떻게 거절할 수 있을까?
아, 정말 나가게 되면 우리 입술은 퉁퉁 불어서 못 볼 꼴이 되는 거 아닌가 싶었다.
“그거 아십니까, 힐?”
하지만 그는 내 입술을 삼키기보다는 손가락 끝으로 툭 건드렸다.
뭐야, 이게?
“당신이 입술을 깨무는 습관.”
아, 나도 모르게 또 입술을 잘근거리고 있었나 보다.
멋쩍게 혀로 핥으니 한층 시선이 짙어졌다. 가까이 있는 그의 체온이 훅 달아오른 것처럼 열기가 느껴졌다.
그런데 왜 내 심장이 점점 같이 빨리 뛰는지 모르겠다.
“이 습관이 저를 미치게 하니, 고쳐지실 때까지.”
나긋하게 휘어지는 눈매가 저렇게 예쁘다고 왜 누구도 말을 안 해준 거지?
“이렇게 입맞춤하겠습니다.”
쪽, 하고 귀엽게 맞닿았다가 떨어지는 접촉에 손가락이 간지러웠다.
애교라도 부리듯이 예쁘게 접힌 눈가를 만지고 싶어서.
“그러니까 이제 입술을 깨물면.”
저와 키스하고 싶다는 뜻으로 알아들을 겁니다.
그렇게 나직이 속삭이는 얼굴을 멍하니 보며, 나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 깨물었을 때.
바로 그때였다.
-콰아앙!
격한 소리에 가브리엘이 나를 감싸 안았고, 품에 푹 안긴 채 멍하니 환히 비추는 빛을 바라봤다.
누군가가 서 있었다.
위풍당당한 태도로 다리를 턱 얹은 채, 뻥 뚫린 구멍 사이로 우리를 내려다봤다.
밝은 빛 속에서 휘날리는 분홍색 머리카락.
……로제?
“둘이 뭐 했어.”
앗.
“누구는 큰일 난 줄 알고 머리털 뿌리가 흔들릴 정도로 달려왔는데 아주 하트가 풀풀…….”
이상하다.
오늘따라 로제리엘의 얼굴이 평소와 달리 흉폭하게 느껴졌다.
꼭 작은 맹수처럼, 당장 와서 물어뜯을 것처럼 가브리엘을 노려보는 것이다.
우리 로제가 언제부터 저리 사나웠지?
“가브리엘, 감히 우리 언니에게 손을 댄 거면 정말 뼈와 살을 분리…….”
“로제!”
나도 모르게 그 매서운 시선에서 가브리엘의 앞을 가리면서 로제를 바라보며 웃었다.
“로제, 구하러 온 거야?”
“언니, 일부러 그러는 거지?”
“응.”
“……하, 정말.”
로제는 아주 잠시 인생의 씁쓸함을 깨달은 사람처럼 기이한 표정을 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어쩔 수 없다는 듯 픽 웃더니 손을 흔들었다.
“그만 꽁냥거리고 얼른 돌아가자, 언니야. 남은 일이 한가득이란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