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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148화 (148/155)

148화. 탐욕의 끝에는 (1)

시어스 폰 힐링턴의 무시무시한 기세에 황궁으로 복귀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떠날 수 없어 힐링턴 공작가 앞에 죽치고 있던 황후의 기사들은 죽을 맛이었다.

힐링턴 공작가를 막아라.

그리고 그곳에서 힐데아 폰 힐링턴을 데리고 오라.

그것이 명령의 모든 것이었다.

‘제기랄, 저 괴물을 상대로 둘 다 불가능한 거 아닌가 말이지!’

시어스 폰 힐링턴을 노려보는 기사들에게 좌절이 퍼지는 때였다.

“필요한 건 나인가요?”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고요하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부드럽고 우아한 여인의 목소리였는데도 그 속에서 기백이 느껴지는 것은 착각일까 싶었지만.

멍하니 고개를 돌린 기사들의 눈에 한 여자가 들어왔다.

“당신은……?”

솔직히 어디서 흙 밭을 구르고라도 왔는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엉망인 몰골이었다.

그런데도 누구도 그녀를 무시할 수 없었다.

차분하게 뜬 붉은색의 눈동자, 헝클어지고 먼지가 묻긴 했지만 여전히 아름답게 빛나는 은색의 머리카락.

힐데아 폰 힐링턴.

그녀가 우아하게 턱을 치켜들고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으로 말했다.

“내가 움직인다면, 당신들이 힐링턴 공작가에 저지르고 있는 무례를 그만둘 것인가 물었습니다.”

기사들이 입을 벌렸다.

“당신이, 그렇다면 힐데아 폰 힐링턴……?”

기사들은 힐데아의 얼굴을 이미 알고 있었는데도 순간 그렇게 묻고 말았다.

차가운 미소가 퍼지는 얼굴이 기사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훑었다.

그때마다 그들은 어깨를 떨었다. 검 하나 쥐지 못하는 여인을 앞에 두고 왜 이렇게 다리가 풀리는지 모를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재밌군요. 대체 언제부터 황후의 기사들이 힐링턴 공작가를 아무 이유 없이 압박할 수 있었는지. 어떤 근거도, 증거도, 재판 과정도 없이 힐링턴 공작가의 영애를 데리고 오라 할 수 있었는지.”

기사들은 얼굴을 확 붉히며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그들도 알고 있었다. 모시는 분이 황후 폐하이기 때문에,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명령은 목숨으로라도 따라야 하지만.

이 명령이 부당하다는 것을.

지금 황궁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또박, 또박 걸어온 힐데아 폰 힐링턴이 청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당당하고 결백합니다.”

어느새 기사들은 그녀에게 길을 내주고 있었다.

“그러니 당신들이 원하는 것이 나라면, 좋습니다. 함께하겠습니다.”

다가와 그녀의 팔을 묶으려는 기사들에게 힐데아는 고개를 저었다.

“치우세요.”

손을 내젓자 기사들이 말 잘 듣는 짐승처럼 걸음을 멈췄다.

“따라가겠어요. 하지만 내 발로 걸어가지요.”

안타깝다는 듯이 이를 악물며 바라보는 시어스 폰 힐링턴과 눈을 마주친 힐데아 폰 힐링턴이 빙긋 웃은 뒤 몸을 돌렸다.

덕분에 앞장서는 사람이 바뀌었다. 기사들은 멍한 표정으로 황궁을 향해 걸어가는 힐데아를 호위하듯 따라붙으면서도 생각했다.

이게, 이게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그 흐름을 바꿀 수 있는 자는 없었다.

* * *

귀족들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황궁에서 이상한 움직임이 포착된 것을 차치하더라도, 힐데아 폰 힐링턴이 체포되었다니.

축언 도둑 사건으로 인해, 거기다가 황태자 살해 미수라니?

거기다 하루아침에 황녀가 모습을 감추고 실종되었다니.

“혼란스러운 것 없답니다, 경들. 모두 내 뜻에 따르기만 하면 아무 일도 없이 무사히 지나갈 터이니.”

그러나 그들의 혼란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 우아한 표정으로 황제를 대신하여 또다시 귀족 회의장에 모습을 비춘 황후 데자이아는 너무 태연하기만 했다.

“왜 그런 표정들입니까?”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귀족들이 입을 열었다.

“황후 폐하, 힐링턴의 일을 이렇게 처리하시는 것은 아무래도 옳지 않…….”

“아. 이틀 뒤, 힐링턴 영애를 벌하기 위한 재판이 있을 예정입니다.”

“하, 하지만! 황후 폐하!”

“내 확실한 증거와 증인이 있다 하였는데 무슨 말들이 이리 많은 것인지 모르겠군요.”

말만 재판이지 처형장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황후는 이미 힐데아 폰 힐링턴을 죽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리고 이건 공작가 영애에게 행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없었다.

일개 평민도 이런 식으로 재판에 세우고 바로 사형을 집행하진 않았다!

“좋습니다. 그대들, 이 일에 불만이 있는 자가 있다면 앞으로 나오세요. 그 용기, 이 황후가 친히 치하하도록 할 터이니.”

하지만 탁- 하고 황후가 앞으로 내민 것을 보니 귀족들의 입은 꾹 닫혔다.

‘저게 뭐지?’

섬뜩한 침묵이 일었다. 아무도, 누구도 그것이 뭔지 말하지 않았다.

빙긋 웃은 황후조차 그걸 내밀면서 무엇인지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보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작은 유리병에 담긴 검은색의 액체.

그러나 그 안에서 느껴지는 섬뜩한 기운은…… 이능이었다.

축언과 이능.

‘황후가 어찌 이능을?’

번개 같은 깨달음이 일었다.

축언과 이능을 잃어버린 자.

‘사실 축언 도둑 사건의 범인은…….’

귀족들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드디어 황후의 웃음의 의미를 알았기 때문에.

떠들고 싶으면 나와서 떠들라. 대신 이것이 그대의 목에 처박힐 터이니.

‘아아.’

어찌하여 황제 폐하가 모습을 비추지 않는지, 황후가 전권을 장악하고 있는지 모두 이해가 갔다.

저것 하나 때문에.

축언과 이능을 잃어버리고 무사할 자가 없었기 때문에.

가장 강력한 권력이었던 그것이 그들의 목을 죄는 순간이었다.

“어, 없사옵니다, 황후 폐하.”

“뜻대로 하시옵소서.”

비굴하게 고개를 숙이면서도 귀족들은 자리가 비워져 있는 힐링턴 공작가와 벨키우스 공작가의 좌석을 간절히 바라봤다.

그들조차 없다면, 이 일을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 * *

나는 비식 웃었다.

아주 툭 치면 그대로 뻥 터질 것처럼 뺨을 부풀린 로제리엘과 마찬가지로 못지않게 기분이 상한 것 같은 아빠가 보였기 때문이다.

“오셨어요? 로제, 왜 그런 얼굴이야.”

물어보자마자 로제가 바락 소리쳤다.

“언니가! 언니가 왜 이런 꼴을 하고 있어야 해.”

정말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달려와 철창을 양손에 쥐고 마구 흔들었는데, 괜히 덜컥덜컥 소리가 불안해서 나는 감옥 위를 쳐다봤다.

무너지진 않겠지?

“힐데아, 이곳은 너무…….”

“아빠, 저는 괜찮아요.”

가까이 다가온 아빠가 한숨을 내쉬었다.

“너를 이런 곳에 두어야 하다니, 아빠의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구나.”

“아빠…….”

그 모습이 너무 슬퍼보여서 괜스레 죄송한 마음이 불쑥 들었다.

내 가족들은 다 계획된 것이라 괜찮다고 해도 내가 감옥에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음, 그래. 아빠나 로제가 이곳에 들어와 있다고 생각해보면, 나도 그런 마음이겠지.

나는 가족들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솔직히 이야기하기로 했다.

일종의 투정 같은 것을.

“저 조금 배고픈 것 같아요.”

그런데 웬걸.

역효과가 났다.

‘응?’

솔직한 내 말에 아빠와 로제의 표정이 순간 억장이 무너진다는 듯 변했다. 말을 내뱉은 내가 당황할 정도로.

아니, 뭘 저렇게까지…….

“빌어먹을, 사람을 굶기기까지 했어?”

로제가 짐승처럼 소리쳤다.

“뭐가, 뭐가 먹고 싶은 것이냐, 힐. 이 아빠에게 뭐든 말해보거라! 어떤 진귀한 것이라도 당장 가져다줄 터이니!”

아빠는 사색이 되었다.

“언니야, 일단 가지고 온 것들 많으니까 기다려 봐. 다들 가지고 와!”

로제가 갑자기 이를 박박 갈며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러자 사람들이 움직였다.

‘어?’

그리고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로제와 아빠 뒤에 왜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따라왔나 했더니 그들이 다 뭔가를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 로제?”

“사람들이 하나씩 언니가 좋아하는 거 챙기다보니까 이렇게 됐지 뭐야. 리라와 시엔이 따라온다고 난리피우는 것을 겨우 말렸어. 언니 탈옥시키겠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경비병을 죽여버리면 안 되잖아?”

아니, 로제야.

뭘 죽여.

“왜애, 언니야. 마음에 드는 게 없어?”

나는 산해진미, 그야말로 화려하게 차려진 음식들을 보며 미간을 구겼다.

하아. 내가 그래도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 범죄자인 상태인데…….

“이거 너무 과한 것 같아.”

“아니야, 전혀 과하지 않아.”

“열 명이 다 먹어도 남기겠는데.”

“흥, 어디 가서도 잘 먹고 잘 자야 하는 거야, 언니야. 골병들면 어쩌려고 그래?”

음, 디저트까지도 챙겨왔구나.

나는 통통한 포도를 바라보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로제, 대체 누가 말려?

로제는 내가 바라보고 있는 포도를 얼른 뜯어서 철창 사이로 넘겨주었다.

“얼른 먹어. 만약 언니가 여기 있는 며칠 동안 무슨 병이라도 생기면, 내가 이 제국을 다 뜯어서 찢어버릴 거야.”

으응, 내 동생…….

참으로 듬직하기도 하지.

이제 자신의 성질머리를 숨기지도 않는 로제의 모습이 낯선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보면 웃음이 나왔다.

여전히 언니인 나를 따르고 참 좋아해 주는 것은 다르지 않아서.

결국 로제가 화를 내는 이유도 나 때문이었으니까.

“그리고 이것도, 저것도, 언니야, 밤에는 춥단 말이야. 이봐, 경비병! 당장 뭔 열지 못해요? 이거 당장 집어넣야 한단 말이에요!”

“하, 하지만 문을 열었다가는…….”

“열지 않으면 당신 목이 날아갈 거예요.”

살벌한 로제의 기색에 벌벌 떠는 경비병이 다가와 가련하게 감옥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밖에 놓아야 했던 음식들과 여러 가지 물건들이 감옥 안을 꽉 채우기 시작했다.

“로제, 이건.”

나는 로제가 발명했다는, 마법 잡화상점의 특이한 발명품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건…….

그건 아무리 봐도 내 전생에나 봤을 법한 물건들이었다.

전원을 누르면 열선이 켜지는 전기난로를 닮은 것, 전기 없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무리 봐도 전기장판을 연상케 하는 매트.

“…….”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 차분하게 웃고 있는 로제를 봤다.

저번부터 느낀 것이었지만.

로제 주변의 물건들은…….

내가 납치당했을 때 찾아올 수 있게 한 로제의 발명품도 그러하고.

모두.

“로제, 언니가 이번에 다 정리하고 감옥에서 무사히 나가게 되면.”

내 전생의 물건들을 떠올리게 하는 것들이었다.

보지 않고, 겪지 않았다면 알 수 없을 것들.

그게 로제의 발명품이라는 것.

“너한테 물어볼 게 많을 것 같아.”

수수께끼 같은 내 동생.

넌 대체 어디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었던 거야?

넌, 누구야?

“응, 그러자, 언니야.”

그러나 로제는 당황하지 않고 환히 웃었다.

그 애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말해 줄게.”

물어보는 게 뭐든 답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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